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업무서류들이 기천의 눈에 들어왔다.
쓸 데 없는 결재서류들, 더 쓸 데 없는 거래처 명세서들. 그리고 이런 것을 소중히 끌어안다가 진정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나. 내가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노력한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기천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에 있던 말을 입으로 내뱉었다. 평소에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그가 이런 말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생각들이 무의식의 바다를 넘어 의식의 표면으로 마구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모두 받아들일 만큼 현재의 기천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점점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그는 현재의 자신에게 쓸데없는 생각만 불러 일으키는 서류가 가득한 사무실을 뒤로 하고 옥상으로 향했다.
사무실의 직원들도 눈이 있다. 아침 내내 장마철 구름처럼 우중충한 기천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기천이 사무실을 나가는 순간 하아 하는 한숨소리가 사무실 곳곳에서 하모니를 내며 울려 퍼진다.
“후아~. 분위기 냉랭하네.”
막내 민혁이 스타트를 끊자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커져간다. 누구도 지금까지 기천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팀장님 저 자식 어쩌죠? 큰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괜히 일 시키면 안될 것 같아요.”
“나도 눈치가 있다. 뭔 일인지 하루 종일 축 늘어져서… 보는 게 안쓰러워서 아무 말도 못하겠어.”
“팀장님도 사람이긴 했네요. 난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괴물인 줄 알았는데.”
“원무야. 많이 컸다 너? 오늘 야근 하고 갈래?”
“아~ 정말 왜 항상 저에게만 그래요?”
“혼날 짓을 하잖아. 내 말이 맞지 신 대리?”
“이 과장님이 눈치가 좀 없죠.”
“쳇. 야 정민혁이! 웃지마! 까불면 너도 야근이다. 내 옆에서 함께 퇴근하게 될 줄 알아라.”
“아 정말! 나까지 끌고 들어가요! 물귀신도 아니고!”
“됐고, 차 대리 들어오면 누가 좀 옆에서 돌봐 줄 사람 없나? 아니면 일찍 좀 보내버리던가.”
“혼자 두면 오히려 안 좋을 것 같아요. 팀장님. 우선 건드리지 말고 퇴근까지 뒀다가 제가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응 그래. 그럼 오늘 좀 불편하더라도 신 대리가 차 대리 좀 보살펴줘. 늙은이가 옆에서 돌봐주려고 해도 다 잔소리가 되어버려서 말이야. 허허.”
그렇게 화영은 기천의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화영은 괜히 일만 늘어난 것 같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 콩닥거리는 가슴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모른다. 화영 그 자신 외에는.
점심이 지나고도 무기력의 늪에 빠져 조용히 가라앉아 가던 기천에게 화영이 관심이란 나뭇가지를 내민다.
"야. 차기천, 내 메세지 계속 씹을래!?"
화영은 일부러 더욱 씩씩거리며 기천의 데스크를 툭툭 발로 찬다. 하지만 화영의 그런 반응에도 기천은 멍하니 모니터를 주시할 뿐, 아무런 미동도 없다. 기천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화영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레 기천의 얼굴을 다시 쳐다본다.
마치 어린아이가 재미있는 무언가를 관찰하듯.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에 눈을 두고 있는 기천을 한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화영은, 연두색 포스트 잇에 무언가를 적더니 기천의 데스크 옆에 붙이고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다. 화영이 아는 기천이 아니다. 그 점이 씁쓸하지만 오히려 화영의 흥미를 돋군다. 파헤쳐보고 싶은 흙더미, 열어보고 싶은 보물상자랄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던 기천은, 업무 마감시간이 되어서야 윈도우 창에 반짝거리는 화영의 메세지를 발견했다.
무려 12개.
아침인사와 불만스런 몇몇 동료들에 대한 가십거리들, 대답 없는 기천을 느끼고 걱정스러운 메세지까지. 기천은 왈칵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최대한 표시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랜 기간 함께 근무를 했던 동료는 이미 기천의 상태를 다 아는 듯, 짧은 메세지로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두운 토굴 속 멀리 보이는 꺼질 듯한 작은 불빛처럼, 화영의 메세지에 기천은 작게나마 마음이 안정 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데스크에 붙여진 포스트잇의 걸쭉한 욕설은 빼야겠지만.
"자자! 퇴근합시다."
