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씨, 괜찮습니까?”
동원은 준성의 팔을 비틀어 등 뒤로
돌린 다음 세게 잡고 있었다.
그리고 시인에게 물었다.
시인은 동원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네, 괜찮은 것 같네요.”
“시인씨 눈앞에서 치워줄 수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고마워요.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동원은 준성을 잡은 채로 폰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에 전화를 하니까 5분도 채 되지 않아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왔다.
차가 멈추더니 무서운 인상을 가진
남자가 내렸다.
“누구 치우라고? 이 분?”
“이 분 부산 가신단다. 오늘 안에 해랑도에서 치워야 하는데 동해랑도 여객선터미널까지 좀 부탁한다. 고맙다. 한 잔 살게.”
“니가 우리 새끼들 좋아하는 연예인 싸인 받아 주는 게 어딘데! 이런 일쯤 식은 죽 먹기지. 저기요? 알아서 타시겠어요?”
준성은 시인과 동원을 노려보더니
차에 타며 문을 쾅 닫았다.
“보니까 여기 여성분 놀라신 것 같은데 법적으로는 처리 안 해도 되겠나?”
동원이 시인을 쳐다보았다.
시인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치워만 줘. 고맙다.”
준성이 탄 차가 출발하자 시인은 힘이 쭉 빠졌다.
“아까 그.. 분.. 혹시 무서운 뭐.. 폭력.. 그런 분인가요?”
“왜 걱정됩니까?”
“영화처럼 바다에 빠뜨린다거나.. 그러시는 거예요? 저 사람 여기 온 거 사람들이 다 알텐데.. 우리 알리바이도..”
시인의 상상속에서 준성은
엄청 끔찍한 일을 당하는 모양이다.
“시인씨.. 무슨 생각 하는 겁니까? 아까 그 친구 경찰입니다.”
“아..”
“그냥 정말 실어다 줄 겁니다.”
시인은 한숨을 쉬었다.
“휴.. 완전 부끄럽네요. 저렇게 돌변할지 몰랐어요. 내가 당연히 자신을 받아줄 줄 알았나 봐요...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한테 부끄러워서 어쩌죠?”
시인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데
동원이 시인의 팔을 잡았다.
“봅시다. 빨갛게 손자국이 남았네요. 안 아픕니까?”
“아픈 줄 모르겠어요. 정신이 없어서..”
“자고 일어나면 아플 겁니다. 따뜻한 물에 찜질하고 푹 자세요.”
“......”
동원은 말을 멈추고 잠시 시인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저는 서울 갑니다. 다음 드라마 촬영이 있어서요.”
“네..”
“한참을 못 볼 것 같습니다.”
“......”
“데려다줄 테니 올라갑시다.”
동원은 앞장 서 걸었다.
시인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너무 피곤했다.
“그럼 다음에.. 다음에 봅시다.”
“네.. 가서 쉬세요. 오늘 여러모로 고마워요. 또 고맙다고 말할 일이 생겼네요. 그럼..”
시인은 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시인씨!”
시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지만.. 보고 싶을 겁니다.”
동원이 대문을 닫아 주었다.
그렇게 시인의 지난 사랑이 완전히 떠났다.
산길을 올라가는 동원은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왔다는 걸 알았다.
어느 새 꼭대기에 도착했고
홀로 서 있는 해송 곁으로 다가갔다.
“연수야.”
동원은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연수야.. 나 이제.. 너 떠나보내야겠다.”
동원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동원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무를 쓰다듬었다.
연수를 바람에 날려 보냈던 곳.
기대어 울었던 그 나무.
연수가 되어버린 그 나무에게
이제야 작별 인사를 하는 동원이었다.
“너 만나서 사랑했던 것 행복했다. 연수야, 부디 그 곳에서 평안해라.”
쓸쓸한 눈빛으로 나무를 쓰다듬던 동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나, 이제 그녀에게 가야겠다.”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
동원도 옛사랑과 그렇게 이별하고 있었다.
시인은 방에 들어와서 쓰러지듯 누웠다.
팔은 욱신거렸고 많이 걸었는지 다리가 무거웠다.
동원의 품에서 눈물짓고 준성이 자신을 찾아오고..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보고 싶을 겁니다.”
동원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그 말에 준성과의 끔찍한 만남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시인을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가방을 열고 얼른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거울을 보는데
예쁘게 묶었던 머리가 다 풀어져 있었다.
“내 머리핀이 어디 갔지?”
아끼던 머리핀이었다.
시인은 옷을 벗다 말고 다시 껴입기 시작했다.
얼른 밖으로 나가 선착장까지 땅을 보고 걸었다.
길에는 핀이 보이지 않았다.
동원의 배가 묶인 곳으로 가서 배에 들어갔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반짝거리는 핀은 보이지 않았다.
“똥도에 가서 물건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져요.”
불현듯 경철의 말이 시인의 머릿속을 울렸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나 요즘 사랑하는 사람 없잖아.”
혼잣말을 하며 터벅터벅 집으로 올라왔다.
계속 동원이 생각이 났다.
연수가 똥도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바다에서 빠뜨렸나봐.”
똥도에서 핀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불안했다.
안 믿어도 될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시인은 그런 경험을 굳이 하지 않기를 바랐다.
서러웠다.
시인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시인씨.. 여기는 왜.. 시인씨 웁니까? 무슨 일이예요?”
시인은 고개를 들었다.
동원과 만났던 해송이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걸었구나.
동원을 보자 울음이 터졌다.
“작가님.. 흑.. 나 머리핀이 없어졌어요. 흑.. 똥도에서 잃어버렸나 봐요. 엉엉엉.”
시인이 동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 또 사랑이 안 이루어지려나 봐요. 흑흑흑.”
한 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동원은 말없이 시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동원은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든
시인의 얼굴에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내가 찾아 줄게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정..정말요?”
훌쩍거리는 시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둘은 서로의 눈빛을 깊이 바라보았다.
저 눈 속 깊은 곳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내 자리가 있을까?
시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동원의 입술이 아직 울음 그득한
시인의 입술에 포개어졌다.
차가운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오고갔다.
멈출 수가 없었다.
둘의 첫 키스였다.
슬프고,
뜨거운.
그래서 더 불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