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미아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분명 주인이 집에 올 시간이 지났는데 시간은 한참을 지나고 있었고, 창 밖으로 귀를 기울여 봐도 낯선 이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주인이 곧장 집으로 안오고 딴 길로 샌건가? 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드러운 새하얀 털을 몇번 핥고는 몸을 길게 쭈욱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미아에게서 알수없는 어둠의 오오라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미아는 기분이 좋아 졌는지 먀아아-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미아는 다시금 결심 하였다. 무슨 결심을 하였느냐고?
이 시간을 꿀같은 가출의 시간으로 삼겠노라고.
미아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나머지 스터디를 하고 집에 돌아온 화이는 절규했다. 분명 있어야 할 흰색 털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간거야아아아-!!!"
화이는 다급하게 온 집안과 구석을 뒤졌다.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아.. 미아 너...흐윽.. 어쩌려고 그래..."
화이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채로 중얼거렸다. 무릎 꿇은 채 좌절하며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던 화이는 뺨을 몇번 두들기며 정신을 차렸다. 멀리 안가고 근처에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다. 화이는 곧장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저기! 아저씨, 혹시 미아 보셨어요!? 또 얘가 집 밖으로..!!"
"아, 또 미아가 가출 했니? 글쎄다.. 잘 모르겠는데."
화이는 집 근처 상인들에게 미아의 행방을 물으며 찾아다녔다. 하지만 상인들은 모두 미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한참 미아를 찾던 화이는 지쳐버렸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췄다.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라고 화이는 생각했다. 미아는 가출하더라도 꼭 돌아오기는 한다. 하지만 이 동네엔 고양이를 싫어하는 주민들이 많고, 혹시나 미아를 동네에서 쫒아내려 하지 않을까. 길고양이들과 싸우고 돌아오진 않을까. 화이의 머릿속은 다시금 걱정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냐아~"
"아..? 미아!?"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온 미아의 울음소리에 화이는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울음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이쪽인가..?"
화이는 미아가 있을 것으로 추청되는 어느 가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이름은 앤틱 갤러리. 이름처럼 앤틱한 인테리어에 가게는 조금 오래된 듯한 느낌이었지만 관리를 잘 해놓은 모양인지 깔끔하면서도 고풍스러움이 묻어나기도 하였다. 화이는 조금 주저하다 살짝 열려 있는 한쪽 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쪽은 밖에서의 느낌과 비슷하였으나 넓지 않은 공간에 용도를 알기 힘든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이 진열 되어있었다. 가게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화이는 가게를 살펴보며 미아를 찾아보았다.
"여기 없는 것 같아."
가게 안쪽을 아무리 살펴봐도 미아가 보이지 않자 화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하지만 누군가 뒤에 있었는지 화이는 누군가와 부딪쳐 뒤로 자빠졌다. 아니, 자빠질 뻔했다. 누군가가 뒤로 넘어지려 하는 화이의 몸을 잽싸게 끌어당겼다.
"어랏-!! 괜찮니?"
놀란 마음에 눈을 꾹 감고 있던 화이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낯선 사람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이는 무척 놀란 모양인지 얼음이 되버렸다. 화이가 놀라서 굳어버린 것을 느낀 것인지 그는 화이를 놓아주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 미안한데, 혹시 이 고양이를 찾고 있는거야?"
그는 자신의 머리를 모자처럼 감싸안고 있는 흰 고양이를 가리켰다. 화이는 정신이 돌아온건지 허둥지둥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사과 했다.
"아앗..!! 죄송합니다! 우리 미아가 왜 다른사람 머리에 올라가 있는건지.. 미아, 어서 내려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먀아아아-!"
미아는 싫다는 듯 화이의 말에도 불구하고 반항스런 표정으로 남자의 머리에 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화이의 표정이 일그러 지는 것을 보자 손사례를 치며 말했다.
"하하 괜찮아~ 나 고양이 좋아하니까 신경 안써도 돼. 근데 이 아이 이름이 미아야?"
"아, 아니 그럴 순 없어요. 아무리 고양이라지만 머리에 올라가는건…!!"
그는 어깨 아래로 흘러 내려온 미아의 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한번 말했다.
"괜찮아. 이 아이, 이름이 미아야?"
"..네, 미아라고 부르는데 하도 집을 나가서 맨날 얘 찾으러 다니느라 발이 아프네요."
"오 그래? 발 아프면 앉아서 차 한잔 하고가."
"네에? 아뇨 그런 뜻이.."
"자,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줄래? 차 타다 줄게. 미아, 잠깐만 밑으로 내려가줘."
남자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화이에게 전시되어 있던 소파에 앉으라 한 뒤, 미아에게는 바닥으로 내려가라 말했다. 그러자 미아는 금새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의 말에 따라 바닥으로 휙 내려와 소파 옆에 앉았다. 아니, 내말은 죽어도 안듣는 미아가 다른 사람 말을 저렇게 고분고분 듣다니. 경악하던 화이는 망설이는 듯 하다가 그가 앉으라 했던 소파에 살며시 앉았다.
미아는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인지 마냥 옆에서 고롱고롱 졸고 있었다. 화이는 흰 털뭉치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집 나가고..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저 사람 말은 잘 듣고..'
화를 꾹 눌러 참던 화이는 가게 안 전시품들을 둘러보았다.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 석고상,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는 상자, 인디언 모자. 둘러보던 와중에 멀리서 소파 옆에 있어야 할 미아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냐앙!"
