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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어제 죽었다
작가 : 미루하
작품등록일 : 2017.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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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03
작성일 : 17-07-20     조회 : 301     추천 : 1     분량 : 6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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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당신.”

 

 복도 끝에 서 있던 여자는 위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암사자라고 불렀겠다?”

 “숫사자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남자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냐, 그게 아냐.”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휘휘 젓는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램프에 비쳐 금색처럼 반짝였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선명한 이목구비가 또렷이 보였다. 얼굴만 보면 이름을 날리는 여 용병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처럼 보였다.

 

 “어째서 빵집 주인이 내 이름을 알고있지?”

 “에?”

 “처음부터 이상했어. 내 호칭을 정확히 불렀거든.”

 “….”

 

 징을 넣어 박은 가죽부츠 굽이 바닥을 굴렀다. 이본느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붉은 얼음 같은 시선이 마르코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나는 중앙대륙의 용병이 아냐. 오폴레 사람들은 모르지.”

 

 팔꿈치와 소맷부리가 닳은 낡은 상의에, 무릎이 해져 새로 천을 덧댄 바지에 짚을 엮어 짠 신발을 신었다. 맨발로 다녀버릇해서 굳어버린 발바닥부터, 손에 잡힌 굳은살까지 전부 한 가지를 말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인이라고. 하지만 여자는 손을 뻗어 마르코의 손을 덥석 잡았다.

 

 굳은살의 위치가 익숙했다.

 

 “여기서, 난 유명하지 않아.”

 

 중앙 대륙에는 여자 용병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반면 서대륙에서는 실력있는 여자 용병이 드물지 않다. 이본느는 사실 중앙 대륙에서는 실력보다 외모로 유명했다. 용병인 카민이 그녀를 알아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용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문은 빠르다.

 

 “침대에 고용하고 싶어하는 중앙대륙의 귀족새끼를 걷어차 주고 도망쳐서, 중앙대륙에서의 귀족놈들에게만 유명해졌지.”

 

 여자가 웃었다. 남자의 목에 들이댄 검날이 서늘하게 턱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리고 이 손. 이 손은 검을 잡는 손이야.”

 

 비쩍 말라 보잘것없던 남자가 허리를 폈다. 움츠리던 자세를 바꾼 것만으로도 조금 더 키가 커 보였다.

 

 “…정보 길드의 요한슨입니다.”

 “네가 죽였어?”

 “아닙니다.”

 

 남자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검날을 좀 더 턱밑에 갖다댔다. 서늘한 감촉이 목에 닿는데도 칼날이 베지 않았다. 남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거짓말?”

 “아닙니다.”

 

 남자는 형형한 눈빛을 들어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가 빙글빙글 웃었다. 이제는 눈까지 웃고 있었다.

 

 “여기 왜 있어?”

 “개인 사정입니다.”

 “그 사정 말하지 않으면 네 정체를 영주에게 불어 버리겠어.”

 “….”

 

 남자가 두 손을 들었다. 허리를 편 남자는 여자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붉은 머리를 내려다보며 요한슨이 말했다.

 

 “비밀로 해주십시오.”

 “알겠어.”

 

 여자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보였다. 정보 길드의 신호다. 여자는 자신의 정보를 정보 길드에 팔았고 신호를 얻었다. 그녀는 중앙대륙에서 찾고 있는 것이 있어 지속적으로 정보 길드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요한슨은 여자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정정했다.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있는줄 알았는데 조금쯤은 생각을 하는 것 같군.

 

 “저는 흐라드차 영주의 사생아입니다.”

 “…역시 네가 죽인거지?”

 “아닙니다!”

 

 요한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그가 억울한 얼굴을 했다.

 

 “오빠를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알았대?”

 “아버지의 비망록을 몰래 살펴 봤던 모양입니다.”

 “영주는 네가 있는 걸 알아?”

 “일 년에 한 번 만납니다.”

 

 6공의 가문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계산하에 결합한다. 사생아의 존재는 반길만한 것이 아니다. 영주가 숨길만도 하다. 중앙대륙에 온지 꽤 됐지만 이 동네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녀는 혀를 찼다.

 

 “네가 여기에 있는 걸 알아서….”

 “실비아는 외동딸이었습니다.”

 

 요한슨이 말을 이었다.

 

 “저는 흐라드차리를 이어받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문제가 없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요한슨과 실비아가 놀랐다. 실비아는 허리띠에 차고 있던 다른 단검을 꺼내들었고 요한슨은 허리를 굽히며 신발 바닥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용수철처럼 튕겨 경계하는 두 사람에게 손짓한 것은 작은 그림자였다.

 

 “나야, 놀라지마.”

 “유진!”

 “유진 아가씨….”

