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영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이랑이 묘한 기류를 느끼고 고개를 홱 든다.
“선배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화영은 애써 무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잖아. 기천과 나 사이는. 그저 친구일 뿐이잖아. 좋은 직장동료. 그리고 술친구. 그래. 그렇지.
“그런데 선배님. 교육관님 자리는 어디에요?”
삐죽. 화영은 애써 눌러 놓은 알 수 없는 감정이 고개를 내미는 걸 느꼈다.
나 지금 하고 있는게 질...투 맞나?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쟤는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기천이 자리? 저기 팀장님 맞은 편 빈자리야. 교육연수 마무리 때문에 얼굴 보기는 힘들 거야.”
“그래요? 아쉽네요... 빨리 인사 드리고 싶었는데.”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바로 나거든. 그건 주인이 있단다. 물론 그게 나라는 건 아니지만. 너는 더욱 아니야.
화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집어삼키고는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죄가 있을까? 그리고 어차피 나와 기천이 이루어질 것도 아닌데.
“우선 신입답게 맡은 일 잘 숙지하고 노력하도록 해. 알겠지?”
“넵! 선배님!”
이랑이 미워할 수 없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대답한다. 그 순수함에 화영은 자신의 옹졸함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모른 척. 그렇게 지내자. 나는 그래도 기천의 가장 친한 친구이니까.
그 자리만큼은 누구에게도...
-
이랑은 새벽부터 한껏 업 되어 있었다. 아니 전 날부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첫 출근의 기대. 남들이 바라는 직장 생활. 화려한 커리어우먼으로의 길.
NO. 아니었다. 이랑의 마음을 그토록 흔든 것은 그런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다.
차기천.
단지 면접의 연장으로만 생각했던 연수에서 만난 교육관은 사막에서 만난 샘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이랑에게 다가왔다. 이랑에게만 특별히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서른 초반의 나이에도 20대처럼 뽀송한 피부, 그리고 매력적인 그 미소가 이랑의 여린 심장을 격하게 두들겨 댔다. 이랑이 연수 성적이 좋았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가 있는 부서로 배치 받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를 맞이하는 날이 되었다.
아니 그가 나를 맞이하는 건가? 훗.
어릴 적부터 가지고 싶은 걸 가져보지 못한 적은 드물었다. 부유한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매력적인 외모와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누려왔다. 이랑은 자신의 가장 큰 무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현관을 나오며 이랑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6시 30분. 이제. 이제 곧 이다.
“어머, 너무 잘나왔다. 이랑 씨 어때? 자기가 보기에도 좋아보여?”
“네! 원장님. 너무 고마워요.”
“아유, 뭘! 본판이 좋아서 그렇지. 호호”
메이크업 원장과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면서 이랑은 시간을 확인했다. 7시 45분. 조금 타이트 하겠지만 나쁘지 않다. 살짝 얼굴이 푸석한 듯도 하지만 그래서 메이크업도 따로 받았으니까.
후우. 이랑은 또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가방을 챙겨 메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띠링.
동기들의 톡이 하나 둘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확인 하고픈 욕구를 애써 무시하고 이랑은 급히 회사로 발을 옮겼다.
총무팀. 총무팀. 총무....원숭이?
“김이랑 씨?”
왠 원숭이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억지로 업무용 미소로 바꾸며 이랑이 대답한다.
“아, 네! ”
“반갑습니다. 총무팀의 정 민혁입니다. 총무팀으로 배속 받으신 것 아시죠?”
당연하지. 내가 직접 지목해서 들어간 건데.
이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은 싱긋 웃으며 서류를 한 부 건넸다. 이랑은 민혁의 미소가 조금 징그럽게 느껴졌지만 쑥스럽게 웃는 얼굴로 얼버무렸다.
“신입사원 안내서예요. 나중에 천천히 보시고 우선 이동합시다.”
“말씀 놓으세요. 그리고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요? 선배님.”
“아. 그럴까? 선배님 좋은데? 흐흐. 나는 사원이라 아직 직급이 없어. 그리고 우리회사는 직급으로 호칭을 하지도 않고. 팀장 이하 직급에게는 방금 말한 것처럼 선배님이면 돼.”
“아...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차 기천 교육관님께도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기천 선배님. 아. 좋다.
“다시 한 번만 불러줄래?”
“네?”
“그 선배님 이라는 표현 말이야.”
“아하하... 네. 선배님. 짓궂으시네요.”
이 사람은 대체 뭐지? 나한테 관심있는 거야? 으...
이랑은 요주의 체크리스트에 넣어둘 것을 다짐하며 민혁과의 거리를 살짝 벌렸다. 아주 멀어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총무팀.
어디에서나 있을 노멀한 현판을 보면서 가슴이 쿵쾅거리긴 처음이었다. 이랑이 손에 흥건한 땀을 스커트에 닦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는 순간 민혁이 이랑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듯 힘차게 사무실의 문을 열어버렸다.
“새로운 신입사원 배달 왔습니다!”
여기에 있다. 그가. 내가 반드시 가져야 할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