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너 예뻐.
“괜찮아? 아저씨, 여기예요.”
“아이고마. 어디갔었노? 정신도 읎는기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나?”
남자의 부름에 박철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우연의 심장이 쿵쾅대며 뛰었다. 공포에 질릴 때로 질린 우연의 눈은 계단 위를 향해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이미 멈춰있었다.
*
“크게 걱정하시진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가벼운 쇼크 증상인데,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다시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보호자분이 꼭 동행해주시고, 오늘처럼 혼자 다니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의사가 병실을 나가자, 박철호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연은 힘없이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못들은 걸까?
공황장애가 찾아올 때면 가끔씩 그런 증상이 나타고는 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리거나, 아무도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지 않는데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이번에도 공황장애의 한 부분이었을까?
그저 공황장애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분명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잘못들은 거라면 나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진짜였다면…….
우연은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진짜 미치고 팔짝 뛴다카이. 제정신도 아닌 게 어딜 싸돌아 댕기는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아저씨. 그럼 별이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전부 다?”
“지가 누군지도 모른다 카드라.”
“진짜 신기하네.”
남자가 턱을 괴고 우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델처럼 늘씬한 몸에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순한 눈, 매끈하게 뻗은 콧날에 뽀얀 피부가 한눈에도 호감이 가는 남자는 ‘박이한’였다.
“안녕. 별아.”
이한이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눈이 반달모양으로 변하고 입고리가 말려 올라가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였다.
“오빠 진짜 기억 안나?”
“…….”
“그렇게 쉽게 잊혀 질 사람이 아닌데, 내가.”
이한은 길죽한 손가락을 들어, 우연의 손등을 간질이듯 만졌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찌릿하고 따뜻한 기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어졌다.
뭐야, 얘. 나 기분이 왜이래?
오랜만에 느끼는 야릇한 기분에 우연은 좀 전에 있었던 일이 까맣게 잊혀 질 만큼 정신이 멍해졌다.
한눈에도 우연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이 귀여운 남자는, 대체 뭐기에 이렇게 찌릿찌릿 해지는 걸까. 내가 원래 연하 체질이었던가?
“어딜 만지노, 어딜! 니 별이한테 찝쩍거리지 말라 했제.”
“아파요! 말로 해, 말로. 왜 때리고 그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이한을 보며, 박철호는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생긴 건 어디 기생 오라비처럼 생겨가지고. 어디 남자가 할 짓이 없어서 눈웃음이나 살살 쳐대고 말이야.
사실 이한과 별이의 인연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이어진 인연이었다. 박철호가 어린 별이를 두고 열흘 씩 집을 비우는 날이 허다했지만, 별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언제나 별의 곁에는 이한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한도 이제 스물여섯이었다. 남자는 모두 늑대이고, 늑대가 자신의 딸을 노리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제아무리 딸에게 무심한 아버지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니는 딱 조심해라. 내가 다 보고 있다.”
“보긴 뭘 봐요? 내가 뭘 어쨌다고. 지켜볼 거면 일찍 좀 지켜보던가. 벌써 볼 거 못 볼 거 다 봤구만.”
“뭐, 뭐가 우짜고 우째?”
“그럼 아저씨 집나갈 때마다 별이 씻기고 재우고 그런 거 누가 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혼자 다 했을 것 같아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박철호를 두고, 이한은 고개를 돌려 다시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검지 손가락으로 별의 이마를 살짝 톡, 쳤다.
찌릿.
전기가 통한 듯,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뭐야, 이 자식 정체가 뭐야? 왜 닿기만 해도 미친 애처럼 온 몸이 찌릿찌릿한 거야? 미쳤어 진짜.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
“내가 너 다 봤어. 알아?”
씽긋.
이한의 반달눈이 우연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을 때, 그의 붉은 입술이 우연의 귓가에 닿았을 때, 우연은 확실하게 알았다.
이 남자는 온몸이 섹스심벌 덩어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한의 입술이 다시 멀어져 갔다. 우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억울하면 다시 기억해 내. 알겠지?”
퍽.
우연과 눈맞춤을 하던 이한의 얼굴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더는 이한의 꼴을 지켜볼 수 없던 박철호가 뒷통수를 후려갈긴 탓이었다.
“이 새끼가, 근데 지금 니 뭐라했노? 별이한테 찝쩍대지 말라했제?”
“아우, 아파. 왜 자꾸 때리고 그래요. 걱정 마세요. 내 눈에 별이는 9살짜리 꼬맹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되는 딸 두고 왜 그렇게 가출은 하셨어요?”
저, 저, 저놈이 자식이!
박철호는 코에서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씩씩댔다. 저 얄미운 자식! 꼭 저렇게 한마디도 안지고 따박따박 대들어야 속이 시원할까.
“다 지난 옛날 일은 뭐하러 하노?”
“아저씨한테나 옛날일이죠. 나는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별이는 오죽하겠어요?”
