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과 지혁은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입을 먼저 연건 하임이었다.
"애인이 있으신줄은 몰랐네요-"
지혁은 슬쩍 ,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내 소설 인트로 보면 다들 그쯤은 예상하던데.."
".. 그거 보고는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
"다들 그렇게 치부하더군- 하지만 그 여자가 장하민은 맞지"
"어쨌든- 소설가 다운 대답이네요- ... "
그래 예상했던 일인데.. 지금 있는줄은 몰랐지.. 내 사랑처럼 저버린 사랑인줄 알았지.. 혼자만..
하임은 자기가 느끼는 왠지모를 실망감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임자 있는 남자인걸 확인받아선지
아님 난 평생 못 받아 볼 절절한 사랑을 받는 그 여자 때문인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의 영원한 꿈 같은 여자라니...
행복하겠다. 그런 생각이 스치고 하임은 말 없이 냉장고 앞으로 가서 맥주캔을 꺼낸다.
"한잔 할래요? 기분도 꿀꿀할텐데-"
지혁은 돌아보더니 왠지 경악한 표정이다..
"그거.. 술이야?"
"그럼 술이지- 뭐인거 같은데요?"
맥주 한잔이 뭐 술인가? 음료지 이정도는
치맥 문화에서 이사람만 동 떨어져 있었나.. 자꾸만 재차 묻는다.
"술도 먹어?"
"그럼 술을 먹지.. 뭔 소리를 자꾸 하는거에요- 한잔 해요 말아요-"
"난 술같은거 안 먹어,"
그는 고집스럽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왜요- 생긴건 소주 10병은 하게 생겼는데?"
하임은 픽 웃으며 앞에 앉아 맥주캔을 딱 하고 딴다.
지혁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빤히 느끼면서
"술도 안먹고 - 밥도 안먹고- .. 당신은 대체 뭔 재미로 살아요-"
"주로 먹는 것에 재미를 느끼나 보군? 먹는거 좋아하나?"
그는 슬쩍 웃으며 묻는다.. 그 미소는 너무 쓸쓸해서
아직도 내게 향하는 얼굴이 아님을 알수 있다.. 하임은
어쩔수 없이 대답한다.
"아니.. 뭐 말하자면 그렇다구요.."
지혁은 흥미롭다는 듯 하임을 힐끗 보며 말을 잇는다
"꼭 재미가 있어야 인생을 사는건 아니지-"
"그래도 재미는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거든요- 당신이 책을 목표로 사는거 처럼요
그 책에 그림을 더하면- 책이 예뻐지잖아요- ... 인생에도 재미를 더하면 인생도 예뻐지거든요-"
"재밌는 소릴 하네, 미안하지만.. 난 재밌는 삶을 살 자격은 없는 사람이라서.."
쓸쓸한 표정- 또 그 표정이다. 재미없는 남자.
"어차피- 사연 다 털어놓진 않을것 같으니 더 묻지도 않을게요-... 대신 부탁이 있는데 들어 줄래요?"
언제나 이 여자는 분위기 파악이 빠르다- 상황정리만 되면- 바로 직구를 던진다.
하임이 손에 든 캔이 벌써 가벼워 보인다- 술 마시는 속도도 빠르군
"무슨 부탁? 그쪽이 이래서 스트레스야- 내 맘대로 하는게 하나도 없거든.."
그는 오히려 좀 재밌어하는거 같다. 적어도-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는 좀 가까울까 이젠
"스트레스 없이 살면 , 너무 심심하게 장수할것 같지 않아요?"
흐음- 하더니 자기 눈가를 어린애처럼 살짝 쓸어내린다.
"난 내 잔잔한 삶이 좋아- 파도가 생기면 여러가지가 물가로 밀려 올라오지.. 난 그런 문제점들이. 아주. 거슬리거든."
오만이 다시 얼굴에 가득하다. 오만한 남자- 자기 스스로를 잘 알아- 그래서 컨트롤이 안될때가 더 무섭겠지..
하임은 용기의 물약을 섭취하니 - 이제 이 남자도 더는 무섭지만은 않다. 하임은 원래도 주량이 그닥 많지 않다.
길쭉한 맥주 캔 2개면 혀가 슬슬 꼬이니까, 그래도 조금은 용기가 있을때 말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림 그릴려면- 아무래도 실제로 봐야 하는 것들이 있을것 같아요- 자료 사진도 좀 찍고... 그래야 되는데-
제가 영 인간관계가 넓지가 못하네요- 그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원래는 넓었다.
한남자랑 사귀면서 다 서로 친구고 하다보니-... 도하랑 헤어지고 연락을 끊어서 그렇지..
한가지, 도하가 바람나서 헤어졌다는 것만- 고로 내가 누군가에게 밀려 헤어졌다는 것만 그것만이라도 몰랐으면 싶지만...
사람들은 누구든지 남의 가십은 재밌는 법이다. 알게 됬든 모르게 됬든, 난 모든 SNS를 끊고 연락도 끊었다.
