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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사랑
작가 : 삼송이
작품등록일 : 2017.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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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K(上)
작성일 : 17-06-29     조회 : 242     추천 : 1     분량 : 7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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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후에 사랑 >

 2화: 상담사 K(上)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나는 트라우마 센터 정문에 우두커니 서서 붉은 석양을 받으며 여기서 그만두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미련이 생겼다. 열기가 빠진 여름 바람이 가로수를 툭툭 건드리고, 시멘트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모습을 보면서. 혈관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궁금증을 느꼈다.

  만약에 내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민등록증을 말소시키고, 호적에서 유일한 자식의 존재를 지운 뒤 내팽개치실까. 아, 잠깐 혹시 이미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일말의 작은 손해조차 혐오스럽게 생각하시는 아버지를 거스른 적이 있었나. 있었다면 왜? 언제? 무엇 때문에? 순금을 두른 아버지의 자존심이 우수수 무너질 만한 엄청난 사건이 무엇일까? 그것보다 왜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거지? 아무리 엄하셔도 내 부모님인데. 연쇄 살인마에게 붙잡힌 여자처럼 아득한 공포를 느끼는 이유가 뭐지, 진짜 왜 이러지.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눈동자는 죽기 직전의 붕어같이 동그랗게 벌어져서 어디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허리 밑으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가 몸 안의 수분을 죄다 빨아들이는 착각이 들었다. 끔찍한 갈증이었다. 위 안은 점점 요동쳤다. 마치 장미 넝쿨을 통째로 삼긴 것처럼 따갑고 쓰라렸다. 약이 필요했다. 후유증으로 인한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 희고 커다란 알약을 꾸역꾸역 삼켜야 했다.

 

 01

 

 “ 사라 씨! ”

 

 어디선가 노아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단정한 의사 가운이 보였다. 누런 래브라도 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 박사님… ”

 “ 사라 씨, 괜찮으세요? ”

 “ 아, 약이 필요한데, 제가 약이, 발작이… ”

 

 나는 쩍 하고 갈라진 입술로 최대한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까지 말할 순 없었다. 근 한 달 만에 아버지를 만났으나, 너무 무서운 나머지 현관문을 열 때부터 멀미가 났고. 약통을 챙겨오는 것조차 잊어버렸으며,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줄 알았다고. 또,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물에 젖은 생쥐마냥 발발 떨다가, 뇌세포들이 불규칙적으로 꼬여서 발작이 올 것 같다고. 주절주절 떠들어 댈 시간이 없었다. 나는 지옥으로 향하는 미끄럼틀 위에서 스르륵 떨어지는 중이었다.

 

 “ 회장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

 “ 예? 아버지요? 아버지가… ”

 

 노아 박사가 슬며시 내 허리춤을 잡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 휘청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아마 이대로 물 흐르듯 그의 사무실까지 가겠지. 마음이 놓였다. 그의 눈앞에서 약을 먹고, 한편에 놓인 접이식 침대 위에 몸을 누비는 상상을 했다. 벌써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시야가 불투명해지고, 발목의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졌다가 조여지길 반복했다.

 

 “ 회장님이 뭐라고 하셨다고요? ”

 “ 그니깐, 어, 아버지가, 상담사를… ”

 “ 역시. ”

 

 의식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와중에 노아 박사의 표정이 보였다. 조각난 햇빛을 받으며 시커멓게 그늘진 그의 얼굴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평소와 달랐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몸을 부풀린 고양이처럼 동공을 길게 찢은 채 웃고 있었다. 아버지와 비슷했다.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만나라고 했어요. ”

 “ 네? ”

 “ 상담사를 만나라고… ”

 

 읔, 괴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딘 앞니가 번들번들한 분홍색 살갗을 도려내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천천히 스위치를 내리는 몸뚱이를 어떻게 하고 싶었다. 쓰러질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 회장님이 그러실 리가 없을 텐데. ”

 

 노아 박사는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를 아무렇게나 나돌아다녔다. 그리고 점점 잘게 부서져서 싹 사라졌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푸른색이고, 강물은 계속 흐르고, 계절은 변하는 것처럼.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알 수 없는 이치에 따라 본능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턱 밑을 콱 부여잡고, 요동치는 심장을 무시했다.

 

 “ 아뇨, 만나라고 하셨어요. 그 상담사를 ”

 

 02

 

  집에 돌아오자마자 구두만 덜렁 벗어두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이 아주 개운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거짓말을 한 것 치곤 상태가 좋았다. 아니, 후유증 치료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좋은 컨디션이었다. 어쩌면 오늘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무식한 알약이 비좁은 식도를 뚫고, 위벽에 부딪히며 요란스럽게 소화되는 과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아, 정말 좋다. 편안하다. 나는 가볍게 몸을 돌려 창밖의 야경을 보며 소소한 자유를 즐겼다. 휴대폰이 쫑알대기 전까지는.

