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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집에 산다
작가 : 플라워리
작품등록일 : 2017.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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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연의 일
작성일 : 17-06-25     조회 : 305     추천 : 0     분량 : 7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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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연의 일

 

 

  순간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흐릿해졌다. 흐릿한 풍경이 으깨지더니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온 세상이 섞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붉게, 더 붉게 변하더니 우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흐읍!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우연은 숨을 쉬기 위해 애써야했다. 한 번도 숨을 쉬어 본 적 없는 것처럼,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기라고 한 것처럼.

 

  “이, 이기 뭐꼬. 보소! 여 보소! 야가 와이라노.”

 

  우연의 눈앞으로 지저분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는 한 번도 빗겨본 적 없다는 듯 사방으로 뻗쳐있었고 입 주변에는 아무렇게 난 수염이 음식물 흔적과 함께 말라붙어 있었다.

 

  “아 죽겠생겼다 안캅니까! 빨리 오소! 빨리!”

 

  중년의 남자 박철호가 의사의 등을 떠밀며 보챘다.

 

  ‘안 된다. 안 돼. 이대로 죽으믄 절대 안 된다. 아직은 안된단 말이다.’

 

  박철호의 보챔과는 달리 의사들이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우연은 눈을 뜬 채 공허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과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누가 봐도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의사의 말에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게 혼란스러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창문에 비친 낯선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료실 거울에서 우연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완전히 다른 여자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청순하고 맑은 얼굴, 완벽한 몸매에 빛나던 머리카락은 더는 없었다. 대신 병실 창문에는 앳된 여자의 얼굴만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화장 한 번 한 적 없을 것 같은 깨끗한 피부와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 얼굴에 난 상처와 힘없는 눈빛에 퉁퉁 부어 오른 얼굴.

 

 붕대와 거즈로 가려진 이마, 떡진 머리카락에, 터진 입술까지…….

 

  “나, 나 왜이래요?”

 

  “본인 얼굴도 전혀 기억이 안 나세요?”

 

  “무슨 소리야? 이게 왜 나에요? 이건 나 아니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눈을 떠보니 다른 사람이 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사는 기억 상실증이라고 했고, 우연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저주거나.

 

  꿈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했고, 저주라면…… 저주일 리가 없는데? 내가 뭘 어쨌다고 저주를 받아?

 

  우연은 다시 한 번 기억을 다듬었다. 그러니까 분명 CF촬영 현장에 있었다. 비키니를 입으래서 싫다고 했고, 늘 그랬듯 매니저와 코디를 조금 잡았다.

 

  그러다가 머리가 아파왔고 우울증과 공항장애가 찾아왔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우연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승합차의 운전자 얼굴을 기억해냈다. 광기에 휩싸인 듯 웃고 있던 그 얼굴…….

 

  얼굴을 떠올리자 섬뜩해졌다.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그 남자가 찾아와 ‘아직도 멀쩡하냐며’ 입술을 비틀고 웃을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이거 뭐가 잘못된 거야. 의사 선생님 무슨 착오가 있었나 봐요. 제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저는 이 여자가 아니거든요. 저 최우연이에요. 최우연 아시죠?”

 

  “야가 미친나. 와이라노. 정신 좀 차려봐라. 니가 와 최우연이고. 니는 내 딸 박 별이다. 박 별.”

 

  박철호의 말에 우연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리쳤다. 대체 더러운 남자는 뭔데 나더러 자기 딸이라고 하는 걸까.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선생님. 우리 딸이 완전이 맛이 갔뿐깁니꺼? 야가 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 아저씨가 누구더러 맛이갔대? 아저씨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전 하지 않던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딸의 모습에, 박철호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따님이 최우연 씨 사고 때 같이 사고가 났다고 했죠?”

 

  의사의 말에 우연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예. 최우연 그기 도로 한복판에 떡 나타나는 바람에, 그 운전자가 최우연 피하려고 핸들을 꺽어가. 마 삼중추돌이 생깄다 아닌교.”

 

  이건 또 무슨 얘기래? 우연의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그때의 사고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승합차…… 그 차가 자신을 피하려다가 삼중추돌을 냈다고?

 

  “아마 무의식 상태일 때 들은 내용들이 기억에 남아, 본인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라믄 우예되는교? 마 홱 돌아뿟으니까 정신병원 뭐 이런데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꺼?”

 

  저, 정신 병원이라니? 그 한마디가 우연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돌아오니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고, 상황을 지켜봅시다.”

 

  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왜 이상한 애 몸으로 깨어나냔 말이야. 내가 최우연인데, 왜 최우연이 아니냔 말이야.

 

  그렇다고 계속해서 자신이 최우연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 정신병원에 갇히는 날에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반면 박철호는 박철호 대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고 이후 한 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딸이었다.

