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연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말도 안 돼.”
공민이랑 엮이는 건 절대 안 된다. 저 사람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과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지금 누구 손을 잡은 거지? 정신이 번쩍 든 우연은 재빨리 손을 빼내 등 뒤로 숨겼다. 덕분에 공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 여자가 지금 내 손을 거부했다. 그것도 역겨운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그건 공민의 인생사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일이었다.
공민은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그게 장난감이든, 돈이든, 여자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웃음 한 번에도 사람들은 공민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 볼썽사나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여자만 빼고.
“제가 지금 ‘괜찮으시냐’고 물었는데요.”
공민은 자신도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닌 여자라고 해도, 누구든 자신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박 별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얼굴에 사랑스런 미소를 가진 이 남자를, 눈에 띄게 멋진 외모를 가진 이 남자를, 박 별 역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여자는 박별이 아니었다.
박별의 몸에 들어간 최우연이었다. 그것도 공민에게 비참하게 걷어차인 여자. 그런 우연에게 공민이 통할 리가 있나.
개자식.
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다고. 우연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채 중얼거리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신경 끄시고 가던 길 가세요.”
“어디 불편하신 거 같은데 도와드릴게요.”
“저는 지금 그쪽이 있는 게 불편하거든요?”
우연의 삐뚤어진 대답에 공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연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 도통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공민이었다.
언제나 딱딱하고 관심없다는 무표정. 사람들은 그 특유의 표정 때문에 더욱 그를 간절히 원했다.
겨울눈처럼 시퍼렇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어졌을 때 그보다 따뜻한 봄볕은 없을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으므로.
그런데 지금 이 여자가 공민의 얼굴에 표정을 만든 것이다.
“진짜 이상한 여자네. 민아. 너 그냥 차에 들어가 있어. 기자들도 많은데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공민의 매니저인 이덕구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우연 앞에 섰다.
덕구는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웬만한 여자 허벅지보다 굵은 팔뚝에,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승모근, 우연 하나 쯤은 손가락 두 개로도 던져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외모였다.
보통사람들은 덕구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똑같으면 최우연이 아니지.
“이봐요, 아줌마.”
“뭐, 뭐요. 아줌마?”
서른이 넘은 여자에게 아줌마라는 단어는 초인적인 힘을 만드는 단어였다. 배째라 식의 뻔뻔함과 불곰과도 싸울 수 있는 맷집을 만드는 힘.
그게 비록 갓 서른이 된, 스무 두 살의 박 별 몸에 들어가 있는 최우연이라 할지라도.
우연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덕구를 쏘아보았다.
“이 아저씨가 지금 누구더러 아줌마래.”
“뭐야 이 여자. 멀쩡하네. 아줌마 쇼했지? 환자복입고 지나가는 차 마다 드러누워서 보험금이라도 더 타려고?”
“뭐가 어쩌고 어째? 근데 이 아저씨가 진짜.”
안 그래도 뭐가 뭔지 몰라 속 시끄러웠는데 잘 됐네. 내가 아저씨 굵은 팔 드러내면서 방송국 왔다 갔다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너 어디 죽어봐라.
더 이상 우연의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이라도 덕구의 울퉁불퉁한 팔뚝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벤 창문이 미끄러지며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익숙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오빠, 괜찮아요?”
송조이였다.
우연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 몸이 죽을지 살지 알 수도 없는데 송조이를 태우고 병원에 와?
“기자들 많으니까 넌 나오지 마.”
뭐가 어쩌고 어째?
공민의 말에 기가 차고 치가 떨리는 우연이었다.
그건 분명 ‘걱정’이었다. 송조이는 공민이 걱정되었고, 공민은 송조이가 걱정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는 건 끈끈한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 한 일이었다.
송조이의 얼굴이, 짙은 선팅으로 가려진 창문으로 서서히 사라지자 우연의 머릿속에서 인내심을 담당하는 부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연기를 피워대고 있었다.
개자식.
내가 죽어가는 데 그 와중에 송조이를 챙이고 싶었니?
그래도 우연은 한때는 공민이 자신에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제 보니 자신은 그저 공민이 가지고 논 ‘신상’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 여친이 죽어가는 마당에 현 여친을 데리고 병문안을 올 수 있단 말인가.
