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할 수 없는.
“최 스타. 우리 딱 한 번만 하자. 응?”
이 실장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말투가 꼭 처음 잠자리를 가지자고 비는 스무 살짜리 남자애 같았다.
“나더러 지금 여기서 벗으라고?”
우연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누구든 그녀를 만나면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흘겼다.
청순한 얼굴에 풍만한 가슴, 완벽한 허리라인에서 이어지는 끝내주는 골반라인과 쭉 뻗은 다리는 모두의 시선을 빼앗고도 남았다.
신이 내린 완벽한 몸매. 지상 최대의 핫바디.
그녀가 몸에 두른 것은 여자들의 질투를 샀다. 질투는 완판으로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우연의 ‘값’은 무서운지 모르고 뛰어 올랐다.
“누가 다 벗으래? 그냥 비키니 한 번 입는 거야.”
“싫어.”
우연의 촬영 거절에 현장은 올 스톱 된 상황이었다. 적의에 찬 눈으로 촬영 현장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은 라떼를 마시고 있는 공민에게 닿아 있었다.
이 상황에도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모양이지? 우연은 공민을 노려보다 주먹에 힘을 주었다.
개자식.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만 처먹는 지독한 새끼!
“최 스타. 이거 안하면 우리 손해가 얼만지 알아? 그냥 한 번 해.”
“어떻게 그냥 해? 주변 상가며, 길이며, 보는 사람 눈이 얼만데.”
“여기가 바다다, 생각하고 하면 되잖아. 어차피 해수욕장이나 명동이나 사람 바글바글한 건 다 똑같구만 뭘 그래.”
이 실장은 최우연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 CF 한 건에 돈이 얼마인데. 고작 수영복 한 번 입는 게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처음 벗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지, 원.
“그게 어떻게 똑같아? 개나 소나 다 벗는 해수욕장이랑 명동 한복판에서 벗는 거랑 그게 어떻게 같냐고.”
“아, 길에서 찍어야 느낌이 산다잖아. 이 찌는 듯한 더위에도 탄산수 한 병이면 해운대에 온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든다. 콘티 죽이던데 일단 한 번 찍어보지?”
“끊어.”
“아니 최 스타. 잠깐만. 최 스타?”
우연은 곁에 서 있던 매니저 일용에게 휴대폰을 던지듯 넘겨주었다. 일용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우연 매니저 6년 차인 일용은 다른 매니저들과는 달랐다.
3개월을 멀다하고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하듯 도망가는 다른 매니저들과 달리, 일용은 태생부터 완벽한 맷집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우연이 아무리 쥐 잡듯 일용을 잡아도, 침방울을 튀어가며 욕을 내뱉어도, 한 시간에 서 너 번 씩 바뀌는 우연의 취향에도 일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나. 이거 원래 이런 컨셉이에요. 여태까지 이 광고 모델들 다 그렇게 찍었어요. 누나가 굳이 이거, 콕 집어서 ‘송조이’가 찍고 있는 이거 하고 싶다고 해서 실장님이 어렵게 따온 건데 갑자기 이렇게 촬영을 안 하겠다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일용이 ‘송조이’ 이름을 꺼내자 우연도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번 광고는 일용의 말처럼 우연이 온갖 생떼를 써가며 빼앗은 광고였다.
송조이.
젊고 예쁜 기지배. 내 인기를 야금야금 빼앗아가는 기지배. 심지어 착하다고 소문까지 난 기지배.
한 마디로 재수 없는 기지배.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지. 20대랑 30대가 비교가 되냐? 최우연은 이제 끝이야.’
우연은 벌써 서른이 되었지만, 송조이는 고작 스물넷이 됐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우연과 송조이를 두고 늘 나이를 들먹였다.
“안 할 거면 빼앗지나 말던가. 누나는 송조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미안하긴 개뿔.”
“송조이는 누나한테 이거 뺏기고 가슴앓이 엄청 했을 텐데. 착해가지고 끽소리 한 번 안냈대요.”
일용의 말에 우연이 부아가 치밀었다. 착해? 송조이가 착해?
“야. 걔가 착하긴 뭐가 착하니? 언론 플레이 하려고 불우이웃돕기 성금 좀 낸 거 가지고 그게 착해? 야, 진짜 착해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지. 나처럼!”
“누나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지난번에 수재민 돕기 오천 했을 때, 입금하기도 전에 기자들한테 연락하라고 해놓고선.”
