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아스팔트의 숲에서 홀로 팽개쳐져 있음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외로움을 달랠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것이 반려 동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대신할 취미생활이든. 혹여 새로운 사랑이든.
기천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쭈그러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애써 노력해보지만 떨리는 두 손에 땀이 흥건히 묻어 있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
휴대폰을 통해 지영의 목소리가,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처럼 작게 들려온다. 기천이 다시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무슨 뜻인지 한 번에 가슴을 찌르듯 이해해버렸으니까.
다만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물어본 것이었다. 이해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현실. 마치 꿈처럼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그랬다. 그에게 이 상황은 일어나서는 안 될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뼈를 파고드는 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기천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뱉어 냈다.
하지만 지영은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기천의 사과에도 헤어짐을 강요한다. 조용히 미안하다며. 하지만 강철 같은 묵직함으로.
지영과의 마지막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4년의 세월을 함께 걸어온 그 오랜 만남이 차디찬 전화 한 통으로 끝나버렸다. 너무나 무참하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입영 통보를 받듯, 지영에게 일방적인 이별선언을 받은 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뽀얀 입김이 주위를 둘러싸다, 이내 아무것도 없었던 듯 사라져버린다.
기천은 순간, 그것을 자신과 그녀의 만남 같다고 생각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추억, 행복, 기쁨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그들의 만남. 연기처럼 사그라져버린 그와 그녀의 인연.
기천은 다시 담배 생각이 났다.
한참을 부스럭 거렸더니 또 쭈그러진 담배 한 개피가 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순간, 담배 연기가 너무 매웠던 걸까. 그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가, 청량한 새벽의 공기에 이리저리 퍼져 나간다. 하지만 이곳은 무채색의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숲, 기천에게 다가가 왜 우느냐 물어봐 줄 이 없고, 어깨를 다독여 줄 이도 없다.
기천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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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언제나 괴롭다.
특히 이 순간의 기천에게는 더욱 그랬다. 어젯밤 온갖 생각에 뒤척이다 모든 것을 잊자고, 절대 울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건만 거울에 비친 퉁퉁 부은 눈두덩은 그의 의식보다 무의식이 강함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하다.
지독하게 못생겨 보이네. 기천은 눈이 툭 튀어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 만에 낮아진 자존감이 그를 더 못생겨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오전 06:30. 오늘의 이 순간이 기천에게는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평소와 다르기 때문이다. 항상 오던, 또 항상 보내던 모닝콜이 사라진 세계. 일상이 일상이 아니게 된 순간. 지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같은 순간에 깨어 같은 어색함을 느끼고 있을까?
슬그머니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세면대 위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기천은 눈물을 억지로 닦아내지 않았다. 그저 물을 틀고 그대로 세안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더 이상 얼굴이 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월에 얼굴을 닦다가 다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끼고 기천은 심호흡을 했다.
기천은 새로 세탁한 와이셔츠를 입으려다 멈칫했다. 지영이 선물해 준 셔츠였다. 옷장을 둘러보니 죄다 지영의 손길이 닿아 있다. 심지어 넥타이들 마저 그녀의 선물이 아닌 게 없을 정도다. 4년 연애의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왈칵 올라오는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기천은 와이셔츠의 깃을 세웠다.
참아야 했다. 이제 곧 출근이다. 서른이 넘은 남자는 울음을 남에게 보일 수 없고, 보여서는 안 된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남자가 울음을 보이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특히 서른이 넘은 남자라면. 눈두덩이 팅팅 부은 상태로 아무리 호소해도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울고 싶다면 퇴근 후에 울면 돼. 그렇게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천은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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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직장 동료인 이 원무 과장이, 기천의 어깨를 두르며 커피를 권했다.
언제나 듬직한 얼굴로 웃음이 가득한 사람. 하지만 지금은 그의 호의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단지 혼자 있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그는 자신이 꿈 속에 있는 듯 느껴졌다. 솔직히 잘 분간이 가지도 않는다. 꿈 같은 현실인가, 현실 같은 꿈인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
커피를 받아 들며 어색한 얼굴로 웃음짓는 기천을 보며, 원무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출근 카드를 찍었다.