“병원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타세요.”
공민이 손을 뻗어 우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우연이 팔을 비틀어 빼내려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공민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놓으라니까!”
“왜 이렇게 삐뚤어졌어?”
“뭐?”
“사람 호의를 왜 이런 식으로 받냐고.”
“호의 같은 소리하네. 누가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속셈?”
“그래 속셈. 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 도와줄 사람이니? 내가 널 몰라?”
공민은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에게 막말을 쏟아 붓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자신을 잘 안다면 그 이유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사랑. 그게 아니면, 경멸.
확실한 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경멸이라는 감정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있지만 처음 본 사람을 경멸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므로. 특히 바로 눈앞에 완벽에 가까운 남자가 있을 때면 더더욱.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중인격자.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쓰레기. 아, 이제 알겠네. 너 이러는 이유. 너 사진 찍히고 싶어서 그러는 구나?”
공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자의 눈빛은 경멸이었다. 어째서 이 낯선 여자는 자신을 경멸하는 걸까.
어째서 지금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무례함이 낯설지 않은 걸까.
“쓰러진 여자 도와주고 가는 모습 인증샷 찍히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때마침 이 병원에 기자들도 깔렸겠다, 뭐 그런 거지. 이미지 메이킹. 너 그거 엄청 잘하잖아.”
우연은 입안에 맴도는 모든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무례하고 건방짐에 공민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고 있는 미소. 화가 났을 때 하는 공민 특유의 버릇이었다.
우연은 공민이 더 많이 화가 나길 바랐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찢어질 것처럼 아프듯이 너도 아파보라고. 그게 안 되면 머리끝까지 화라도 나라고.
“그런 거 아니면 신경 끄고 당신 갈 길이나 가.”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낮은 공민의 목소리가 짧게 울리더니, 우연의 눈앞으로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공민은 우연, 아니 박 별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뭐하는 짓이에요?”
공민이 손을 떼 우연의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흰 손가락 끝에 그와 대비되는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피나. 이마에서.”
“남이야 이마에서 피가 나든 말든…… 으읏.”
그때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아까 있었던 머리가 깨질 것 같던 느낌이 두통이라면, 지금은 진짜 머리가 깨지면서 나는 고통이었다.
“데려다 줄게요.”
머리를 부여잡은 우연의 손목을 공민이 잡아끌었다. 덕구는 공민이 그 여자를 잡아끄는 게 내심 불편했다. 저 자식 저거 진자 기자들한테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려고 그런대.
“이거 놔요.”
“그건 안 되지. 피 흘리는 여자 두고 그냥 갔다가, 그 쪽 말대로 사진이라도 찍히면 큰일이니까.”
있는 힘껏 자신을 노려보는 우연을 향해 공민이 미소 띤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이미지 메이킹.”
*
“아까 공민 얼굴 보셨어요? 진짜 미쳤나봐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겨?”
꺄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우연은 심사가 뒤틀렸다. 기어이 공민이 자신을 응급실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그걸로 모자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전하기까지 한 것이다. 간호사들은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공민 열성팬으로 변해버렸다.
“진짜 성격도 좋지 않아요? 그냥 병원에 데려다 주기만 해도 되는데, 인사까지 하고 가는 거 봐요. 선생님도 들으셨죠? 잘 부탁합니다, 그러는 거.”
“진짜 천사가 따로 없다, 천사.”
“밖에 기자들도 많던데, 공민이 이러고 갔다는 거 얘기라고 해줄까요?”
또 다시 꺄르르.
이걸 기자한테 알린다고? 공민이 진짜 천사가 되게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최우연이 아니었다.
“놉놉놉.”
우연은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간호사들은 방금까지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던 환자가 우아하게 손가락을 흔드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들? 지금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네. 공민이 천사라고요? 놉, 놉! 세상 천사 다 죽었대?”
“어머, 왜요? 공민이 환자분 데려다 주신 거 아니에요?”
“맞긴 맞죠. 좀 강제성이 있긴 했지만. 뭐 자세한 얘긴 내입으로 굳이 하고 싶지 않고. 하나만 기억해요.”
우연의 말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웠다.
우연은 공민 욕 같은 건 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사실이 사실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하는 거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조금 뜸을 들였다.