나이가 들만큼 들었는데- 언제나 도망은 나쁜 방법이었건만 난 또 도망을 택했다.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는- 나한테?... 가야? 한다는?...."
대답의 반이 반문이다,
"그렇죠- 이해가 빠르네요"
"나한테 같이 가자는거야 지금?"
"그럼.. 여기 당신말고 누구 있나요 지금?"
"당신 소리 그만하지? 나 바빠-... 진짜야-"
"교정도 거의 다 봤을테고- 내 컨펌말곤 시간도 널널한거 다 알아요- 모르는것도 아닌데 왠 뻥?"
지혁이 화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잡는다.
"뻥?... 여자가 자꾸 미운말 써 버릇하면 습관될텐데.. 그냥 조금 여유가 나시죠? 하면 안돼?"
"그럼 조금 여유가 되시죠?"
"이렇게 사사건건 이런 일 벌일건가? 계약서 내용을 지금 굉장히 거스르고 있는데..."
"계약서 얘긴 그만하죠? 앞섬 이젠 안 보이시나봐요-.. 미안하단 말로 다 끝날것 같으면
이나라에 법이 왜 있고 경찰이 왜 있으며......"
지혁은 자기가 술을 먹은것도 아닌데 왠지 꿈꾸듯 이 상황이 몽롱하다. 발에 달린 토끼 슬리퍼의 귀가 까딱까딱 댄다
이렇게 사람과 가까이 이런 이야기를 한게 언제였지
가벼운 얘기 가벼운 부탁- 이런걸 한게 대체 언제였더라..
공기가 원래 이렇게- 솜처럼 가벼울수 있는 것이었던가? -
".. 고소 안한다 그래놓고는 좀 강경하네- 여튼 그건 미안하다니까?"
"미안한 표정이 아니신데요- 그러니까 난 고소도 뭐도 안할건데- 내가 시간 비워서 사진이라도 좀 필요할때
같이 가줬으면 하는게 다에요 그거 하나뿐인데? 그것도 안되요?"
지혁은 반쯤 감긴 묘한 눈으로 하임을 바라보고 하임은 남은 맥주를 원샷한뒤 캔을 손으로 구긴다.
"안한다고 하면- 고소라도 할건가?"
술이 좀 들어가자- 하임도 이상하게도 말이 좀 쉬워진다-
"흐응.. 뭔 말 만 하면 고소 고소
뭔 말만 하면 계약서 운운- 전 치사하게 안 그래요 사람이 약속은 지켜야죠-
당신을 좀 번거롭게 할수는 있겠지만 까짓거 뭐 멱살 한번 더 잡히고 말죠-"
지혁이 민망하다는듯 킥 하고 웃음이 새 나오고 드디어 자연스럽게 웃는걸 본 하임은 정작 술기운에 좀 몽롱하다
"계약서 가져 와봐-"
하임이 책상 위에서 계약서를 가져오고 신난 하임은 앉아서- 자신만의 계약 내용을 적어나간다
그 모습을 턱을 괴고 보다가 하임이 신나서 내 밀자- 싸인을 한다. 긴 손가락으로
"담부턴 잘못을 하지 말아야 겠군-여러모로 손해보는게 많군-"
"난 하나만 걸었지만 당신은 수십가지를 걸어 놨잖아요-"
"미리 말해두지만 하루 전엔 말해- 그리고 3시간 넘는데는 안가. "
남자가 뭐 이렇게 빡빡해- 이건 남자라서 그런거 같진 않다. 그냥 이 사람이 특이한거지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아직 정신은 말짱하거든요-"
"그럼.... 난 이제 가도 되는건가?"
지혁이 일어서려 하고- 왠지 하임의 마음에 아쉬움이 맴돈다. 사람을 들이는건 쉽다. 근데 그 사람이
떠나간 정적은 참기 힘들다는걸- 하임은 잘 안다- 그런 아쉬움이 들 상대가 아니라는건 둘째치고-
자신이 이 사람을 꽤 맘에 들어하고 있다는 생각에 맘이 복잡할 뿐이다.
"아- 네.. 내일 뵙죠-"
"오늘은- 정말, 다시한번 미안하군- 다신 안 그러도록 하지. 조심하지.-"
....
"알았어요- 이제 가요 늦었네요-"
"토끼신발 - 고마워-"
그는 부드럽게 , 처음 보는 것 처럼 ,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토끼슬리퍼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문을 닫고 어둑한 복도로 나서고 문이 닫긴다.
하임은 냉장고로 가 맥주를 한캔 더 딴다. 그리곤 가지런한 토끼 슬리퍼 옆에 앉는다.
"신경쓰이네, 괜히-"
그 사람이 멋지게 긴 다리를 꼰채 앉아 있던 그 의자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진다.
아니 같이 일할 사람인데 뭐 이정도 신경쓰이는 게 뭐 별일이라고-
얼굴이 유난히 달아오르는 것 같다- 오랫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아우 더워-"
왜이렇게 덥지?
하임은 결국 그 맥주는 다 마시지 못한 채- 화장실로 씻으러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