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은 진심을 다해 주어진 업무에 집중했다. 신입이 맡을 업무라 해봤자 별거 있겠냐마는 자신이 맡은 업무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뒷소리가 나오는 것은 싫었다. 특히나 기천에게 꾸중을 듣기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일에 빠져 있던 이랑에게 화영이 다가왔다.
“이랑 씨. 너무 열심인 건 좋은데, 좀 쉬어가면서 해. 화장실도 좀 가구...”
주화영. 정말 좋은 선배. 하지만 무언가 촉이 오는 사람. 그래도 좋은 사람.
“아, 네! 감사해요. 신경 써주셔서. 이것만 끝내구요.”
어느덧 5시가 지났는데도 기천 선배는 보이지 않는다. 올려둔 음료도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어?! 옷이 있었는데? 뭐지!?
이랑의 눈이 빠르게 출근표를 향했다. 차기천 과장대리 출근. 맞는데? 혼란스러운 이랑의 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회람판에 꽂혔다.
외근 : 차 기천 명산실업. 바로 퇴근 합니다.
아아아! 들렀다가 그냥 간 거? 나를 보고도 그냥 간 거야? 아니겠지? 못 본 거겠지...
이랑은 순간 머리가 띵 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첫인상을 위해 새벽부터 메이크업 샵을 들러 풀 메이크업을 하고 왔건만! 얼굴조차 보여주지 못했어.
눈에 띌 정도로 낙담한 이랑의 뒷모습을 반대편에서 화영이 바라보고 있다. 화영은 핸드폰에 찍힌 기천의 톡을 번갈아보면서 아주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여기야!”
포차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화영을 향해 기천이 손을 흔든다. 구석진 자리. 역시나 기천답다, 고 화영은 생각했다.
“이게 빠져가지고. 바로 퇴근이나 하고!”
“아 예에. 죄송합니다아. 크크”
“뭐 시켰어?”
“족뱅이 셋트! 그리고 소주. 군침당기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오늘은 좀 달려보고 싶었으니까.
화영은 왜 자신이 불안함을 느끼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냥 무언가 답답하고 불안했다. 한 두 차례 건배가 돌아가고 어느 순간 둘은 침묵 속에서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렇게 알코올이 그녀의 불안한 심리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빌려 화영이 입을 열었다.
“요즘 어때?”
“엉? 뭐가?”
“이제 정리 됐어?”
화영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흉터를 후벼 파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일 따위는 정말 싫었는데 오늘은 어찌된 건지 술기운에 본심이 자꾸만 흘러 나왔다.
“사람이 쉽게 잊혀지겠냐.”
기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픽 웃었다. 그 기운없는 미소에 화영은 볼이 빨개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취한 척 고개를 숙인다.
너는 알고 있니?
네 그런 모습조차 나를 기쁘게 해.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어. 다친 상처도 1달이면 낫는데 3달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아물때도 됐지. 하하.”
“멍청아! 마음의 상처랑 그냥 상처랑 같아?”
“마음의 상처든 뭐든 치료하면 되지.”
“어떻게 치료할건데?”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다. 아직은 이른 저녁시간, 조용한 포차의 실내에 카운터에서 틀어둔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보여
후회는 없는걸
그 웃음을 믿어봐
“다른 사랑으로?”
기천이 웃음을 지으며 카운터의 뮤직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틀림없이 장난인데도 왜 몸이 이렇게 떨리는 걸까.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 마냥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에 화영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다른 사랑으로?”
화영의 되물음에 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소주를 한 잔 털어 넣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하지만 그 순수함이 때로는 가장 잔인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쓸데 없는 이야기가 또 한 차례 지나가고 서로의 주량이 최고조에 오른 순간, 화영은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랑으로? 정말?”
“그래! 사랑은 사랑으로 치료한다잖아.”
인사불성이 된 상황에서도 기천은 신나게 대답한다. 지금 내 마음을 내비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화영은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고만 판도라의 마음을 절실히 공감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붙잡았다.
“만날 사람은 있고?”
이제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기천의 정수리를 내려다 본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하다.
“만날 사람 있냐고.”
“으응? 생기겠지. 음냐...”
“나는... 어때?”
저질러버렸어!!
두근대는 맥박이 심장을 거쳐 손가락, 발가락 마디 하나하나 마다 벌떡벌떡 뛰어댄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어.
화영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긴장감 속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천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드르렁 커어...zz”
화영은 안도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술이 다 깨어버렸다.
차 기천. 너는 너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