아오, 저게!
우연은 눈을 부릅뜨고 일용을 노려보았다. 어쩜 하나를 말하면 열 가지를 따지고 드는 건지. 하여간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이게 다 공민 그 자식 때문이었다.
사실 평소라면 비키니 입고 길거리 걷는 건 우연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만든 몸인데, 먹을 거 못 먹고 죽어라 운동해서 만든 몸인데 꽁꽁 가려서 아껴서 뭐해? 라는 생각으로 먼저 훌러덩 벗고도 남을 우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죽어도 벗을 수 없었다.
다시 그 때 일이 생각나자 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공민 이 개자식!
만인의 사랑으로 채울 수 없던 빈자리는 언제나 허전함과 허탈함이 되어 늘 우연 곁을 맴돌았다. 작품을 할 땐 그나마 나았다. 작품이 끝나면 다시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끔찍한 외로움을 없애준 건 공민이었다.
비록 비공개 연인이었지만 그건 진짜 사랑이었다. 결혼이 여배우에게 치명타라는 걸 알면서도 우연은 공민과 결혼까지 생각했다.
여배우에게 결혼이란 모든 걸 바꿔놓는 저주였다.
결혼은 아름다운 신데렐라 역할을 젊고 예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게 만들었다. 결혼한 여배우들은 이제 신데렐라를 괴롭히는 지독한 마녀, 혹은 새엄마 역할 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우연은 공민과 함께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공민은 개자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냐. 네가 내 앞에서 옷을 벗어도 이제 아무 느낌 없는데.”
공민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건 종말을 의미했다.
연인 관계의 종말. 여자로서의 종말.
완벽한 끝.
뭐? 내가 옷을 벗어도 아무 느낌이 없어?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이 완벽한 핫바디를 보고도 아무 자극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며 심장이 쪼그라드는 쪽팔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말을 듣고도 멀쩡히 지낼 우연이 아니었다. 우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움직였다.
티 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인터넷에 공민과 관련된 기사란 기사에는 전부다 댓글을 올렸다.
‘공민 성격 개그지 같음. 우리 누나가 방송 쪽에서 일하는데 상종도 하기 싫은 인간이라고 했음. 진짜임.’
공민 안티카페에서는 조금 더 확실하게 행동해야 했다.
‘공민 그 자식 그거 게이임. 연예계 소문이 파다함. 옷 벗은 여자 봐도 그게 안 선다고 함.’
그러길 석 달. 석 달 뒤에는 자잘하게 뒷담아를 하는 일을 그만 둬야했다. 왜냐? 공민이 송조이와 사귀고 있다는 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기사가 뜨던 날, 우연은 참아야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또 걸었지만 결국 공민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시 한 번 더 우연의 자존심을 짓밟아 놓았다.
“쓸데없는 신경 꺼. 네가 알 바 없잖아.”
공민이 누구던가. 데뷔와 함께 한 번도 탑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인물. 대한민국 여자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인물.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이자 철저한 사생활 관리로 손톱 하나 들어갈 자리도 없다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송조이와 열애설이 났다.
우연과는 연애 사실이 들킬까 집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던 공민이, 공개 연애는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던 바로 그 공민이 말이다.
공식적으로는 그저 친한 동료 배우일 뿐이라는 기사가 떴지만, 우연은 믿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우연은 자잘한 뒷담아 대신, 본격적인 비방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민 안티카페 운영자로부터 운영진이 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받고 나서야 우연은 안티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공민이 비방글을 쓰는 네티즌을 고소라도 하면, 제일 먼저 잡혀가는 게 ‘우연’일지도 모르므로. 세상에 그것만큼 쪽팔린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러던 중, 송조이와 공민이 함께 광고를 찍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TV를 켤 때마다 송조이가 공민과 빙긋 눈을 맞추는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암. 못 보고말고.
“누나. 진짜 촬영 엎을 거예요?”
일용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물었다. 우연은 일용마저 이렇게 나오자 짜증나 죽을 것 같았다. 그냥 확 벗고 말아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어쩌냐. 네가 내 앞에서 옷을 벗어도 이제 아무 느낌 없는데.’
세상에 어떤 여자가 ‘옷을 벗어도 아무 느낌 없다는’ 남자 앞에서 비키니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안 하겠대? 스튜디오로 바꾸면 되잖아.”