“선생님들. 공민이 진짜 천사면 저렇게 얼굴을 들이밀고 인사를 하고 갔을까요? 우린 여기서 이 점을 주목해야 해. 매니저를 시켰을 수도 있는데 굳이 왜, 본인이 와서 인사까지 하고 갔냐는 거지.”
우연의 말에 묘한 설득력이 느껴지는 건 비단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터. 모두 우연의 말에 집중했다.
“왜겠어요? 자고로 선행이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거든. 근데 공민은 오른 손이 한 일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는 거거든, 지금.”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공민이 환자분 구해준 거잖아요.”
그때 어린 간호사가, 반기를 들었다.
“노우. 완전 오해하고 계시네. 공민이 날 구해준 게 아니라, 병원으로 돌아오는 날 굳이 부축을 해서 온 거지. 그리고 이 머리에서 나는 피도 공민이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둘게요. 오케이?”
어머, 진짜?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튀어나왔다.
이제야 우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번졌다.
그때 다시 응급실로 들어서던 공민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 멈춰서야 했다.
“저 여자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민아, 내가 한 마디 하고 올까?”
불의를 보면, 불의로 맞서는 덕구의 얼굴은 이미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됐어.”
“됐긴 뭐가 돼? 연예인이라고 막 말하고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저런 사람들은 고소를 해서 정신 바짝 차리 게 해줘야 해. 연예인이 건어물이야? 왜 아무데서나 씹고 지랄이야. 아 진짜 열 받아 죽겠네. 누구는 떨어트린 물건까지 주워다 주는데…….”
화가 난 덕구가 공민의 손에 들린 팔찌를 보았다. 조잡하게 얽힌 실 팔찌에 녹슨 구슬까지달려 있었다. 그 여자가 떨어뜨린 것 같다면 다시 돌려주고 오겠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쓰레기한테 일일이 대꾸할 필요 없어.”
응급실 안을 들여다보는 공민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쓰레기.
모이고 모이면 더 큰 쓰레기가 될 뿐인 쓸모없는 존재들.
공민은 저런 류의 인간들을 경멸했다. 팔찌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든 놀라울 정도로 평점심을 유지하는 공민이었다. 그런 공민이 화를 내는 모습에 덕구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공민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주먹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저깟 여자한테 화를 내고 있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잖아.
주먹 쥔 손을 풀자 그의 손에 쥐어 있던 팔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구슬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마치 뭔가가 부서지듯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쨍그랑.
뭔가가 깨지는 소리에 우연이 뒤를 볼아 보았다.
“방금 무슨 소리에요?”
“무슨 소리요?”
“방금 뭐 깨지는 소리 안 났어요?”
우연의 말에 간호사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잘못 들은 건가.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 이름은 왜요?”
생각해보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우연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잔뜩 경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민감한 문제였다.
자신은 분명 최우연이지만, 최우연의 몸이 아니니까.
“성함을 알아야 담당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죠.”
“여기가 병원인데 뭘 그렇게 까지. 제가 알아서 갈게요.”
대답을 하는 듯 마는 듯, 건성으로 답한 우연의 시선은 온통 밖에 가 있었다. 몇몇 기자들이 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만.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최우연 병실은 어디예요?”
“왜요. 환자분도 최우연 팬이세요? 요즘은 우리 병원 오는 환자들은 왜 이렇게 최우연한테 관심이 많은지. 만나고 싶다고 너도 나도 다 만나면 병원에서 환자 관리를 하는 거겠어요?”
빈정대는 간호사의 대답에 우연은 짜증이 치솟았다.
아니, 이 병원은 왜 이렇게 불친절한 거야? 재수 없어 진짜. 아니꼬운 눈빛을 아무리 보내 봐도, 어린 간호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빈정대며 우연의 심기를 건드릴 뿐이었다.
“아니면 공민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러시려고 그러세요? 숨어서 악성댓글 다는 사람들 욕할 거 없다니까. 이렇게 앞에서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는데. 안 그래요?”
아. 이제 알겠네. 촉이 좋은 우연은 간호사의 한마디에 사태파악이 완료되었다. 이 간호사가 유난히 자신에게만 불친절하게 구는 이유. 빈정대며 심기를 마구 건드리는 바로 그 이유를 말이다.
