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슬리는 여자
이틀 째였다.
공민은 생각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조그만 구슬방울이 달린 실 팔찌가 놓여 있었다.
그날 응급실 입구에서 쓰레기통에 팔찌를 박았던 공민은, 덕구를 시켜 다시 팔찌를 찾아오게 했다.
그리곤 이틀 동안 저 팔찌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였다.
덕구는 그런 공민을 보고 찝찝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뭐야 이 자식 이거, 변태 취향인가. 막 욕해주고 이런 여자 좋아하나? 그래서 악성댓글 다는 네티즌 그렇게 고소하자고 해도 안하는 건가.
“형. 준비해. 최우연한테 갈 거야.”
“으응.”
알겠다고 하긴 했지만, 덕구는 움직일 기미도 없었다. 벌써 이틀 째 간다고 했다가, 만다고 했다가 하루에도 마음이 열댓 번은 더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진짜 가는 거야?”
“갈 거야.”
“그냥 안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촬영도 없어졌고, 지난 번에도 거기까지 가서 이상한 여자만 만나서 기분 잡치고 왔잖아.”
“가.”
여전히 의심이 사그라들진 않았지만, 자동차 열쇠를 꺼내드는 덕구였다. 또 마음을 바꾸면
이번에는 아주 공민을 통째로 들고 옮길 생각이었다.
공민이 예상 밖의 말로 옆구리를 찌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가는 길에 송조이 집에도 잠깐 들러.”
“송조이 집은 왜?”
“병원에 같이 갈 거야.”
아,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덕구는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송조이는 뭐 하러 데려가?”
“그럴 일이 있어.”
있긴 뭐가 있다는 건지.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법이 없으니 덕구는 답답하기만 했다.
지난번이야 사고가 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으니, 어찌어찌 송조이를 태우고 병원까지 갔다고 치더라도 왜 굳이 다시 송조이를 데려가려고 하냔 말이다.
“야, 민아. 내가 몇 번이나 말 했잖아. 송조이랑 스캔들 터지고 일주일도 안 지났어. 너랑 송조이랑 나란히 최우연 병원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 너랑 최우연이랑 사귄 거 알 사람은 다 알아. 기자들이 기사를 안 터트린 거 뿐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덕구가 피를 토하듯 말을 토해내는 동안, 공민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날, 그 사고…….
언론에서는 이런 저러한 이유들로 우연의 자살처럼 사고를 몰고 갔지만, 공민은 어쩐지 우연의 사고가 꺼림칙하기만 했다.
그날 공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광고촬영 전체가 공민의 계획대로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고 파트너가 송조이에서 최우연으로 바뀌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현 스캔들 상대에서, 전 스캔들 상대로 체인지라.
누가 봐도 기가 막힌 파트너 선정이었다. 광고는 촬영이 진행되기 전부터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더러운 인간들. 그저 돈 되는 일이라면 제 엄마 속옷이라도 내다팔 인간들. 하여간 이 바닥 인간들은 하나같이 돈에 미쳐 있었다.
돈을 위해 트러블을 만들고 또 만들어 댔다. 하지만 공민은 돈독 오른 사람들의 트러블 메이커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네가 내 앞에서 옷을 벗는다 해도 이제 아무 느낌 없어.’
철저하게 계산된 대사였다.
공민은 이 한 마디면 우연이 절대 비키니를 입고 촬영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촬영은 연기될 것이고 언론의 질타는 우연에게 집중될 터였다. 광고주는 언론에 민감하니 파트너는 자연스럽게 바뀔 터였다.
모든 건 공민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그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민은 그 순간 우연의 모습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우연이 차로 가겠다며 일어섰을 때, 도로를 건너기 직전 뭔가를 본 듯 멈칫거리던 그 모습.
그리고 그 사고.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던 비명소리. 뭔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들.
사실 최우연이 자살을 하든, 사고가 나든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공민과 최우연의 관계는 철저히 계산된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공민에게 최우연은 신상 상품이었다. 그것도 한정판으로 나온 가장 핫한 상품.
너도 나도 최우연을 입에 담았다. 모두 가지고 싶어 했지만 쉽게 가질 수 없었다. 예쁜 얼굴이야 연예계에서 걷어 차이는 게 예쁜 얼굴이었지만, 바디는 달랐다.
얼굴이야 성형 몇 번과, 성형이나 다름없는 화장 기술이면 만들어지지만 몸매는 살만 뺀다고 만들어 지는 게 아니므로.
남자들이 커다란 가슴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무식한 생각이다. 남자를 그저 가슴에 미친 짐승쯤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어리석은 판단일 뿐.
