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당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들.
“진짜가? 진짜. 그 돈을 다 준다카드나?”
“속고만 사셨나. 그렇다니까요.”
우연의 말에 박철호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사정을 하고 울고 빌고, 협박을 일삼아도 안 주다던 돈을 어떻게 며칠 만에 쏙 뽑아냈을까.
“우예 받았노?”
“뭐, 그냥. 몇 마디 하니까.”
사실 우연이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몸’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몇 번 찾아갔을 뿐이었다.
거기서 늘 그랬든 이실장과 일용을 부려먹고, 죽은 듯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향해 대성통곡 몇 번을 했다. 그게 다였다.
“아오! 저, 저 징그러운 여자 또 왔어? 아니, 자기가 뭔데 우연이 붙잡고 우는 건데? 지가 우연이 부모야, 가족이야? 왜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서 저러는 건데.”
“실장님 저도 미치겠어요. 어떻게든 해보세요. 저한테 막 이래라 저래라 한다니까요. 절 자기 매니저처럼 굴린다고요.”
결국, 사흘째 되는 날 이 실장이 항복을 선언했다.
매일 같이 이상한 여자가 찾아와 최우연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한다는 소문이 나기 전에 해결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최우연이 다시 돌아온 듯한 까칠함도 한 몫 하긴 했지만.
뭐가 어찌됐든 박철호의 입장에선 돈만 주면 뭐가 어찌됐든 아무 상관없었다. 어리숙할 정도로 착하기만 했던 딸이 한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도 눈여겨보지 못할 만큼.
“근데 퇴원은 와 할라고 하는데? 돈 받기 전까진 여기 있어야 하는 거 아이가.”
“노우. 모르시는 말씀. 퇴원하는 조건으로 받은 돈이에요.”
어째서 별이 퇴원을 하면 그 사람들이 돈을 준다고 한 걸까? 박철호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뭐 어떠랴. 돈이 나온다는데.
“하기사. 병원에 내 누워있으면 돈만 더 나가지. 뭐 우째됐든 돈은 확실하게 준다했제?”
“이번 주로 입금해주기로 했어요. 퇴원 수속만 밟으면 되구요.”
우연은 마치 죽은 듯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떠올렸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다.
의식불명상태.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으며,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네 몸을 되돌리지 않으면 넌 영원히 그 몸에 갇히게 돼. 네 몸에 들어간 그 아이는 너 대신 죽게 될 거고 말이야.’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우연은 자신의 몸에 대신 들어가 있는 별의 손을 잡고 맹세했다.
‘걱정하지 마. 전부다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니까. 우릴 이렇게 만든 그 사고 내가 반드시 알아내고 말거야.’
계획된 사고, 우연한 일로 바뀌어버린 몸.
우연은 마음을 다 잡고 또 다잡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라믄 마 서두르자. 시간 끌거 뭐 있노. 내가 금방 퇴원한다고 간호사들한테 말하고 올게.”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박철호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우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누구도 믿지 않을 황당한 일지만, 어쩌면 그 일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우연의 눈이 한 사람으로 인해 반짝였다.
모델처럼 길게 뻗은 다리, 넓은 어깨는 아무렇게나 걸친 티셔츠 한 장도 명품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뜨거운 여름 태양 빛을 그대로 받아도 거울에 반사된 것 마냥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까지.
그는 커피를 사들고 병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박이한이었다.
이한을 보는 순간 우연은 마음이 바빠졌다. 거울이 어디 있더라, 비비는 못 발라도 이거 립밤이라도 발라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사람 꼴이니, 짐승 꼴이니. 미친다 진짜.”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허옇게 말라붙은 침 자국, 우연의 병실에 갈 때마다 운 덕분에 퉁퉁 부은 눈은 완벽한 ‘초췌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비친다는 건 볼 때마다 낯설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박별이 아니라, 최우연이였으면 이정도로 고민은 안 해요. 이게 뭐니. 여자 입술이 다 부르터가지고.”
급한 대로 물을 축여 입술을 촉촉하게 만들고, 부스스한 머리를 눌러 잠재웠다. 박 별의 가방에는 도무지 파우치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우연은 빠르게 가방을 뒤적이며 중얼댔다.
“얘는 나이도 어린애가 어떻게 가방 안에 립밤 하나가 없어?”
그나마 핸드크림 하나를 발견한 우연은 어이가 없었다.