 

  사고 충격으로 머리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수술실에 들어간 의사들은 ‘상황을 지켜보자’라는 말 말고는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박철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기 다 지 운명인기라. 박복하게 태어났으믄 차라리 빨리 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매정한 아버지였던 박철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사는 게 지옥구덩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딸의 사고가 탑배우인 최우연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상황을 바뀌었다. 언론사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따님 상태는 어떤가요?”

 

  사고 당시 블랙박스에서는 탑 스타 최우연의 이상한 행동이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왜, 최우연은 자동차를 피하지 않았는가? 왜 최우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는가.

 

  사고 논란은 이윽고, 최우연이 우울증과 공항장애 증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자살’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었다.

 

  그 순간 박철호의 머릿속에 완벽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배우의 자살로 인해 죄 없는 자신의 딸이 희생당했다.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입장에서 병원비가 두렵다. 자신이 돈 때문에 사랑하는 딸을 놓을까 두렵다. 눈물 몇 방울과 울분, 그리고 동정심 조금이면 게임 끝.

 

  인터뷰가 그리 흘러가자, 최우연의 소속사에서 위로금을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그랬던 딸이 정신을 차렸다. 그것도 너무도 멀쩡하게 말이다. 이래서야 어디 위로금이나 더 뜯을 수 있을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박철호의 마음은 점점 더 바빠만 졌다.

 

  ‘뭐꼬 이거. 뭐가 우예 흘러가는 기고.’

 

  박철호는 기적처럼 살아난 딸의 모습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니 참말로 아무것도 기억 안나나? 여는 의사도 읎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봐라.”

 

  아니 근데 아까부터 이 더러운 아저씨는 왜 자꾸 자기더러 솔직하게 말하라는 걸까. 뭘 아는 게 있어야 솔직하게 말을 하지. 그렇다고 사실 나 여배우 ‘최우연’이요, 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뭘요?”

 

  “니 참말로 아부지 얼굴도 몬알아보겠나?”

 

  박철호는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난 딸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박철호는 의심가득한 눈으로 우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마이갓! 지져스!”

 

  “야가, 와이라노?”

 

  우연은 자신의 몸에 누추한 꼴을 한 박철호의 손이 닿는 게 송충이가 몸에 붙은것 만큼이나 끔직했다.

 

  “미쳤어요? 지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야?”

 

  “뭐라꼬? 딸내미 손 좀 잡았다고 와? 누가 잡아간다드나.”

 

  박철호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기억을 잊었다고 해도,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누가 아버지야? 누가 당신 딸이냐고. 들이 댈만한 걸 들이대야지. 나 진짜 어이가 없네.”

 

  꿈을 꿔도 무슨 이런 더럽게 생생한 꿈을 꾸는 건지. 우연은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리며 제발 이 꿈에서 깨길 바라며,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몰래카메라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져? 설마 교통사고로 얼굴이 으깨진 건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부은 건가?

 

  하지만 몸은? 내 키는 어떻게 된 건데? 내 다리가 왜 이렇게 짧아 졌냐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단 일용이부터 찾아야 해.

 

  우연은 박철호를 피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이 저주 같은 상황에서 무슨 수를 서서라도 빠져나와야 했다.

 

  그때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우연의 귀를 잡아끌었다.

 

  “밖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최우연, 우리 병원에 있잖아요.”

 

  “최우연?”

 

  “모르세요? 최우연 촬영하다가 교통사고 나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선생님들 하는 말 들었는데 깨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대요.”

 

  키 작은 간호사의 말에 우연의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내가 중환자실에 있다고?

 

  “진짜? 어머, 어쩌다가 그랬대.”

 

  우연은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 목을 콱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기 나와요.”

 

  간호사가 데스크 앞에 놓인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텔레비전 주위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던 배우 최우연씨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최우연씨는 CF를 촬영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는데요. 조바우 기자입니다.”

 

  화면은 촬영 당시 우연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도로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당시 사고 현장에 있던 시민이 찍은 영상입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서 있는 배우 최우연씨가, 달려오는 승합차를 향해 갑작스럽게 뛰어듭니다. 이번 사고로 최우연씨를 피하려던 승합차가 핸들을 급하게 꺾으면서 달려오던 맞은 편 차량과 부딪히면서 승합차 운전자 김 모 씨가 즉사하고, 반대편 차량을 타고 있던 여대생 박 모 양이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 합니다.”

 

  “조바우 기자. 그런데 영상을 보면, 최우연 씨가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한 걸로 보입니다.”

 

  “네. 최우연씨가 차도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영상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당시 CF촬영 현장에서 최우연씨가 부당한 대우를 겪었다는 증언입니다.”