“시끄럽다. 고마! 흐음. 하여간에, 별이 니도 인자 함부러 막 돌아댕기고 그라믄 안 된다. 알겠나? 정신도 없는 아가 그래 돌아다니고 그라믄 안 된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진짜.
지금 누가 정신이 없다는 건지. 우연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장이 꼬이듯 짜증이 치솟았다.
“이봐요. 지금 누구더러 자꾸 미쳤대? 나 멀쩡해요. 멀쩡하다니까. 4개 국어 할 줄 아는 미친년도 있어요? 내가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못하는 게 없어.”
버럭 소리치는 우연의 말에 박철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시나야. 니는 멀쩡했을 때도 한국말 밖에 몬했다. 영어라고는 헬로우, 하이 밖에 몬했든기 무슨. 4개 국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니가 그라니까 정신이 나갔다는 기다.”
“이것 봐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못 믿을 거 아는데…… 아, 됐어요. 됐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괜히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누가 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을 믿어주겠냐고. 우연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내리칠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딱 있어라, 알겠나? 나머지는 아부지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흐음. 잠깐 있어래이.”
휴대폰이 울리자, 말을 채 끝내지 못한 박철호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들고 병실을 나갔다. 우연은 박철호가 나가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으휴. 지긋지긋한 인간. 저 인간은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야? 진짜 우리 아버지도 나한테 찍소리도 못하는데 지가 뭔데. 어우 짜증나 죽겠어 진짜.
진짜 우연의 부모님도 우연에게 잔소리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어려웠던 집안을 우연이 다시 일으켰을 때문이다. 집에 가면 모두들 우연의 성미를 맞추느라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까탈스러운 우연에게 이골이 났던 탓일까. 가족들은 모두 홀연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어쩐지 우연은 외롭게 홀로 지내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안에 홀로 있을 때 그 기분. 일이 없을 때면 우연의 외로움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어지기만 했다.
“이봐요.”
“이봐요 아니고, 오빠.”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박이한을 보고 있자니, 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 남자 입에서 나온 ‘오빠’라는 말은 특별할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지.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방송국 PD며 나이차이 나는 배우들이며, 아저씨 팬들이며, 하여간 개나소나 다 오빠라고 부르던 우연이었다.
근데 왜 이 남자한테는 입이 안 떨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연하한테 오빠라고 하려고 해서 그런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남자에게 몸이 이상하게 반응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찌릿. 전기가 통한 듯 짜릿하고 무서운 놀이 기구를 탔을 때처럼 가슴이 쿵쿵 떨어져 내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얘는, 아니 그러니까 나는 어떤 애였어요?”
너무 이상한 질문이었을까.
이한이 눈을 깜박이며 우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난히 까만 이한의 눈동자에 별의 얼굴이 비쳤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질문한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로 바라보던 이한이, 씽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어딘지 씁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별이 착하고, 다정하고, 예쁘고. 그런 애지.”
그리곤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기.
남자와의 눈맞춤에서 먼저 시선을 피한 적 없던 우연이었지만, 이 남자의 눈 만큼은 예외였다.
맑고 투명한 눈이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무런 욕심도 의심도 없이 바라보는 것 같은 눈.
우연의 외적인 모습에 반해 막무가내로 들이대던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눈이었다.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야.”
진심이 묻어나는 따뜻한 목소리였다.
이한은 우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주머니에 쏙 넣어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그런 미소였다.
박철호가 이 장면을 보고 노발대발 난리굿을 치겠지만 말이다.
“그럼 혹시, 내가 그쪽이랑…….”
“그쪽 아니고, 오빠.”
“하여간, 우리가 사귀거나 뭐 그런 사이였나?”
아무리 봐도 한쪽이 심하게 기우는 것 같긴 하지만, 사람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우연은 속으로 몇 번이나 자신의 질문을 정당화 시켰다. 결코 이 남자를 탐내서 한 질문이 아니라고. 이 여자의 몸으로 지내려면 알 건 알아야 하니까.
저 눈빛하며 미소에, 대답까지 꿀이 뚝뚝 떨어지는 이 분위기로 봐서도 그렇고…… 아니 뭐. 영혼이 바뀌었다고 연인 사이를 막 억지로 떼어놓고 그러면 안 되니까.
하지만 우연의 자기위로성 생각과 달리, 이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사귄다기 보단 내가 짝사랑했지. 일방적으로.”
“왓? 누구? 그쪽이 얘를, 아니 나를 좋아했다고요? 심지어 짝사랑. 아니 왜?”
이 여자애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걸어 다니는 섹스 심벌이 좋다는데 왜 안 만나고 짝사랑을 하게 만들어?
“왜긴. 너 예쁘잖아.”
“예뻐, 내가?”
이한의 생글거리는 미소에 우연은 속으로 가슴을 쳐야했다. 이 남자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보는 눈은 드럽게 없네.