얼씨구, 꼴랑 핸드크림? 그것도 냄새 한 번 유치하네. 이게 뭐야, 딸기우유 향? 아니 손에 딸기우유 향은 왜 발라? 손에 우유 쏟은 것처럼 찝찝하게.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인위적인 향이 있는 거라고는 딸기우유 향 핸드크림이 전부인 것을.
우연은 잔뜩 신경질을 부리며 손과 목에 향수 대신 핸드크림을 발랐다. 유치하든, 찝찝하든 어쨌든 안 씻어서 꼬질꼬질한 냄새보다는 딸기우유향이 훨씬 나을 테니까.
달칵.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우연은 이한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다른 건 못해줘도, 이 몸에 있는 이상 딱 하나는 해준다. 우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이 귀엽고 섹시한 남자와 반드시 ‘연인’ 사이로 만들어 주겠어!
“오빠 왔어…… 뭐, 뭐야 당신.”
이한을 맞을 준비에 해맑게 웃고 있던 우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다. 박이한이 들어올 거라 예상했던 병실 문 앞에 공민이 서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인사를 건네진 않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창 넓은 모자를 쓴 공민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하, 그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인사하는데요?”
“주로 날 보면 ‘꺅’하지. 아니면 넋을 놓거나.”
꺅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저걸 확 그냥, 뒷목을 쳐서 꺅 하게 만들어줘? 우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볼일이 있으니까.”
“웃겨 진짜. 당신이랑 내가 볼 일이 뭐가 있는데?”
“퇴원 한다며.”
“아, 그래서 나 퇴원하는 거 축하해주려고 오셨구나. 역시 선행천사 답다. 한 번 오가다 만난 사이인데 퇴원까지 신경 써 주시고, 대단하네. 근데 내가 저번에 말 안 했었나? 나한테 가식 떨 필요 없다니까. 나 너 이중인격인 거 다 알아.”
우연은 잔뜩 빈정대며 공민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여간 저 자식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요, 구석이. 가식 덩어리 이중인격자! 퉤.
인상을 써가며 투덜대는 우연의 얼굴을 앞으로 공민이 팔찌를 꺼내 보였다. 작은 방울이 달린 실팔찌였다. 구슬이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우연은 팔찌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조잡한 실로 엉키듯 만들어진 그 팔찌. 이게 왜 공민한테 있는 거지?
“어, 이거…….”
우연이 손을 뻗어 팔찌를 잡으려 했다. 그 순간 공민이 입을 열었다.
“1995년 4월 8일생. 올해 나이 스물 셋. 이름 박별. 최종학력 고졸. 사고 전까지 편의점과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함. 아버지 박철호는 사기 전과 3범에 현재 뚜렷한 직업 없음.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소는 서울시 마포구…….”
“뭐하는 건데?”
우연의 눈이 매섭게 공민을 노려보았다. 공민 역시 지지 않았다.
“네 정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최우연 뜯어먹는 짓 그만해. 어쩌다 사고 같이 난 걸로 구질구질한 네 인생 좀 바꿔 볼 생각인가 본데, 그깟 돈 몇 천으로 네 인생 안 변해.”
어떻게 알아낸 걸까. 일용이에게 들었나? 아니 그것보다, 다른 사람 일이라면 불이 났다고 해도 무관심한 이기주의자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당신하고 상관없는 일이잖아.”
“상관있다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하는 공민을 보며, 우연은 한 달 전쯤 공민에게 걷어차이던 그 치욕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공민은 저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을 깔보듯 내려다보며,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그 짜증나는 표정.
“난 내가 한번이라도 건드린 물건에 다른 사람 손때 묻는 거 싫어하거든.”
“이거 완전 개자식이네.”
공민의 대답은 우연의 머리를 핑 돌게 만들만큼 화나게 만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물건?
“단물 다 빨아먹고 껌 뱉듯 버릴 땐 언제고, 뭐 물건? 왜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불쌍하디?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거지같이 걷어차진 말걸 후회 돼? 어이가 없어서 진짜. 남이사 최우연 돈을 빼먹든 간을 빼먹든 네가 알 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한 쪽 입꼬리만 올라가 있던 공민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공민이 우연을 찬 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연의 매니저 일용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최우연이 말했을 리 없었다. 차였다는 건 최우연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 일이니까.
근데. 이 여자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공민은 우연의 팔을 잡아 자신의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우연은 공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손목에 힘을 줘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공민은 더욱 힘을 줘 우연을 잡았다.