 “아 그놈의 아가씨 소리좀 떼어 버리라고.”

 

 익숙하게 투덜거리며 유진이 말했다.

 

 “복도에서 다 들리게 이야기한 너희 잘못이다.”

 

 비밀이야기를 들어서 미안하다는 뜻이군. 유진이 툴툴거리는 데에도 익숙해진 이본느가 피식 웃었다.

 

 본의아니게 자신의 신분을 두 사람에게 털어놓게 된 요한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히 주변을 경계했는데 저 아가씨의 솜씨가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건가?

 

 “카민이 그냥 달아나는걸 거부해.”

 “하?”

 “우리 겁 많은 공주마마는 마르코가 혼자 남아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게 싫다더군.”

 

 누가, 공주…?

 질문을 할 새도 없이 유진이 요한슨의 멱살을 잡았다. 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무릎을 꿇은 요한슨이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본느가 손을 뻗으려 하자 유진이 한 마디로 제지했다.

 

 “숨기고 있는 것이 있나?”

 “없습니다.”

 “네가 죽인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아니군.”

 

 검은 빛자락이 너울거리며 요한슨을 감쌌다. 보이지 않는 검은 실이 빛을 내면서 조각조각나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지나간 마법에 멍청하니 서 있던 이본느가 감탄했다.

 

 “그거 진실의 실?”

 “….”

 “무지 편하네….”

 

 참인지 거짓인지 가릴 필요가 없네…. 이본느가 말똥말똥한 붉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자 유진이 물었다.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

 “네가 한 거 아닌거 안다.”

 

 오, 믿어주는 거야? 그런 거야? 붉은 눈이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초롱초롱 빛났다. 여인이 한 발짝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간격을 좁혔다. 금발 머리 소녀를 번쩍 안아올리더니 뺨을 부볐다.

 

 “그만둬!”

 “언니를 믿어주다니 언니는 너무 기뻐~.”

 

 믿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알고 있는 것 뿐이다. 술시중을 들게 하려는 귀족의 얼굴을 걷어차 주고 제대로 뒷수습도 하지 않고 무작정 도망을 다니고 있는 단순한 성격의 여검사다.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려 한다면 이런 종류의 밀실 살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홧김에 칼로 내리찍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죽어버렸네, 한다면 모를까. 유진은 자신의 추리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유진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요한슨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차이가 높다. 붉은 머리의 여검사가 천천히 소녀를 내려놓았다.

 

 “넌 충격마법을 못 쓰잖아.”

 

 소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 여관 안에는 흐라드차의 딸년을 죽인 인간이 없다.”

 “어?”

 “마르코가 마지막 대상자였다. 하나씩 살폈어.”

 

 니놈이 범인인줄 알았는데 아니니까 귀찮아졌잖아. 유진이 발을 들어올려 요한슨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말라 보이던 남자는 힘으로 버티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번개의 정령은 못 부르지? 전뇌계열 마법도 못 쓰고.”

 “윽.”

 

 느닷없이 걷어차인 남자가 간절하게 호소했다.

 

 “실비아가 죽어서 제가 더 곤란합니다!”

 “그건 내 알바 아니고.”

 

 소녀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각자 알아서 혼자 몸을 뺄 수 있는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빵집 주인만 혼자 남아서 죽으면 너무 안타깝다고.”

 “….”

 

 이본느는 말을 잃었다. 그 마음씀에 감동해야할지 여유에 감탄해야할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짧다고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목숨값은 자신이 지불해야한다고 생각해왔으며 스스로를 훌륭하게 지켜왔다. 용병으로 나서기 전 열다섯, 평범하게 검을 수련하는(…) 마을 처녀였을 때에도 쓸데없이 낯선 사람에게 손을 뻗었던 적은 없다.

 

 그러한 너그러운 마음가짐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것이다. 고귀하게 자라 아랫사람에게 너그러운 수준이 아니다.다른 이를 대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내리깔아보며 ‘구원해 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그 마음은 너그러운 지배자나 갖고있을 법하다. 왕가의 자제라면 배울까.

 

  요한슨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호위가… 유진님이 호위였군요.”

 “정말 공주마마네….”

 

 처음부터 있었던 묘한 신경전을 이제서야 납득했다. 이본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 호위와 의뢰인을 착각했다. 용병의 수신호를 교환할 때 사내가 보이던 허술함을, 소녀가 어이없어 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왜 왕자가 아니라 공주야? 정말 왕자야? 어디 왕잔데?”

 “멍청하긴. 대답할 거 같나?”

 “….”

 

 왕자라고 하니 궁금한 게 많다. 왕자에 대한 묘한 동경심을 갖고 있던 이본느는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자 부루퉁하게 입을 다물었다.