공민.
우연에게는 개자식이나 다름없는 공민 때문이었다.
한방을 먹고, 똑같이 한방을 먹이지 않으면 다리 뻗고 잠을 못자는 게 우연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노우.
그건 최우연에게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 우연의 눈을 찌른다면, 우연은 눈을 찌르고 이를 뽑아놔야 직성이 풀렸으므로.
“병원에서 일하시면 힘드시죠? 만날 아파 죽겠다는 사람들만 오고, 얼마나 힘들겠어. 그 힘든 일을 꿋꿋하게 참아내고 나이팅게일 정신으로 이겨내셔서 그런 가 치료를 참 잘 하시네.”
갑작스런 우연의 칭찬에 어린 간호사는 경계를 풀고 새침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뭐, 칭찬해 주는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우연은 경계가 풀리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나 머리 터진 거 치료도 잘 해주고 했으니까, 선생님한테만 딱 알려드릴게요. 제가 아는 친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방송국 쪽에서 일을 하거든요. 잠깐 이쪽으로.”
우연이 손을 까닥이며 어린 간호사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간호사는 뭔가에 홀리기라고 한 듯 다가섰다.
“공민 게이래요. 여자한테는 그게 안 선대.”
“네?”
“팬들은 좋지. 다른 여자한테 안 뺏겨도 되니까. 아, 여자가 아니라 남자한테 뺏기긴 하겠구나.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요. 절대 비밀. 쉿.”
“이것보세요. 이렇게 함부로 유언비어 퍼트리고 다니시면…… 어머, 환자분 수납하고 가셔야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응급실을 빠져나온 우연은 습관처럼 기자들의 눈을 피해 비상구 계단으로 움직였다.
우연은 비상계단을 올라서며 중얼거렸다.
“수납 같은 소리하고 있네. 피나는 거 그거 조금 닦아주고, 밴드 조금 붙여놓고 무슨 돈을 또 받겠대? 하여간 도둑놈들이 따로 없다니까. 뭐? 아무나 만날 수 있으면 병원에서 관리를 하는 거냐고? 웃기시네 아주. 내가 아무나야? 내가 내 몸 보겠다는데 무슨…….”
쫘악.
그때였다.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우연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쫘악.
소리로 짐작하건데, 여자 한 명이 적어도 두 명의 남자 뺨을 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의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벌하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뺨까지 때리고 그런대?
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이 동했다.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계단을 하나 둘씩, 올랐다.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해? 최우연 깨어나면 그땐 어쩔 거야?”
멈칫.
계단 위를 올라서던 우연의 발걸음이 다시 멈춰 섰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왜 저 여자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야?
상황파악을 할 수 없었던 우연은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아는 목소리던가?
“확실하게 죽이라고 했잖아.”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계단을 타고 흘러와 우연의 몸을 휘감았다.
죽이라니?
머릿속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았다. 그날 그 사고, 웃고 있던 운전자, 피할 수 없을 것 같던 예감들…… 그리고 자살로 보도 되고 있는 언론까지.
모든 게 계획되고 있었다.
우연의 죽음은 저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 속에서 우연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우연’이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려오고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도망가야 해! 여기서 멀리 떨어져야 해!
우연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들켜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설사 자신이 우연의 몸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 이야기를 들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우연을 죽이려 했다면, 그 사실을 안 누구든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덜덜 떨려 힘을 줄 수 없었다. 가슴이 옥죄어 오고, 누군가 목구멍을 꽉 짓누르고 있는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공황장애가 다시 우연의 발목을 움켜쥔 것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조금만, 조금만 내려가면 돼.
우연은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랬다. 마른 침을 삼키며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덜컹, 쿵.
작은 소리는 태풍이 되어 순식간에 비상계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발을 헛딛으며 신발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거기 누구야?”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우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우연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쁜 숨을 내쉬며 그저 저들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이제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낯선 남자가 우연의 손을 끌어 당겼다.
“너 여기서 뭐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였다. 우연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 보다, 당장 자신을 향해 날아올 어둠의 손길이 두려워 남자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놈이 너한테 먼저 손을 내밀 거야. 그때 그놈 손을 꼭 잡아. 절대 놓지 말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두 번째 우연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