“묻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정적이 흘렀다. 의심과 혼란으로 가득 찬 공민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우연은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그 손 좀 놔 주시죠.”
박이한였다. 이한은 공민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잡으면 우리 별이 아플 거 같은데.”
‘우리’ 별이? 이한과 눈이 마주친 공민은 그의 얼굴을 곧장 기억해 냈다. 최우연의 병실에서 울고 있는 박 별을 달래주고 있던 그 남자였다.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들이 그러하듯, 남자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을 때 촉각을 곤두세우는 법이다.
둘 다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공민과 이한이 같은 공간에 있는 그 순간부터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는 법.
세상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을 때 다르게 행동하는 세 부류의 남자가 있다.
하나는 시비를 걸어 상대의 존재를 깔아뭉개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꼬리를 내리는 남자, 그리고 마지막은 철저하게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남자였다.
“괜찮아? 어디 봐. 손목에 멍들겠다. 많이 아파?”
이한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남자였다. 이한은 마치 공민 따위는 본 적도 없다는 듯 굴었다. 오로지 별에게만 말을 걸고, 공민에게는 철저하게 등을 진 상태였다.
우연은 이한에게 손을 맡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공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은데.”
“괜찮긴. 빨간데. 아저씨는 어디가고, 너 혼자 이러고 있어?
‘너 혼자’라.
철저하게 공민을 무시하는 이한였다. 공민은 태어나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투명인간 취급에 어이가 없다 못해, 주먹이 절로 쥐어지던 참이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병실 문이 열렸다.
“내가 퇴원을 한다고 하믄 하는기지, 뭔 말이 그래 많노. 으잉? 이기 다 뭐꼬.”
궁시렁대며 들어오던 박철호는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누꼬. 가만 있어보자. 어디서 봤는데.”
박철호가 얼굴을 들이밀며 바라보자 공민은 모자를 숙여 얼굴을 감췄다.
“맞네. 영화배우! 그, 이름이 뭐드라.”
“실례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공민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박철호는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사태파악이 전혀 안 되고 있었다.
“야! 박이한. 니 내가 우리 딸 몸에 손대지 말라 했제.”
이한이 별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본 박철호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한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별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왜 너한테 그런 식으로 구는 거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당연히 물어야 될 질문이었지만 별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이한은 질문을 삼켰다.
대신, 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한 말을 남길 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해.”
*
이한이 말하는 ‘무슨 일’은 어디까지 포함하는 걸까. 퇴원해 보니, 집이라고 데려간 곳이 영화 속에나 봤던 불우한 이웃의 집과 비슷하게 생겼다면 그건 ‘무슨 일’에 포함되는 걸까?
“여, 여기가 집이라고요?”
“와? 기억이 쪼매 나나?”
기억이 날 리가 있나. 설사 기억이 난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억은 다시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은 집이었다.
족히 삼십년은 더 된 다세대 주택이었다.
그것도 주택이 아니라, 주택의 옥탑방이 별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우연은 얼굴을 반쯤 찌푸린 채 옥상을 둘러보았다.
페인트칠이라고는 단군할아버지 시절에 마지막으로 했다는 듯 벗겨진 페인트, 청소라고는 존재 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외관. 보안이라고는 전혀 안 되는 낡아 빠진 유리문까지.
심지어 방 한칸짜리 단칸방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냈다고요? 그쪽, 아니 그러니까 아버지랑 나랑 단 둘이?”
“원래는 니 혼자 살았지. 내가 사정이 쪼깨 있어서 지방에 좀 다니느라. 흐음. 뭐 걱정할 거 읎다. 인자 아부지가 돈 나올 때까지는, 아니지. 하여간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같이 있어 준다니. 그것 참 더 걱정이네요. 이쯤 되면 아무래도 ‘무슨 일’에 해당될 것 같긴 한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나는 이런 낡고 오래된, 무엇보다 더러운 집에 낯선 아저씨와 지낼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뭐하노 안 들어오고.”
끼이이익
박철호가 문을 열자, 처녀귀신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소름 끼치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무슨 일’ 맞는 거 같은데.
우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곤 귀신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한 달을 내딛던 그 순간,
“바, 바퀴벌레!”
“아이고, 고놈 어지간히 크네. 이게 밖에 사는 바퀸가베.”
“꺄아악!”