“예쁘긴 뭐가 예뻐요. 예쁜 애들 다 죽었나? 멀리 볼 것도 없어. 최우연만 봐봐. 얼마나 예뻐. 걔 하나도 안 고친 거야. 완전 백프로 자연산. 다 맞는다는 주사 한 번도 안 맞았어. 근데 그렇게 예뻐. 무슨 신이 그렇게 빚어놨는지. 그것뿐이야? 몸매는 또 얼마나…….”
“별아.”
뭐지 이 분위기는.
우연은 자신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지만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저렇게 달달한 눈빛으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너 예뻐. 최우연 보다 훨씬 더.”
쿵쾅, 쿵쾅
맙소사.
우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예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또 들은 우연이었다. 예쁘다는 말은 우연의 발톱의 때만큼도 자극을 주지 못했다.
그 동안 감정이라는 걸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그 동안 그 많은 작품을 찍으면서 우연은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하고 설레는 척 웃어야 했다. 가슴이 아픈 척 눈물을 흘렸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척 가식을 떨어야 했다.
아무리 많이 웃고, 많은 것을 가져도 진짜 행복한 적은, 진짜 설레었던 적은 없었다.
근데 어째서지?
어째서 이 남자의 말에 가슴이 뛰는 거지?
세상에.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더라. 남자 앞에서 얼굴을 붉힌 게 언제였더라.
어머, 쟤 입술은 또 왜 저렇게 핑크 핑크하니? 미치겠네 진짜. 왜 저렇게 웃고 난리라니.
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이한의 입술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 어머. 미쳤어 진짜. 이러다 큰일 나겠어. 일 벌이겠다고. 안 돼. 정신 차려 최우연. 어디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애를! 그것도 남의 몸으로.
우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음을 단단하게 붙잡아야했다.
“저, 저 사람은 어때요? 그러니까…… 내 아버지요.”
“아저씨 좋은 사람이지.”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기억 안 난다면서 어떻게 알아?”
“아까 그랬잖아요. 가출.”
“뭐 어떻게 보면 좋은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아니기도 하고. 그냥 아저씨 하는 말, 반은 믿고 반은 안 믿으면 돼.”
그게 말이 쉽지. 어디까지가 반이고, 어디까지가 반이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내가.
우연은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병실 문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지. 하고 다니는 행색 보면 돈이 많은 거 같지는 않은데 1인실에 입원을 시켰단 말이야.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박철호가 서둘러 들어왔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이 일을 우야면 좋노. 가만 있어보자. 별아. 니 지금부터 아직 안 깨어난기다 알겠나? 아니믄 확 바보 멍충이가 된 것처럼 할래? 우째해야 돈을 받겠노.”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박철호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한은 그런 박철호가 익숙하다는 듯 캔음료를 꺼내 마실 뿐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그래야 돈을 받을 수 있다 안카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박철호는 고통스럽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병실 안을 왔다갔다 움직였다. 그러길 한참.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는지 박철호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니 사고 당했을 때, 그기 최우연 때문이라는 기라. 최우연이 죽을 라고 차에 뛰어드는 바람에 운전자가 놀래서 다른 차를 박았고, 그래가 니도 사고가 났다 이 말이다. 멀쩡한 애 반 죽여 놨으니까 치료비는 받아야 될 거 아이가.”
“치료비?”
“내가 이래저래 손을 다 써놔서 돈만 받으면 되는데…… 이기 다 니 때문이다. 니가 막 싸돌아 댕기니까 기자들이 눈치 챈 거 아이가. 니 깨어났다는 소리 듣고 최우연 소속사에서 원래 준다고 했던 돈에 절반만 주겠다 안카나.”
피를 토하듯 말하는 박철호의 말에 우연은 헛웃음이 나왔다. 왜 사람들은 전부 우연을 ‘돈 벌이’ 대상으로만 보는 걸까.
“그러니까, 돈을 더 받으려면 나더러 정신이 나간 척을 하라, 이 말이에요?”
“그래. 그래야 돈을 다 받을 수 있다카이. 니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 아나? 니 대학 가고 싶다고 했제, 이번에 이 돈 받으면 니 대학 등록금 딱 대줄게. 공부해가 대학가라.”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부모를 봤나. 딸을 이용해서 돈이나 벌려고 하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사기까지 치려고 하네.
“대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알았다, 알았어. 딱 반반. 정확하게 반반 떼 줄게.”
“싫어요.”
우연의 싫다는 소리에 박철호는 하늘이 무너질 듯 절규했다. 그 와중에도 이한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다는 듯 휴대폰만 살필 뿐이었다.
“별아. 아부지 한 번만 도와도. 자그만치 돈 오천이다, 오천. 사고 한 번에 돈 오천이 어디서 나오노?”
박철호의 말에 우연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해졌다. 그 순간 비상계단에서 들었던 여자의 날카로운 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죽이라고 했잖아.’
그 목소리가 우연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그래.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해. 그 날 그 사고가 어떻게 된 건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좋아요. 그 돈 내가 받게 해줄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최우연 좀 만나게 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