"이번 주에 OT(over time= 특근, 시간 외 업무) 있는 거 알지? 너 정말 신청 안할거야?"
OT가 있었지. 하아. 이놈의 회사. 지독하게 굴리는 것을 좋아하는 회사다.
"아, 그거요. 신청 할 거에요. 어차피 연말에도 할 일 없는데요. 뭘"
"너 여자친구와 데이트 약속 있었잖아? 끝내주는 레스토랑 예약해 놨다고 자랑하더니.“
말문이 턱 막히는 느낌. 기천은 순간 당황했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아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나도 현실 직시가 되지 않는데.
“어, 어디가! 야 무슨 일 있는 거지?"
기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원무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사라지는 기천의 뒷 모습을 보면서, 원무는 걱정스레 중얼거리며 다시 커피를 뽑더니 갑자기 소리친다.
"아! 이 자식 선배가 뽑아줬더니 지만 먹고 튀어? 점심에 만나면 혼내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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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씨, 다음 주에 신입 들어오는 거 아시죠? 교육 담당 후보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반드시 참석하세요. 예외는 없습니다.”
인사팀의 이희정 과장이 언제나와 같은 날카로운 눈매를 부라리며, 기천의 데스크로 다가와 몇 가지의 서류를 건넸다. 차가운 또라이. 빙녀. 역시나 별명 그대로의 사람이다.
누가봐도 문제가 있어보이는 기천의 표정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도 자신의 할말만 하고 자리를 뜬다. 인사조차 없다. ‘네 사정 따윈 전혀 알 필요 없거든’ 이라며 온몸으로 냉기를 풀풀 흘리는 그녀를 보며 기천은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불만을 도로 삼키고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교육에 참가하겠노라고 말을 건넨 후,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수백 개의 메일, 수십 개의 메신저 쪽지가 전원이 켜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천을 반겼다. 이건 뭐 슬퍼할 겨를도 없군, 기천은 한숨을 포옥 내쉬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업무 관련 메일들을 대충 훑어본다. 그다지 중요한 것도, 신경 쓸 것도 없다. 있다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터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 왼쪽으로 떠오른 새로운 쪽지가 떴다. 아침인사 겸 항상 보내는 동기인 화영의 메시지다. 아침부터 이희정 과장에게 무언가 당한 듯 하다. 이희정 과장을 향한 불만이 가득한 메시지가 기천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이희정 포커페이스 봤냐! 어후 아침부터 분위기 완전 깔아준다.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길래 저 또라이랑 엮인 건지. 차또, 차또! 난 저 차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내 인사관리를 왜 저게 담당하는 건데?]
평소라면 그녀의 대화에 맞장구 쳐 줄 기천이지만, 우울한 현재의 기천은 답장을 줄 생각이 없는지 그냥 창을 내려버렸다. 간단한 인사조차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니 화영에게 지금의 현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게 정답일지도 몰랐다. 배려심 가득한 화영이 이 상황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저녁 약속이 생길 것이고 당장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기천에게 그건 결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바탕화면이 생긋 그를 향해 웃음짓고 있다. 지영이다. 순간 지워버려야 하나 하는 고민이 기천의 머릿속을 파고 든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업무 프로그램의 아이콘에 커서를 갖다대었다. 지우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바탕화면이 바뀌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타인의 이목을 끌게 된다. 지금의 기천은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앙증맞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표현하기 힘든,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치듯 올라온다. 감정의 분출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난 이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까.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의 아픔이 결국 어떤 흉터로 내게 남게 될까...
헝클어져 풀리지 않는 실타래의 뭉치처럼, 머릿속의 사고가 얽히고설켜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기천은 꼬여버린 생각의 실타래를, 마음의 상처를 풀어낼 재간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또한 잿빛 아스팔트의 도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