미아는 낡은 책들이 꽂힌 책장 앞에서 울고있었다. 화이는 미아가 또 도망칠세라 후다닥 미아에게 다가왔다. 미아를 안고 되돌아 가기 위해 미아에게 손을 뻗던 순간, 미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화이의 손을 피해 여유롭게 소파 위로 올라가 몸을 늘어뜨렸다. 화이는 책장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미아를 바라보았다.
'저 털뭉치가아아-!!'
화이는 속으로 화를 삭이며 손을 거뒀다. 그 순간 책장에 꽂혀있던 책 한권이 화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책은 분명 화이의 머리로 떨어졌으나 화이는 아무 고통을 느끼지 못했는지 책이 떨어진 부분을 보고 그저 책에 맞은 부위를 쓱쓱 문지르며 바닥에 떨어진 이상하게 생긴 두꺼운 책을 바라보았다. 저런 엄청난 두께의 책이 머리로 떨어졌는데 왜 아프지 않은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으나, 떨어진 책에서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책을 주웠다. 하지만 책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으며, 책을 펼쳐 보았으나 아무 내용도 써져 있지 않은 무지였다. 화이는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다시 책장에 꽂아 놔야겠지?
그 때, 갑자기 책이 홱 펼쳐지며 백지에 화이가 알아 볼 수 있는 글자가 자동으로 씌여졌다.
[당신이 나의 주인인가?]
한국어가 써졌어-!? 화이는 두려움과 당혹감에 어쩔줄 몰라했다. 그 사이에 자동으로 써졌던 글씨가 사라졌다. 갑자기 책에서 빛이 감돌기 시작하며 엄청난 속도로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분명 화이가 책을 펼쳐 보았을 때는 하나도 없던 글자들이 누군가 쓰고 있기라도 한듯 빼곡히 채워지고 있었으며 글자의 모양을 보았을 때 처음 보는 언어였다. 화이는 놀라서 책을 놓으려 했으나 무언가 책에 손을 붙잡아 놓기라도 한 듯 책을 놓을 수 없었다.
"..!! 왜 안떨어지지?"
그 순간 책에 씌여지던 글자들이 멈췄다. 글자들은 잿가루처럼 변하며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화이는 백지로 돌아온 책의 표지에 '화이의 서' 라는 제목이 씌여져 있는 것을 발견 했다.
"화이의 서? 이건 정말... 뭘까?"
넋을 놓은 화이는 멍한 표정으로 화이의 서를 들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화이가 소파에 앉자마자 찻 잔과 주전자를 들고온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귀, 귀신이라뇨!! 아녜요. 저, 근데 이거.."
"...아?"
화이는 소파 옆에 놓아두었던 화이의 서를 가리켰다. 남자는 놀란 것인지 동그란 눈으로 화이와 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화이의 서..?"
화이는 남자의 눈을 피하며 우물쭈물 말했다.
"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책이 책장에서 떨어졌길래 주워서 다시 꽂으려 했는데 갑자기 책이 막 빛나고 글자가 써지더니 책 앞에.. 화이의 서라고 써졌어요..."
"네 이름이 화이니?"
"네에.."
"풉..! 푸하핫!!"
남자는 언제 놀랐냐는 듯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화이는 무척 당황했는지 벙찐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크큽.. 하하, 아아 진정하자 진정."
"..?"
"일단 많이 당황했을거야 응. 내가 천천히 설명해 줄게. 일단, 그 책의 주인은 너야."
어디가 천천한 설명인가요..? 라는 말이 화이의 목구멍까지 올라 왔으나 삼키며 화이는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 책장에 꽂혀있었던 건데.. 갑자기 제 이름.. 아."
화이는 급격히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남자는 화이를 바라보며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응 그렇지. 낙서라던지 이름이라던지 그림이라던지 써있으면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없는거지 이젠."
그런 이야기 그런 상냥한 말투로 하지 말아줄래요? 라고 화이는 말하고 싶었으나 다시 말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학생이라 살 돈이 없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시켜주시면 할게요!! 봐주세요.."
남자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표정을 지우고 귀엽다는 듯 화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아니야. 사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너한테 이 책을 그냥 줄거야."
화이는 살았다!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깟 책이 뭐라고 나한테 누명을 씌우고 굽신굽신 하게 하는지에 대해 화이는 온갖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설명해준다니깐. 걱정마, 이 책이 좀 독특한 책이라 별짓을 다하거든. 알고있어야 할 것들을 알려 줄테니. 우선 무서워 하지 말고 차나 마셔."
"앗, 네.."
화이는 찻잔을 들고 남자가 따라주는 차를 한모금 마셨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와 차의 향긋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입안에 감돌며 목으로 넘어갔다.
"쟈스민 차야. 따뜻하지? 참, 그러고보니 화이는 내 이름을 모르겠구나."
화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정신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라는 생각이 화이의 머리를 스쳤다. 조금 더 뜯어보니, 상당한 미남이었다. 살짝 구부러지는 갈색 머리칼에 영롱한 보랏빛을 띄는 눈동자. 이국적인 이목구비에 혼혈 같으면서도 이지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싱긋 미소지었다.
"내 이름은 에리얼이라고 해."
에리얼의 눈빛이 순간 번뜩거린 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