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어디가요?"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느긋하고 다정한 말투와는 달리 짐을 챙기는 황선우의 손은 분주했다. 후배의 대답이 뭐라 나오기도 전에 선우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저를 찾는 동기나 선후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같으면 하나하나 웃으면서 받아줬을테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황선우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제에, 남의 시선은 무척이나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분명 지금 저에 대해 오늘 이상하다느니, 온갖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선우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양심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고 택시까지 타고서야 도착한 곳은 천장이 높은 카페였다. 서둘러 왔다는 걸 티내기 싫어 카페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은 시연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황선우였다. 그가 말하자 맞은 편에 앉은 이시연은 말없이 웃기만 한다. 그러고는 과육이 죄다 가라 앉아 있는 자몽에이드를 빨대로 휘저었다. 웃음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게."
한참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밖에 없는 카페에는 이름 모를 팝송만이 울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황선우는 그 옛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다. 나름 주위의 선망을 받고 있는 자신은 물론, 그 대단하다는 사랑조차도 사람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긴 검은 머리나 새하얀 피부, 여전히 예쁜 편에 속하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시연 특유의 밝은 표정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이랑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아. 이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선우는 간신히 말을 삼켰다. 죄없는 커피 얼음만 빨대로 쿡쿡 쑤셨다. 선우는 지금 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한테 다시 연락이 올 줄은 몰랐어."
사근사근한 말투. 말투는 그대로인가? 선우는 고개를 들어 시연을 쳐다보았다. 시연은 무표정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아마 시연이 이렇게까지 달라진 건, 분명 제 탓이었기 때문이다. 황선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