기천은 모니터에 반사되어 데스크에 비치는, 해석하기도 힘든 뒤집어진 프랑스어를 응시하고 있다. 하루가 어찌 흘러갔는지, 어떤 업무를 진행했는지, 틀림없이 모를 터였다. 여전히 반 쯤 풀려있는 그의 동공이, 그림자처럼 비쳐진 프랑스어를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바탕화면에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그녀와의 추억이, 어제의 참담한 기분이 다시금 떠오른다.
- 현실을 봐.
그녀와 헤어졌다는 것을, 이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일까.
기천은 바탕화면의 사진을 지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지워야 한다. 오늘이 아니면 더욱 추해질 뿐이다. 냉정하게, 그녀와의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언젠가 경마장에서 보았던 경주마의 힘찬 뜀박질처럼, 그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녀의 조각을 떠나보내려 하는 찰나, 마치 꿈속의 일처럼 바탕화면의 그녀가 입술을 열어 그에게 속삭였다. 속삭였을까? 그녀인걸까? 내가 미친걸까?!
" 지우려고?"
네 주제에, 날 지우려고?
지영의 목소리가 기천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다. 그 달콤한 목소리, 애정 가득했던 지영의 음성이 이제는 그를 비웃는 것 같다.
지울테면 지워봐. 너는 아무리 그래도 날 잊지 못할걸?
그녀를 잊지 못하는, 어리석은 그의 환청일까. 기천은 마우스를 가져다 댄 채, 지그시 바탕화면을 노려 본다. 현실과 몽상, 이성과 본능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는 지금의 이 사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명[耳鳴]처럼, 지영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화영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야 월급도둑, 너 무슨 일 있지...? 갑자기 여자친구 사진을 지우려고 하고."
화영이었다. 처음의 그 목소리도 화영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화영이라 믿고 싶다.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속에 조금씩 물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는 피로한 척, 눈을 닦아낸다. 안녕. 내 눈물. 이제는 가치 없는 내 과거. 안녕. 안녕.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고맙다. "
기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6시 10분.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까. 오늘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술 한 잔 하자."
화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조금은 거들먹거리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하굣길에 박스에 담긴 강아지를 발견해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그런 시츄에이션일지도 모른다. 그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영이 내민 쿠폰을 보기 전까지는.
"고양이 까페...? 이게 뭐야?"
고양이와 까페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보신탕 같은걸까. 이 한겨울에.
"고양이랑 함께 커피를 마시는 거지. 어우 노친네 냄새. 아직 서른 중반도 안 됐는데, 속은 다 늙었구나?"
화영이 정말 냄새라도 난다는 듯, 코를 쥐며 인상을 찌푸린다. 장난끼 가득한 그녀를 보며, 기천은 보신탕이나, 고양이를 먹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던 것은, 죽어도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화영이 눈치를 챈다면, 100년간은 놀림을 당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야! 고양이는 신이 창조한 동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야! 그런 고양이들에 둘러싸여 차를 마신다! 캬하. 어때 끝내주지?”
“그다지 흥미가 가지는 않는데. 그보다 가장 아름답다니... 근거는 있는 이야기냐?”
“그러엄! 일단 들어봐. 고양이는 말이야...”
화영은 낄낄대며 고양이까페가 어떤 구조인지, 고양이란 생물이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해 장광연설을 내뱉었다.
멋진 사람. 아무런 수식어도 필요없이, 그저 멋진 그런 사람. 그녀는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매사에 장난스럽고 항상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비가 내린 뒤 맑게 개인, 호수의 무지개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기도 많지만, 그녀는 남자의 로맨틱한 고백보다, 그녀의 작은 고양이를 사랑했기에, 많은 남성들의 고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화영에게 차인 남자들은 노랑이라는 이름을 무엇보다 싫어한다. 노랑이가 뭐냐고? 화영이 애지중지하며 집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코리안 숏헤어 품종 고양이의 이름이다.
"가는 거지?"
"술 마시자며...?"
"아... 뭐... 그래! 술 한잔 하고 고양이 까페를 가자! 아니면, 고양이 까페를 갔다가 술을 먹던가."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던 게 틀림없다. 눈에 띄게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는 화영을 보며, 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혼자 보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 일 것 같다. 그래도 고마웠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지금의 그에겐 큰 의미가 되고 있었다.
난 잘 지내. 아니, 잘 지낼거야.
안녕. 20대의 내 모든 것이었던 사람.
안녕. 내 잃어버린 10년.
부디 행복하길.
"그래. 술은 됐고 밥먹고 가자.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더니 쓰러질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