에이블은 잠이 없다. 알파에이블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물론 숙면을 취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신체리듬에 문제가 없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선데이와 남자는 알파에이블이다. 고로 그들은 잠이 없다. 덕분에 강제적으로 관능적인 라디오 채널의 청취자가 되었다며 노친네가 아침부터 감사 인사를 열심히 해댔다. 같이 디제잉 하던 개새끼는 어디로 날랐냐는 말까지 빼먹지 않았다. 겨울은 일일이 대꾸할 힘이 없어 하품만 쩍쩍 내뱉고, 선데이는 입에 담기도 수치스러울 만큼의 야해 빠진 말을 여실히 내뱉어댄다. 이러니 책을 안 날릴 수가 없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가장 풍성한 무기고였다. 겨울은 벽면을 장식한 책장 안의 책들을 언젠가 모조리 던져보리라 결심하고서 1층으로 내려오니 남자가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었다. 불현듯 영하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아침부터 꽤 불쾌할 일이 많다.
"적당히 해라. 책 다 날려버리기 전에."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너는…."
"그래. 말 나온 김에 뭐가 안 된다는 건지만 묻자. 성장이 끝났어도 일찍이 다 끝난 성인 둘이 몸 섞는 게 뭐가 안 된다는 건데? 뭐, 너희 집이라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줘서 그래? 그럼 쫓아내, 그냥. 그리고 네 소중한 친구랑 떨어지게 하고, 숫자는 끝으로 다다르게 만들어. 그래서 둘 다 뒤져버리게 해 봐."
겨울의 심성 꼬인 발언에 선데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너는 존나…, 존나 나쁜 년이야."
"그런 칭찬 적잖게 들어."
"아, 진짜. 아!!"
"그래서 왜 안 된다는 거냐고."
"그거야…!"
"됐어. 그만해, 둘 다."
남자의 목소리가 선데이의 말을 끊고 들어온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가 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을까, 아니면 둘의 언쟁에 집중하고 있었던 걸까? 겨울은 자신이 남자에게 눈길을 뺏겼던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겨울을 바라본다. 무표정의 그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다. 그러나 자꾸만 시선이 간다.
"자, 이게 뭔지 알아?"
말없이 이어지던 눈맞춤이 선데이의 방해에 끝이 났다. 다짜고짜 겨울을 향해 손목을 들어 올려 제 숫자를 들이미는 선데이의 손목. 14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남자의 숫자와는 다른, 움직이지 않는 숫자가 있다. 그리고 연달아 손바닥 위로 드러나는 해, 달, 그 안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별들까지. 어둠 하나 없이 완벽한 빛으로 뒤덮인 일월성신이
순식간에 겨울의 시선을 앗아간다.
M의 관계에 있는 두 에이블과 펜들럼이 적절한 힘의 분배를 통해 신체적으로 가장 안정된 기능을 유지한다고 배웠는데. 모든 힘을 한 그릇에 담고 있는 알파에이블이면 말 다했지. 과열된 능력을 통제하는 것도 진 빠지는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에 들어왔다. 겨울은 난생처음으로, 에이블을 향한 동정을 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 고귀한 집에서 몸을 섞었다가는 윈터 너나 그 개새끼 둘 다 몸 엉킨 상태 그대로 튜스데이한테 던져버릴 거야."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근데 튜스데이는 또 누구야."
"곰."
곱게 책에 집중한 줄 알았던 남자가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남자의 대답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노친네가 곰 아니야!! 라고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돌려댄다. 아마도 던질 물건이 어디 없나 찾아보는 듯 보였다. 남자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성격이라 그렇다쳐도, 노친네라면 단순하게 짝이 없어 성격이고 패턴을 파악하는 건 애당초 끝냈다.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했잖아. 곰 많다고."
"튜스데이라고!!"
“어련하겠어.”
하여튼, 노친네 약 올리는 데에는 선수가 따로 없다. 씩씩대며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겨 사라진 선데이를 뒤로하고 남자를 바라보니 그는 어느새 다시 독서에 집중한 상태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는 거 아니야?"
"그냥 보는 건데."
"나한텐 노골적이야."
"너무 생각이 야한 거 아니야?"
"노골적이라는 게 왜? 전혀 야한 표현이 아닌데."
왜 그게 겨울에겐 야하게 들렸을까. 아무래도 어젯밤의 여파가 가시질 않은 탓인 것 같다. 부끄러움에 볼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딱히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열기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화근이었나보다.
남자가 책을 내려놓았다.
"나 그쪽 그렇게 본 적 없어. 그리고 일어나지 말지?"
"언제까지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럼 이쪽으로 오지 마."