 

 “정보 길드와는 연락이 되나? 정령통신이 완전히 불통됐어.”

 “연락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 우리도 전부 여기서 말라 죽는거 아냐? 이본느는 팔목에 차고있던 고리를 더듬었다. 세 개의 고리를 가볍게 부딪히자 짤그랑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본느가 입을 벌렸다.

 

 “진짜 다 막았네?”

 “허?”

 “이거, 용병 길드에 긴급하게 구조 요청할 수 있는 건데.”

 

 지겐 산맥에서도 쓸 수 있는 건데.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본느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용병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수와 마물, 이종족과 고대 던젼을 탐험하는 쪽이다. 인간의 도시 속 편안한 여관에서 잠자리를 찾기보다 도심지에서 멀어진 숲속을 헤매는 경우가 더 많다. 서대륙의 지겐 산맥은 사계절 내내 녹지 않는 흰 눈이 뒤덮은 얼음의 나라다. 거기서도 쓸 수 있다는 건 대륙 어디서나 쓸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존하는 것중 최고 성능의 위치 발신기인 것이다.

 

 이본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했네….”

 

 그녀도 내심 믿는 것이 있어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남자가 흥미를 보였다.

 

 “그 은팔찌는?”

 “긴급구조용. 신호가 하나밖에 없는 거라서 좀 저렴한 편이야.”

 

 좀 살펴 봐도 되겠습니까, 하고 요한슨이 손을 내밀었다.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 아래에는 밀가루 때가 하나도 끼어 있지 않았다. 겁에 질린 빵굽는이의 탈을 벗은 그는 침착하고 온화했다. 과장되게 일그러뜨리지 않은 눈썹은 두텁고 진했고 눈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본느는 손목째 팔찌를 내밀었다.

 

 검사가 손목을 내민다는 것은 완벽한 신뢰를 뜻한다. 그 호감 표현에 요한슨이 호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리를 하나하나 살폈다. 아무것도 도금하지 않은 광택없는 은고리다. 끊지 않고서는 벗겨낼 수 없는 구조로 세 개가 하나처럼 얽혀 있었다.

 

 “고장난 건 아닌데….”

 “어.”

 

 잠시 생각하던 이본느가 손뼉을 딱 쳤다. 네 것도 보여줘. 그 말에 요한슨이 짧게 곤란한 표정을 했다. 정보 길드의 끄나풀이 숨기고 다니는 건 못 보여준다 이거야? 내건 보여줬잖아? 이것도 나름 용병길드의 보물이다, 어? 매섭게 치켜뜬 붉은 눈이 을러댔지만 무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귀여운 편이다.

 

 청년기에 접어든 서대륙인은 좀처럼 늙지 않는다.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급격하게 늙어 버린다. 나이가 들면서 금방 눈썹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줄어들며 피부가 주름지는 중앙대륙인과 다르다. 언뜻 보면 나이들어 보이기도 하는 이본느는 서대륙의 작은 도시 출신이다. 요한슨이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랬다. 그녀는 요한슨보다 열 살은 더 어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귓볼을 엄지와 검지로 쿡 집었다. 적절한 압력이 중요하다.

 

 “뭐 여기서 같이 죽을지도 모르는 마당이니…알겠습니다.”

 “오! 오!”

 

 이본느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던 귓볼안에서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은색 원반이 딸려 나왔다. 체내에 심어놓은 신호기다. 이것 말고도 네 개는 더 있지만, 굳이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다. 요한슨은 은반을 한 번 튕겨 보였다.

 

 하늘색 스파크가 찌릿, 하고 튀어나왔다가 바로 쪼그라들었다.

 

 “고장났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래도 혹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투덜거리는 이본느에게 유진이 정색했다.

 

 “소용 없어.”

 “뭐?”

 “대영주의 후계자를 살해했다는 명목으로 우리 모두가 공모했다고 내걸면 끝이지.”

 “으.”

 “왕자님의 신분을 밝히면 안 될까요?”

 

 이본느가 두 손을 비비며 귀엽게 웃어 보였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요한슨이 입을 딱 벌렸다. 유진은 동요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국이라고 하자. 에이 국 왕자가 여행자로 위장하고 숨어들어 흐라드차리의 후계자를 없앴다. 어때?”

 

 이본느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나겠다.”아쉬운 듯 그녀가 덧붙였다.

 “안 되겠네.”

 “그건 원래 안 되는 겁니다, 용병 아가씨.”

 “살 수 있는 길이 아니야. 그냥 수천 명의 다른 사람을 늪에 끌고 들어갈 뿐이지.”

 ‘뭐 나 혼자라면 탈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저 멍청한 공주님을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하는지가 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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