 

  기자의 말과 함께 모자이크 한 여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비키니를 입으라고 했거든요. 아시겠지만 거기 사람이 되게 많았어요. 최우연 씨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 많은 길 한가운데에서 손바닥만 한 비키니 입고 걷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같은 여자로서 최우연 씨가 불쌍하기도 하고…….”

 

  다시 화면은 기자의 얼굴로 채워졌다. 기자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낀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 가운데, 최우연 씨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입니다.

  승합차 운전자가 사고로 즉사한 가운데 자살인지 사고인지 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는 가운데 경찰이 모든 상황을 염두 하고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연은 누군가 커다란 돌로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자살을 하려고 했다고?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더 이상 그 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우연은 있는 힘을 다해 병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입구에는 많은 취재진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우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도대체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사고로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보니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의 몸에 들어와 있다면, 누가 그 사실을 믿어 줄까.

 

  물에 젖은 솜이 우연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연을 향해, 은밀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쯔쯧. 얼마나 답답할 거야, 그래. 세상이 홀딱 뒤집어 졌는데 환장하지. 암.”

 

  노인 한 명이 손을 떨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허옇게 샌 머리카락하며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옷,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는 노숙자였다.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여 여러 색의 천들을 덧대 입은 것처럼 구질구질하고 더러워 보였다.

 

  “누구세요?”

 

  우연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앞니 두어 개가 없었고 그나마 남은 이마저 누렇게 변해 있었다.

 

  노인은 그런 우연이 재미있다는 듯 몸을 뒤척이며 웃어댔다. 그러자 노인의 팔에 있던 팔찌에서 구슬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구슬소리와 달리 노인의 웃음소리는 섬뜩하게 들렸다

 

  딸랑. 딸랑.

 

  “영혼이 바뀌었다는 걸 누가 믿어? 다들 미쳤다고만 하지.”

 

  노인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대한 함정이 빠진 것처럼, 찐득한 진흙밭에 발을 빠트린 것처럼 우연은 걷잡을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 당신 뭐야?”

 

  “네 몸을 되돌리지 않으면 넌 영원히 그 몸에 갇히게 돼. 네 몸에 들어간 그 아이는 너 대신 죽게 될 거고 말이야.”

 

  “누가 내 몸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누구긴 누구야. 네가 들어가 있는 그 몸뚱아리 주인이지.”

 

  “그러니까, 이 애랑 저랑 몸이 바뀌었단 말이에요?”

 

  “늘 사고가 문제야. 아직 죽을 준비도 안 됐는데 육체를 죽여 놓으니 영혼이 놀라서 다른 몸에 훌떡 들어 가버린 게지.”

 

  “그, 그럼 어떡해요? 저, 전 어떻게 되는 데요?”

 

  “걱정할 거 없어. 몸을 다시 바꾸기만 하면 돼.”

 

  “할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뭐든 다 할게요.”

 

  노인은 흥미로운 게임을 시작하듯 고약한 입냄새를 풍기며 웃었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에 있는 수천 개의 주름을 꿈틀거렸다.

 

  “간단해 그놈이 네 진짜 모습을 알아보기만 하면 돼.”

 

  우연은 노인이 하는 말이 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굴을 찌푸린 우연을 향해 노인이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 모습이라니요?”

 

  “그놈이 너한테 먼저 손을 내밀 거야. 그때 그놈 손을 꼭 잡아. 절대 놓지 말고.”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연이 노인을 향해 한걸음 다가섰다.

 

  어쩐지 이 노인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우연의 행동을 이미 예측하기라도 했다는 듯, 벤치에서 일어나 건너편 길을 향해 움직였다.

 

  “우연을 조심해야 해. 암. 이놈의 우연이 사람 생에 이상하게 관여를 한단 말이야. 허긴.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게 뭐겠누.”

 

  딸랑, 딸랑.

 

  노인을 붙잡기 위해 도로 위를 따라나섰지만, 다시 찾아온 지독한 두통이 우연의 발목을 붙잡아 세웠다.

 

  방울소리가 마치 자신의 귓속을 마구 긁어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우연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빠앙!

 

  “이봐요, 비켜요.”

 

  운전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우연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우연의 귓가에는 도시의 소음과 딸랑이는 방울소리, 그리고 섬뜩한 노파의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 진짜. 길 막고 뭐하는 거야. 이봐요, 비키라니까!”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해봤지만, 누군가 못으로 우연의 머릿속을 긁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 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커다란 손이 우연 앞으로 다가왔을 때, 조금의 의심도 없이 우연이 그 손을 잡았을 때, 그때 까지만 해도 우연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차분하게 이마를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쌍꺼풀 없는 큰 눈, 곧게 뻗은 코와 표정 없는 얼굴까지…….

 

  “공 민?”

 

  ‘그 놈이 너한테 먼저 손을 내밀거야.’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든 우연이 뒤늦게 공민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이미 ‘우연의 일’은 시작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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