"왜?"
육하원칙에 유독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게 겨울의 약점이었다. 웬만한 언변에서는 꿀리지 않아도 이렇게 생각할 틈을 안 주고, 생각이라기보다는 변명의 여지를 주지도 않은 채 불도저처럼 들이미는 식의 언행은 경험상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약 올리려는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남자의 얼굴만은 평화롭게 짝이 없다. 역시나 표정의 변화가 크게 없다. 이제는 없으면 오히려 어색할 것 같은 그만의 나른함이 잔뜩 묻어난 눈매가 오롯이 겨울을 향한다. 산속이라 그리 밝지 않은 아침이었는데도 그 눈빛이 햇볕인 양 강렬해 절로 시선을 회피했다. 실수였다. 잘못된 선택에 겨울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뒤로 빼는데, 남자가 또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어느새 보폭을 좁힌 그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도달해 있다.
"왜 그쪽으로 가면 안 되냐고 묻잖아."
"……."
"나 이미 왔는데."
"……."
"어쩔래."
대놓고 피하는 티를 내며 돌아가 있는 고개가 남자의 손길을 따라 다시금 원래 위치를 되찾았다. 가깝다. 너무 가깝다. 긴장하는 건 제 성격이 아닌데 너무 티 나게 굳어있다. 왜 자꾸만 겨울 저조차도 어색한 제 모습을 이 남자 앞에서 보이게 될까. 그것도 만난 지 단 3, 4일밖에 되지 않은, 이런 모습 같은 건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 앞에서.
쇄골 아래를 넘나드는 겨울의 머리칼을 한 움큼 붙잡은 그의 행동에 순간 흠칫했다. 태연한 척하려 해도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다. 개 같은 M의 관계를 욕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굳은 몸이 더 뻣뻣해졌다. 발끝마저도 힘이 들어가 안으로 말렸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남자가 겨울을 해하지는 않았다. 남자의 손짓은 오히려 부드러움에 더 가까웠다. 검지에 머리칼을 돌돌 말던 그가 다른 손을 들어 겨울의 어깨 위에 얹는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했지만, 고개를 조금만 든다면 그와 얼굴이 맞닿을 지도 몰랐다. 그가 내뱉는 숨결이 겨울의 볼 위에서부터 점점 내려가더니 꼬아 넘긴 머릿결 사이에서 멈췄다.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다. 아니, 차라리 그게 백배 천배는 더 나았지. 귓가에 속삭이듯 작게 말을 내뱉던 남자의 말에 겨울이 얼굴이 터져나갈 뻔했다.
"벌 줄 거야? 무웅이한테 하는 것처럼?"
"……."
"선데이가 좀 모자라게 굴어도 별명 하나는 잘 짓거든. 개새끼 맞더라? 아래에서 낑낑대다 못해 울기 직전까지 가던데."
"적당히 하지 그래?"
"네가 그런 취향일 줄은 몰랐어."
"……."
"참고할게."
"미쳤네."
"참고만 할게. 나도 깔리는 쪽은 아니라서."
"근데."
"누가 'M' 아니랄까 봐. 성향도 비슷하다, 우리."
궁금하지 않아? 너랑 나랑 붙으면 누가 아래로 갈지. 남자는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아주 가까이 고개를 붙인다. 굳이 집중하려 들지 않아도 서로의 숨소리가 숨김없이 좁은 틈 사이를 오갔다. 워낙 차갑기만 한 에이블이라 숨결마저도 인조적인 로봇처럼 차가울 줄 알았던 겨울의 헛된 망상을 단숨에 깨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그가 내뱉는 숨은 뜨거웠다. 심지어는 어젯밤 제게 입맞춤을 퍼붓던 무웅이보다도 더욱 달아오른 숨이었다. 타이밍을 놓쳐 차마 목 뒤로 넘기지 못한 침이 입안에서 달뜬 숨과 뒤섞여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남자의 입술과 맞닿을 것이다. 싫다는 느낌보다 그의 말대로 궁금함이 더 컸다. 재보듯이 가까워지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입술은 뱉어내는 숨처럼 뜨거울까.
입술을 달짝이던 남자가 입 맞추기 편하게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를 따라 자연스레 앞으로 뻗는 턱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차 싶었어도 늦었다. 겨울의 호기심은 다소 선정적인 구석을 짙게 뛰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감정보다도 더욱 앞섰고, 그렇기에 이성은 언제나 그것의 발끝에서 아등바등하는 헛발질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싫던 남자를 이리도 갈망하는 제 모습이 한심하다기보다는, 본능이다 싶었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M의 관계'가 생각날 듯 말 듯 했다. 생각나지 않으면 겨울 혼자서라도 정립하고 싶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욕구가 샘솟아 올랐다.