 

 “ 전화가 왔습니다! ”

 “ 누구 전화야? ”

 “ 발신자는 ‘노아 박사’입니다. ”

 

 그의 이름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낮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과 노아 박사의 표정, 무심결에 튀어나온 거짓말. 이런저런 장면들이 부레옥잠처럼 둥둥 떠다녔다. 아차, 싶었다. 지금의 평화가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 연결해줘. ”

 

 나는 이부자리를 매만지며 여러 가지 추측을 했다. 노아 박사가 아버지에게 한 번 더 확인해 봤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깐. 어설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꼼꼼히 살펴봤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전화가 나를 추궁하는 자리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는 물론 아버지까지 설득할 수 있는 제안을 해야 할 텐데…. 그럴듯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전화가 덜컥 연결됐다. 나는 주물럭대던 베개 모서리를 꽉 쥔 채 기척을 살폈다.

 

 “ 여보세요? ”

 “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려고 전화했어요. 사라, 약은 먹었어요? ”

 “ 아, 약이요. ”

 

 젠장, 창자 깊은 곳에서 욕지거리가 스믈 올라왔다. 오늘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기야 대낮부터 발작을 일으킨 전과가 있었다. 나는 침대 협탁에 올려둔 약통을 쏘아보면서 생수병을 잡았다. 빌어먹을 알약이 식도를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세 모금 정도 물을 들이켠 후, 약통을 뒤적거렸다. 노아 박사는 덜거덕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를 기다렸다.

 

 “ 약 먹는 걸 잊지 마세요. 치료가 끝나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아 박사가 원하는 대로 약 무더기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삼키면 될 일이다. 그런데 목젖이 쇠몽둥이마냥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입 구멍은 점점 오그라들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후유증약을 1년간 복용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볼썽사나운 여드름이 나거나, 갈증에 시달리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입 안이 마비된 적은 없었다. 나는 도저히 약을 삼킬 수 없어서 슬그머니 휴지에 뱉었다.

 

 “ 제대로 먹은 거, 맞죠? ”

 

 노아 박사는 재차 확인했다. 역시 이 정도의 치밀함과 예민한 감이 있어야지 신경외과 의사가 될 수 있구나. 나는 새삼 그의 탁월한 능력에 감동했다. 도로를 장악한 CCTV처럼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의 자질을 칭찬하며, 거짓말을 했다. 벌써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 네, 전부 다 삼켰어요. 하나도 빠짐없이. ”

 “ 좋아요. 오늘처럼 발작이 일어난 날은 더 신경 써야 해요. ”

 

 나는 휴지로 뒤덮은 알약을 바라보며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양심의 가책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거짓말에 익숙해진 모양인지, 아까처럼 심장이 요동치거나 척추가 서늘하게 식는 느낌마저 없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악스러운 오토바이에 올라탄 사람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 그리고, 음…. 상담사 문제는… ”

 

 꿀꺽, 마른침이 오만가지 감정과 뒤엉켜서 느리게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노아 박사가 상담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주기를. 하다못해 그가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대신 읊어주는 게 아니기를. 제발 내가 한 거짓말이 간단하게 마무리되고, 흔적 없이 사라지기를. 구구절절 빌었으나, 과거를 후회하진 않았다. 대낮에 한 거짓말은 어쩔 수 없었다. 운명이 던진 괴상한 변화구에 내 영혼을 넣었을 뿐이다. 물론 아버지와 그는 공감하지 않겠지. 나는 구두 자국이 난 발끝을 처연하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 일정이 잡혔어요. 내일 정오입니다. ”

 “ 맙소사…! 그 말은, 제가 K를 만날 수 있단 거죠? ”

 

 노아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나는 원하는 말을 들었다. 딱 한 번의 가벼운 긍정, 그 이상은 과분했다. 나의 치료를 도와주었던 사람을 만나서 감사를 전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 단, 저와 함께 가는 겁니다. 혼자서는 안돼요. ”

 “ 알겠어요, 박사님과 함께 갈게요. ”

 

 나는 금방 받아드렸다. 평범한 하루를 나의 몫으로 남겨둘 수 없고, 매 순간 두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어엿한 성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를 통째로 상납해야 한다는 사실, 모두 이해했다. 어차피 나는 교통사고가 난 이후부터 덜컥 멈춰있었다. 열아홉 살에서 더 자라지 않았다. 내 젊음은 얼어붙은 시간 속에 갇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니깐 나는 진즉에 자존심을 싹 내다 버렸고, 이까짓 알량한 간섭 정도는 짜증 나지도 않았다. 죄다 괜찮았다.

 

 03

 

  잠을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나는 막연한 행복과 긴장감으로 밤새 뒤척거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핸드폰 알람보다 10분 빨리 일어나서 샤워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줄기들이 둥근 어깨에 부딪혀 아래로 떨어지면서 가슴과 허벅지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곧게 뻗은 소나무처럼 몸을 반듯이 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K를 생각했다.