못살아. 못산다고. 이건 확실히 ‘무슨 일’이야. 아니 무조건 무슨 일이여야만 해.
딱 한발이었다.
현관문 너머로 딱 한 발 들어간 우연은, 단 한 발만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저기, 나 휴대폰 좀 빌려줘요.”
“휴대폰은 와?”
박철호가 사기 3범이라고 했던가. 사기꾼을 움직이게 하는 건 돈이었다. 하지만 돈이 없다면? 그럼 없는 돈을 있게 만들면 되는 거다.
“내가 방금 뭐가 생각이 났는데. 모아 놓은 돈이 좀 있었던 것 같아.”
“도온?”
아니나 다를까 돈 얘기에 박철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단 휴대폰부터 줘봐요. 확인 좀 해봐야겠어.”
박철호의 휴대폰을 뺏어든 우연은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탔다. 그리곤 곧장 이한에게 전화를 걸어, 손쉽게 그의 집주소를 알아 낼 수 있었다.
여기에는 10년 가까운 연기경력과 완벽에 가까웠던 연애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전화 걸기. 그 다음은 그냥 몇 번 울먹이면 상황 끝.
이 전화 한 통이면 남자가 바로 달려오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자를 오게 할 순 없고 우연이 직접 가야 했으므로 끝에 조금 덧붙일 필요가 있었다.
뭔가가 떠올라 무작정 걸었다. 근데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병원에 나온 뒤로 보이지 않는다. 뭐 이런 식이지.
“오빠. 나 지금 택시 탔는데…… 어디서 내리면 돼?”
경쾌하게 택시 문을 닫은 우연은 오피스텔을 바라보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박 별이 살던 옥탑방을 보고 나서는, 혹시라도 박이한의 집마저 ‘그런’ 상황이면 어쩌나 염려 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번듯한 오피스텔이라니. 이 정도면 뭐, 잠깐 지내기엔 충분하지.
이 실장한테 돈 받으면 곧장 집부터 구할 예정이니, 길어야 일주일. 딱 일주일만 살면 됐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서른 살 최우연이 아니라, 스무 셋의 박 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무 세 살에게 동거는 생각보다 큰 일이 될 수 도 있었다.
남의 몸이라고 막 함부로 쓰고 그러면 안 되는데. 괜찮겠지?
우연은 다시 박이한을 떠올렸다.
얼굴 완벽해, 몸매 착해, 성격 좋아.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별을 짝사랑하기까지 한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게다가 귀신과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집에서 지내는 건 건강과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어쨌든 박 별은 방금 퇴원한 환자니까. 하지만……
오피스텔이면 방이 있나? 원룸이면 한 침대를 써야할 수도 있잖아. 그러다 보면 다 큰 성인 남녀가…… 다 큰 남자와 여자가 한 집에 지내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게, 어떻게 보면 이상한 건데. 남의 몸으로 그래도 되나…….
에이. 설마. 박이한이 막 억지로 그러고 그럴 사람은 아닐 것 같던데. 공민이라면 모를까.
공민이 들짐승이라면 박이한은 신사지. 신사. 잠깐. 근데 공민 그 개자식은 왜 생각하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우연은 죄책감을 덜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보다 발걸음이 더 가벼울 수는 없었다.
띵동-
전화를 해 놨으니 내가 온다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 안 쪽에서 공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연은 혼란스러운 환자인 척 연기를 하면 그만…… 흐읍!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우연은 숨을 빨아 당긴 채 내뱉을 줄 몰랐다.
막 샤워를 마친 듯,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에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왔어?”
보너스로 눈웃음 한 방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입이 바짝 타들어 가고, 스무 세살의 몸에서 자꾸만 서른 살의 여자가 기어 나오려고 했다.
그것도 ‘밝히는’ 여자의 영혼이.
아니! 내가 아니라 이 자식이 응큼한 거라고. 세상에 어떤 여자가 저런 남자가 헐벗고 있는 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냐고.
별이 이곳으로 올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 저러고 있다는 건 박이한야 말로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면 뭐겠냐고.
그래. 남자는 다 똑같은…….
“자기, 누가 왔어?”
그 순간 우연의 생각과 마음을 깡그리 무시하고, 짓밟아버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이한의 뒤에서. 샤워가운을 걸친, 헐벗은 여자가.
“응. 아까 내가 말했던 동생.”
우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헐벗은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이한의 목소리가 우연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