“그럼 진즉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누나가 오케이 한 부분이잖아요. 콘티 한 번 안 보시다가 이제 와서 이러시면 갑자기 어디서 스튜디오를 잡아요?”
일용의 말에 우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일용아. 내가 프랑스에 갔어. 거기 사람들이 전부 달팽이를 먹는 거야. 그렇다고 나까지 달팽이를 먹었을까?”
우연은 우아하게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노우. 난 아니야. 거기서 내가 푸아그라가 먹고 싶다면 푸아그라를 먹고,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면 된장지개를 먹을 거야. 와이? 나니까.”
우연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때 우연의 시선 안으로 코디의 얼굴이 보였다. 코디는 거의 반쯤 넋을 놓은 채 공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익스큐즈미?”
우연이 손을 까닥이며 코디에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 코디가 하는 일이 뭔 줄 알아?”
“네?”
“스타를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거. 근데 넌 무슨 운이 그렇게 좋은지 내 코디가 됐어. 누더기를 입혀도 고급지게 표현해내지, 뭘 발라놔도 완벽하지. 네가 신경 쓰는 일이 뭐가 있니? 내가 전지현이 입는 드레스를 뺏어오라니, 김태희 협찬사를 받아오라고 그러니?”
우연의 말에 코디는 그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원하는 게 뭘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또 생지랄을 떨겠지?
이럴 땐 그냥 웃자. 어떻게든 되겠지 뭐. 우연의 코디는 당황한 얼굴로 억지 웃음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넘어갈 최우연이 아니었다.
“여기서 웃고 있으면 또라이지. 나 말귀 못 알아들어요, 광고 하는 것도 아니고.”
웃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럼 이번에는 최대한 불쌍한 척, 미안한 척, 그래. 울상을 지어보이는 거야.
우연의 코디는 입을 앙다물며 할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하니? 나 최우연한테 까이고 있어요. 사람들한테 광고해?”
웃지도 말라. 울지도 말라.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걸까.
“죄송해요 언니.”
“죄송하면 부채질이나 잘 해. 어떻게 부채질도 제대로 못해? 나 더워서 화장 무너지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우연의 말에 코디의 이마 위에서 느낌표 세 개가 큰 자국을 남기며 떠오르는 것 같았다. 부채질이었구나. 부채질이었어.
에이 씨.
“죄, 죄송해요. 언니.”
“얘, 얘. 살살 해. 살살. 머리 헝클어지잖아.”
코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게 하되, 머리가 헝클어지면 안 되는 부채질이라. 대체 어느 정도가 적당한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죄송해요 언니.”
코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러니 우연의 코디로 6개월만 버텨도 다른데서 귀빈 대접을 받는 것이다.
얘가, 그 유명한 최우연 밑에서 6개월이나 버텼대. 쟤는 어디 가서 뭘 해도 되겠다. 뭐 이런 셈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코디 이름은 우연이도 더 이상 묻지 않은 지 오래였다. 코디는 그저 코디일 뿐.
코디를 향해 눈을 흘긴 우연은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셨다.
“이 실장보고 직접 오라고 해.”
“네?”
“여기로 직접 와서 보라고 하라고. 눈 달렸으면 여기서 벗으라곤 못하겠지.”
우연은 이를 갈았다. 그래도 뻔뻔하게 옷을 벗으라 한다면, 이 실장에게 먼저 삼각팬티 바람으로 길을 걸으라고 말할 참이었다.
“누나. 여기서 촬영 안하면 펑크예요. 누나 촬영한다고 여기 이 길 섭외하는데 일주일 걸렸대요.”
“일용아. 너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년 걸린 줄 알아?”
또 그 이야기다. 지겨운 레퍼토리. 우연이 또 그 얘기를 꺼낼 참이라면, 일용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 기술을 발휘할 참이었다.
“십 년.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온갖 개고생하면서 올라왔다고. 근데 나더러 고작 일주일 걸린 일로 내 십 년을 무너뜨리라는 거니?”
“왜 여기서 촬영하면 누나의 그 십년이 무너지는데요?”
일용의 물음에 우연이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날 좋아하는 줄 알아? 재수 없다고 소문이 파다해도 감독들이, 방송국 PD들이, 협찬사에서, 광주고주가 나를 원하는 이유. 예뻐서? 몸매가 죽여주니까? 송조이는 죽어도 따라올 수 없는 아우라 때문에?”
일용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우연을 바라보았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우연이 남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란 불가능 했다.
“노오우.”