남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기준으로 몸매를 평가했다. 적당한 가슴, 길게 뻗은 다리라인과 탱탱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 그리고 한줌에 잡힐 것 같은 허리.
살집이 너무 없어서도, 너무 많아서도 안되는 아주 까다로운 기준들.
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사람이 최우연이었다. 게다가 콧대 높기가 히말라야 같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그것이라면 공민의 여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공민은 늘 그랬듯 호기심에 우연에게 다가섰고, 늘 그랬듯 자신의 손에 들어온 뒤에는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끝.
분명 끝이 나야 했다. 하지만 우연의 사고는 자꾸만 공민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응급차가 도착하고 우연을 실은 차가 병원으로 출발하던 순간, 공민은 사람들 틈에 섞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송조이를 발견했다.
그날 송조이는 왜 촬영 현장에 있었던 거지? 어째서 매니저도 없이 숨어 있었던 걸까.
최우연이 그날 본 건 뭐였을까. 생각을 하고, 또 하면 할수록 공민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덕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공민은 송조이를 찾아왔다.
전화를 받고 나오긴 했지만, 사실 조이는 함께 병원에 가자는 공민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빠…… 저 꼭 가야해요? 사실 우연 언니랑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고, 병원까지 가는 거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조이의 말에 공민은 연기를 하듯 착한 얼굴로 되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최우연을 정리한 뒤로 공민이 공들이고 있는 여자가 바로 송조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 역시 최우연과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송조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였다.
연기를 하듯,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공민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어, 미안. 내가 네 생각은 못했어. 가기 싫으면 억지로 안 가도 돼.”
“미안해요 오빠. 우연 언니 보면 안부 전해주세요.”
사람이 너무 착하기만 해도 탈이지. 동료 배우들 사고 날 때마다, 아플 때마다 어떻게 일일이 병원을 찾아다녀?
공민의 본 모습을 알리없는 조이는 속으로 공민의 쓸데없는 친절함에 혀를 차는 중이었다.
‘너무 잘생기고 너무 근사하다 했지. 인기 많아, 연기 잘해. 집안 좋아. 뭐 하나 안 꿀리는 데가 없다고 했더니, 약점이 착한 거였네.’
밴의 창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자, 조이는 최대한 미안한 척 인사를 건넨 뒤 뒤돌아섰다.
그때 닫히던 창문이 멈추고, 공민이 조이를 불러 세웠다.
“아참. 근데 너 그날 거기 있었던 거 기자들한테 말해도 상관없지?”
“네?”
공민의 갑작스런 질문에 조이는 약점이라도 잡힌 듯 화들짝 놀랐다.
이 바닥에선 조그만 이야기도 크게 부풀려 펑하고 터져버리는 게 인기였다. 인기가 떨어지면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고로. 어떻게 해서든 쓸데없이 부풀려 질만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고 현장에 나도 있었잖아. 병원 가다가 기자들이 물으면 얘기해도 되나 해서.”
“오, 오빠.”
“난 여배우들 심리를 잘 몰라서 원래 그렇게 다들 ‘짤린 광고’ 촬영에 오고 그러나 궁금하기도 하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오빠, 그게요…… 저 우연 언니한테 광고 뺏기고 진짜 속상했어요. 언니가 촬영 거부하고 있다고 해서, 혹시라도 다시 나한테 기회가 올까봐. 그래서 거기 있었던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알면 조금 그런데…… 오빠. 말 안하실거죠?”
“아. 말하면 안 되는 거구나. 알겠어. 말 안 할게.”
하아. 공민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것도 잠시. 다시 공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야 미안.”
“아니에요. 아직 얘기 안했으면 됐죠. 뭘 그런 걸 가지고 사과를…….”
“아니 그거 말고.”
“네?”
“아까 안부 전해달라고 했잖아. 근데 최우연 의식불명이라 안부 못 전해 줄 것 같아. 그리고…….”
말끝을 흐리던 공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순간에 차가워진 얼굴에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안부는 네가 전해.”
검게 썬팅 된 창문이 곧장 닫혔다. 공민을 태운 차는 미련도 없이 미끄러지며 사라졌다. 조이는 한참을 그곳에 서 있어야 했다.
공민의 마지막 그 말투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이다.
*
“어, 형. 오셨어요? 여기까지 와주시고 감사해요.”
공민과 덕구가 왔다는 소식에 일용이 한 걸음에 달려왔다. 일용은 진심으로 공민이 고마웠다. 우연의 사고소식에 전화 몇 통이 오긴 했지만, 동료배우가 이렇게 직접 병실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감사는 무슨. 너무 늦게 왔지. 그날 사고 났을 때 바로 와봤어야 하는 건데.”