그러나 터져 나와 홍수를 이루려던 욕구를 커다란 마개로 틀어막은 건 고개를 뒤로 뺀 남자였다. 어느새 남자의 나른한 눈매를 따라 반쯤 풀려버린 겨울의 눈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릿한 미소를 짓는 남자를 담고 있었다.
"야한 여자네, 겨울이."
처음으로 남자가 제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야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앞에 붙인 채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뒤에서 아등바등 헛발질하던 이성이 이제야 호기심의 머리채를 붙잡고 제 뒤로 날렸다.
"밥 먹어, 이것들아."
선데이의 말에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 밥 먹어. 여전히 조금은 야릇한 시간에 머물러있는 겨울과 달리 평온함을 되찾은 남자가 짧게 말을 내뱉고선 먼저 발을 뗐다. 배가 고프진 않다. 아랫배쪽이 무거울 뿐. 참 이상하게도 이런 때에,
문득 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
"이연호…."
남자의 이름. 영하랑 비슷하다. 아, 이제 영하 생각은 그만해야지. 겨울은 한동안 침대에 누워 그의 이름만 되새겼다. 이렇게 작게 중얼거려도 1층에 있는 남자의 귀엔 들리겠지. 들으라지. 시끄럽다고 뭐라 해도 좋으니 차라리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정녕 미친 건가?
종일 들뜬 기분이다. 마치 겨울 자신만 혼자 제2의 인생을 다시 사는 느낌. 심지어는 영하에 대한 화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니, 이건 아예 영하가 겨울의 삶에서 그다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남자와 몸이 조금 맞닿은 이후부터 더 그랬다. 그동안 말레타로서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억울함이나 슬픈 감정 따위는 저조차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에 뚝 떨어뜨려 놓고 온 가벼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는 심지어 제 존재 자체에 의심이 든다. 내가 한겨울이 맞나? 난 누구지? 그 엄청나다는 DNIPM을 치려는 분노는 어디로 다 사그라든 거지? 생각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다. 나사가 빠져도 여러 개가 한꺼번에 빠져 머릿속에 있는 톱니바퀴들이 아예 와장창 무너져버렸다. 남자도 이런 기분인가? 나만 이런 거야? 어떻게 순식간에 이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가 있지? 겨울은 새삼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던 자신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M의 관계.'
희미한 기억의 연장선을 거슬러 올라 최대한 끄집어낼 수 있는 지식을 다 떠올려봤다.
생각나지 않는다.
형편없는 선생이 가르치는 쓰레기 같은 수업이라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기억밖에 없다. 겨울은 버릇처럼 자신을 헐뜯는다. 미련하고 아둔해 빠진 말레타. 죽기 전엔 한 번쯤은 만나겠지 하는 가능성마저도 배제해버린 멍청한 년. 이럴 때 영하가 있으면 다 알려줄 텐데 생각하다가도 그런 생각하는 제 자신이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는다.
"M은 어떤 관계지?"
겨울은 허공에 대고 묻는다. 무웅이는 알까? 펜들럼과 에이블의 관계는 또 다른 건가? M은 다 똑같지 않을까? 애초에 펜들럼과 말레타의 차이가 파장유지밖에 없는 거 아닌가? 그럼 뭐 무웅이도 똑같겠네.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처절함 가득한 성적표가 떠올라 더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로 했다. 더 골똘히 M에 대해 강구해봤자 더한 오답만 만들어내겠지.
"한겨울은 멍청이."
"자아표출도 정성껏 하네, 겨울이."
겨울은 놀란 눈을 한 채로 누운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다시 눕기도 애매해서 그냥 원래 일어나려던 사람처럼 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게 더 애매하다. 문틀에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기댄 남자가 겨울의 어정쩡한 자세를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그런….
"왜 왔어."
"불렀잖아."
겨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녕 제가 미친 게 틀림없다. 남자의 생김새, 목소리,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야하다'라는 이름의 프레임을 덮어씌운 것 같다. 뜬금없긴 하더라도 차라리 아무 욕이나 내뱉어버릴까? 남자가 다시금 살 떨리는 협박을 한다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아니, 그런 행동에도 흥분해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흥분하나? 미쳤네. 한겨울 진짜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
"나는 속을 읽는 능력 같은 건 없는데."
"……"
"어쩜 네 생각은 다 들리는 것 같을까."
"……."
"날 보기만 해도 몸이 달아올라?"
"미친."
망했다. 망했어, 한겨울.