우연의 긴 검지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흔들렸다.
“난 싸구려가 아니거든. 송조이는 여기서 엉덩이 흔들며 비키니를 입고 길을 걸었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송조이는 그래도 돼. 와이? 걘 싸구려니까. 근데 난 달라. 난 고급지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고 싶은, 명품. 오케이?”
에휴. 저 고집을 누가 당해. 이제 일용이 해야 할 일은 ‘뒤처리’였다. 똥 싼 놈은 늘 따로 있고, 치우 놈도 늘 따로 있지.
일용은 아까부터 자꾸만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 실장이었다.
“실장님이에요.”
“안 받아.”
“전화 받아요. 받아서 누나가 실장님 알아서 해결하세요. 전 누나가 싼 똥 치우러 갈 테니까.”
일용의 말에 우연이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일용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고 CF 감독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우연은 입술을 씰룩이며 일용을 노려보았다.
재수 없는 자식!
하지만 우연도 안다. 일용만큼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는 걸.
우연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 왜!”
“누구, 최 스타야? 최 스타. 우리 그만 하자. 응? 딱 한 번만 찍어. 이거 찍으면 그 다음 영화 너 원하는 배역 내가 따준다.”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젊고 예쁜 역할은 번번이 송조이한테 빼앗기면서 배역 같은 소리하네.
소속사 힘으로 배역이 돌아가던 시절은 지났다. 대충 인기보고, 인물보고 하던 시절은 지났다. 그 정도는 우연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촬영 시키고 싶으면 지금 스튜디오 알아 봐. 촬영 접으면 접었지 길에서 절대 안 벗어.”
“미쳤어? 너 이거 돈이 얼마 짜린데, 촬영을 접어?”
그놈의 돈! 돈! 돈!
이 실장 눈에는 우연의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돈이 된다면 우연의 분비물이 묻은 휴지라도 가지고 갈 사람이었다.
“그 돈 내가 물어낼게. 그럼 됐지? 끊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우연은 신경질 적으로 휴대폰을 내던졌다. 더 이상 이딴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원하던 배우가 되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연기를 하고 돈을 벌고 예쁘고 화려한 것들을 몸에 걸치면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했다. 더는 원하는 게 없어질 거라고.
하지만 꿈을 이룬 우연은 ‘행복’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왜 모두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
내 가치를, 내 몸값을 지키겠다는 게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그게 그렇게 무리한 부탁인가? 길거리에 넘치고 넘치는 사람들 앞에서, 파란색 비키니를 입고 걷지 않겠다는 게 그게 무리한 요구인가?
“나 머리 아파. 차에 가 있을래.”
“차 저쪽 길 건너편에 있어요. 먼저 가 계세요. 저는 누나 아파서 못한다고 뻥이라고 치고 올 테니까.”
일용의 말에도 우연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일용이 등을 돌리던 그 순간,
우연의 귓가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헐. 촬영 거부란다. 좀 떴다고 저 지랄이네. 야, 촬영 접자. 오늘 공쳤어. 더워죽겠는데 이게 무슨 짓이라니?”
이런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가면 최 우연이 아니지.
“지금 뭐라고 그랬…….”
하지만 뒤를 돌았을 때, 우연의 시선에는 시계 초심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누구도 우연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우연의 시야 안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또 시작이다.
목구멍이 죄어오는 것처럼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증상. 당장이라도 칼을 든 괴한이 자신에게 들이닥칠 것만 같은 느낌.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 할 것만 같은 망상.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 될수록 당장이라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몸서리 쳤다.
식은땀이 우연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우연은 숨을 내시기 위해, 살기 위해 가여운 숨을 내뱉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사방이 뚫린 길이었다. 건물 마다 우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에게 공황장애로 고통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우연은 천생 연예인이어야 했다.
완벽한 바디와 얼굴만큼,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태생적 연예인.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약한 모습은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에게 물어뜯길 기회를 주는 것 밖에 안 되니까.
우연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도로만 지나면 돼. 일단 차 앞까지만 가자. 그다음 차에 기대어 쉬면 돼. 그럼 다 괜찮아 질 거야.
4차선 도로 위로 아찔한 하이힐이 발을 디뎠다. 휘청거리며 위태로운 발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
빠앙!
코뿔소 같은 승합차가 우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연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좀처럼 속도를 늦출 줄 모르는 차를 바라보았다.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연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머리가 하얀 백지장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순간, 우연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합차 속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