  상담사 K는 어떤 사람일까. 분명 부업으로 시나 소설을 쓰고 있을 거야. 그래 확실해. 그는 자신이 고른 단어로 여러 가지 문장을 쓰면서 책 한 권을 만들었을 거야. 빈틈없이 꽉 찬 위로를 담은 책. 아, 그를 빨리 만나고 싶다. 그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도 좋아. 비록 아버지가 보낸 돈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지만, 그 혹은 그녀가 보낸 메일을 처음 읽었을 때. 어쩐지 나만 가질 수 있는 뭔가가 생긴 것 같아서 기뻤어.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들출 수 없는, 나만의 견고한 은신처가 생긴 기분이었지.

  나는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마음을 침착하게 설명하는 연습을 하면서 화장을 했다. 평소처럼 연한 베이지색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닳고 닳은 섀도우까지 바른 후 거울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았다. 무난했고, 늘 보던 얼굴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별안간 화장대 맨 밑 서랍을 열어서 비닐을 벗기지 않은 새 화장품들을 꺼냈다. 진한 립스틱과 립글로즈, 화려한 섀도우들, 사용해 본 적 없는 색깔의 아이 브로우, 마스카라, 여러 종류의 인조 속눈썹 등등. 곤충 채집하듯 꼼꼼히 모아온 것들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 좋아, 오늘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한번 써보자. ”

 

 낯선 화장을 했다. 약의 부작용으로 생긴 여드름은 모른 척 무시했다. 또, 케케묵은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간만에 치마를 꺼냈다. 낮은 단화 대신 하이힐을 골랐고, 먼지 낀 향수병을 기어코 집어서 슬쩍 뿌려보았다.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모든 것을 시도한 뒤, 현관문 앞에 서서 한 번 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과해 보이나, 부담스럽게 생각할까. 아니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완벽한 시작이었다.

  노아 박사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 5분은 늦은 모양이다. 나는 부랴부랴 뛰었지만 높은 구두를 신고 나온 까닭에 제대로 속도가 나지 않았다.

 

 “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

 “ 아니요, 괜찮아요! 천천히 와요! ”

 

 노아 박사가 소리쳤다. 그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르치며 나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나는 덥다 못해 따가운 여름 햇빛을 뚫고 그의 입 모양을 자세히 살폈다. 넘.어.지.겠.어.요. 그는 내 그림자가 자신의 다리에 닿을 때까지 연신 입을 오물거렸다. 조.심.해.요. 걸음마를 막 뗀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 오는 동안 꽤 더웠죠? ”

 “ 박사님이야말로. 저 기다리시느냐 더우셨을 텐데. ”

 “ 저는 더위를 잘 안 타요. ”

 

 나는 노아 박사의 축축한 인중을 보았다. 그리고 땀에 젖어서 투명하게 빛나는 하얀 셔츠를 보면서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온도를 알 수 없는 불길로 가득한 그의 시퍼런 눈동자, 그것은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정신이 오락가락할 무렵이었고, 뜨거운 햇볕이 살갗을 베어버릴 듯 내리쬐던 순간이었다. 가뜩이 시야도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고, 이성은 마구 꼬였기 때문에 오해하기 좋았다. 그는 원래 친절한 사람인데, 나 좋을 대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 그런 것 같다. 나는 그를 따라 트라우마 센터 복도를 거닐며 어제의 기억을 대충 마무리 지었다.

 

 “ 사라 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

 

 노아 박사가 가리킨 것은 좁은 방 가운데 놓인 싱글 소파였다. 소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티 테이블, 서랍장은 물론 창문 하나 없었다. 하다못해 벽지도 없었으며, 만들다 만 건물처럼 거친 시멘트를 억지로 뭉쳐서 방을 만든 것 같았다. 나는 문에 난 작은 틈새로 방의 내부를 살펴보다가, 유리에 비친 그의 실루엣을 보았다.

 

 “ 네, 기다릴게요. ”

 

 나는 잠자코 소파에 앉았다. 앉자마자 찝찝한 직감이 들었다. 한 번도 없거나, 새것에 가까울 정도로 사용하지 않은 소파가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햄스터 사육장같이 조잡하게 만든 공간은 또 어떤 복선인지, 의식하지 않으려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노아 박사가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려서 창을 가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영 거슬렸다. 결국, 나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를 불신하지 말자고 다짐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박사님, 지금 상담사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

 

 노아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심지어 숨 쉬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은 맞는데, 내 곁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분명 저기 서 있는데, 어디 멀리 간 것 같았다. 껍데기만 덜렁 있었다. 마치 어제처럼, 나는 지금 그의 껍데기에 의지하고 있었다.

 

 “ ...곧 엔지니어가 올 겁니다. ”

 

 나는 노아 박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거운 침묵을 가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 두개골을 수술용 톱으로 잘라서 연 뒤, 통째로 뇌를 꺼내어 아버지가 말한 부분의 기억을 말끔히 도려내듯이. 정성을 들여서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 상담사 K, RX-A.201K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올 거예요. ”

 

 노아 박사가 한 말은 간단했다. ‘RX’는 트라우마 센터를 설립한 아버지의 기업 이름이다. ‘A’는 아마 인공지능(A.I)을 뜻하는 말일 테고, 201은 무슨 숫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아버지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지우고 싶었다. 건강하고 올바른 사람을 사귀는 게 좋겠구나, 사람을 사귀는 게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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