"너무 정곡을 찔렀어?"
"…돌았어?"
좀 갔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가까워지는 남자 때문에 벌써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긴장한 티가 역력해 보일까 봐 깨물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꾹 다물고 있는데 남자가 또 한 걸음씩 다가온다. 또 꺼지라고 말하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 못 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쓸데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늦었다. 거침없이 다가온 그가 어젯밤 무웅이가 비추던 빛보다도 더욱 환한 빛으로 다가와 겨울의 앞에 멈춘다. 눈을 치켜뜨기엔 조금 무리가 갈 만큼 현저한 키 차이를 보이는 그와 제 사이에서 남자가 과감히 그 차이를 좁혔다.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그가 유리관 안에 있는 동물 관찰하듯 겨울을 빤히 바라본다. 겨울은 지기 싫어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남자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렇지. 이게 나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
"내 어디가 널 그렇게 흥분하게 만들어?"
"미치셨네, 드디어."
"너도 선데이과네. 욕이 다양하질 못해."
제 무릎을 감싸고 있던 남자가 한쪽 손을 뻗더니 침대 위에 있는 겨울의 손 위로 향했다. 불순한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느릿한 손짓이 대놓고 손등을 유린한다. 예민한 감각이 극에 치달았다. 남자가 지나는 자리마다 싸한 작열감이 뒤따랐다. 마치 차가운 불을 지펴놓은 기분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글씨를 쓰는 것도 아닌 그의 움직임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길이 순간 그의 얼굴로 향했다. 아래를 보는 그의 속눈썹에 떨림이 없어 곧게 뻗어있는 모양새가 눈에 더욱 잘 들어왔다. 아래로 내려와 눈썹을 아슬아슬하게 가렸지만, 무웅이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흑색 머리칼이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자연스러운 깔끔함을 만들어냈다. 에이블이라 그런가 숱도 그렇고 가까이에서 보니 머릿결마저도 좋아 보인다.
"봐. 노골적으로 보잖아."
겨울의 시선을 알아차린 남자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쌍꺼풀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아주 얇은 속쌍꺼풀이 있다. 콧대 때문에 한층 더 깊어 보이는 눈매가 조금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싫지만, 사실이니까.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올라오던 그의 손이 곧 겨울의 중지를 감쌌다.
"이걸 꺾으면 뼈마디가 부러지겠지?"
"병원도 못 가서 평생 손가락 불구가 될 걸."
"말레타인 걸 들키는 게 무서워서 안 가, 아니면 영하에게 걸릴까 봐 무서워서 안 가?"
"어차피 죽을 몸인데, 손가락 하나 잘못되는 거로 유난 떨고 싶지 않아서 안 가."
"이렇게 맞닿은 이상 계속 '1'에 머무를 거잖아."
"언제 제멋대로 움직일지 모를 거잖아."
"네가 말레타라서?"
"어. 파장 하나 조절 못 하는 빌어먹을 말레타라서."
"지금은 조절 잘하고 있잖아."
"고작 하루 지났어. 판단하기엔,"
"하루면 충분해."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너 같은 애는 하루로도 충분해? 말레타는 더 두고 볼 가치가 없다? 어떤 뜻이 되었든 기분 좋은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이런 생각밖에 못 하는 애인 것 같기도 하고. 겨울은 연거푸 찾아오는 한심한 생각에 표정을 구긴다.
"또 인상 찌푸린다."
"신경 꺼."
"끌 줄 몰라."
겨울의 손등 위에서 장난치던 남자의 손이 자연스레 목 근처로 옮겨온다. 온몸의 신경이 목 부근으로 밀집한 느낌이다. 예민하다 못해 뻐근하기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거리를 좁혀 손가락 한 마디도 채 안 되는 틈만 두고 있는 남자 때문에 숨까지 아주 약하게 내뱉고 있어 죽을 맛이었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는 한데, 겨울은 이제 자신이 노려보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뜬 눈에 힘을 줄 수가 없다.
아예 입이라도 맞출 작정인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는 남자의 모습에서 아침의 대치상황이 생각났다. 간 보다가 저를 놀려먹으려 들겠지.
"왜 안 피해?"
의외라는 듯 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솟았다. 능글맞다. 그래. 딱 그 단어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살만큼 오래 산 놈이 자기보다 시퍼렇게 어린 여자를 이렇게 제 손에 두고 쥐락펴락하는 꼬락서니가 얄밉고 재수 없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주긴 싫다. 예상하기 쉬운 뻔한 년으로 낙인 찍히는 건 추호도 싫다.
"입 벌려, 연호야."
그래서 자신이 먼저 다가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