“아니에요. 그날 다 정신이 없어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병실 안에 손님이 좀 와있어서요.”
공민이 그렇게 말해주니 일용은 거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연은 죽도록 공민을 싫어했지만, 아무리 봐도 공민은 미워할 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손님?”
“아유 말도 마세요. 이상한 사람들한테 단단히 걸렸다니까요. 완전 막가파야 막가파. 내가 우연 누나 비위도 맞춰봤지만, 저런 사람들은 진짜 처음이에요. 우리 회사 실장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요.”
일용은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이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정을 구하던 박철호가 안면을 싹 바꿔서는 당당하게 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걸로 모자라, 다 죽게 생겼다는 딸은 멀쩡하다 못해 얼마나 성질이 고약한지.
정말이지 절로 최우연을 떠올리게 만드는 여자였다.
덕구는 그 여자와 아버지가 찾아와 깽판을 부리던 날을 떠올렸다.
“의사한테 물어봐요. 내가 제정신인지. 글쎄 내가 거울을 봤는데, 내가 누군지 못 알아 봤다니까. 내 나이 스물 셋에 거의 반쯤 미친 거지. 사고 나서 몸 망가져 머리 망가져. 이 몸으로 어디 가서 뭘 해먹고 살겠냐고, 내가.”
“이봐 아가씨. 아가씨가 뭘 착각하고 있나본데 그 사고 책임 우리한테 없어요. 우리도 피해자예요. 사고 책임은 승합차 운전자한테 물어야지. 우리가 보험사로 보입니까?”
엔터테이너먼트 회사 20년 째였다.
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이실장이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기라면 기고. 세상 더러운 꼴은 다 보고 견딘 20년 내공이 고작 젊은 여자와 아버지에 무릎 꿇을 리 없었다.
“다 죽어 간다고 해서 내가 조카 생각하는 마음에 병실도 일인실로 옮겨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병원 치료비에나 좀 보태 쓰라고 주려고 했더니, 이거 안 되겠네. 치료비고 위로금이고 다 없던 일로 해요.”
이실장의 신경질 적인 말을 마지막으로 끝.
여기에 누가 어떤 말을 더 붙일 수 있겠는가. 사고 책임이 없다는데, 따지려거든 사고 차량주인에게 하라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냔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달랐다.
“이봐요, 이실장님. 이건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잘못된 계약이었지. 사고 당한 건 난데 왜 이 사람, 우리 아버지랑 계약을 해요? 그리고 사고 운전자가 죽고 없는데 여기 아니면 내가 어디 가서 따져?”
“뭐, 뭐요?”
“뉴스 보니까 최우연 자살이 어쩌고 말들 많던데. 이거 최우연이 자살하려고 일부러 사고낸 거면 난 피해자, 그쪽은 가해자지. 오케이?”
“이 아가씨가 진짜. 자살은 누가 자살이래!”
“이실장님 또 멘탈 깨지는 소리 들린다. 진정해요. 누가 이실장님 돈 달래? 최우연 돈으로 해결하면 되잖아. 아직 미지급된 돈이 있는 걸로 아는데.”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냐며 뒷골을 잡던 이 실장은 ‘언론에 알려지면 좋을 거 하나 없다는’ 여자의 마지막 말에 꼬리를 내려야 했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 바닥을 아주 잘 아는 지독한 여자였다.
일용의 말을 모두 들은 덕구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최우연 사고 날 때 같이 사고 난 여자라고?”
“네. 그렇다니까요.”
“근데 그 사람이 최우연한테 미지급돈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요. 걸려도 진짜 단단히 걸린 거죠. 어디 사기꾼 집단 같더라니까요. 아휴, 불쌍한 우리 누나. 정신 잃고 누워 있는데도 다들 뜯어먹으려고 달려들기만 하고.”
일용의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의라면 질색인 덕구는 대체 어떤 여자가 양심도 없이 그딴 짓을 하는 건가, 호기심에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 저 여자!”
덕구의 짧은 외침에 공민의 시선이 병실 안으로 향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고 있는 여자를 확인 한 순간, 공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저 여자 그때 그 미친 여자 아니야?”
공민은 덕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짜증나는 여자였다.
왜 자꾸 튀어나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거야?
그의 시선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울고 있는 별과, 그런 별을 품에 안아 달래고 있는 이한에게 멈춰 있었다.
어째서 저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울고 있는데, 이토록 짜증이 나는 건지 공민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여자 뭐하는 여자인지 좀 알아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