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만에 나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나를 응시하시면서 불편해 하시는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겨우 말을 꺼냈다-
"도저히... 인사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웃으시는 것 까진 아니셨지만 쓸쓸하게 미소 지으시더니 대답하셨다.
"알고 있었어.... 그래도 이렇게 된거.... 이야기는 해야 겠구나, 잠시... 괜찮겠니-?"
난 고개를 끄덕이곤 짙은 커튼과 유리문으로 닫겨있는 넓은 테라스 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곤 문을 밀어 닫았다.
테라스는 넓었고 의자도 있었으나- 어머님은 그저 서서 난간 너머를 바라보실 뿐이었다-
나는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무슨 이야길 할수 있을까-
내 평생 이렇게 죄책감이... 더 없이 무거워서 폐까지 터져버릴 듯한 순간이 있었던가..
가슴이 아렸다. 아주 선명하게-
"... 오늘 참석할거-.... 대충은 예상 했었던 일이란다-"
"......"
내 얼굴을 돌아보시며 자못 다정하게 , 어머님은 말씀을 꺼내신다-
어색하게 웃으시는 모습-
"네 어머니가 말 해 주시더구나.... 회장님이 참석하라고 강요했다고..... 어머님은 내게 미안하신거 같으시더구나....
하지만 난 아니야-... 솔직히 니가 나와서..... 한동안은 사람들은 하민이 얘길 더 할지도 모르지만...
..... 내가 듣는것은 상관없어- 하민이는... 어차피 지금은 듣지 못할테니까-"
그러실 의도는 전혀 없으시겠지만... '너 때문에' 란 말은 내 맘속에선 들렸다.
상관, 없으실수 없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는데..
"그때 너랑 통화 했을때.... 난 맘이 참 아팠단다....
내가 그 사고 때문에 너한테 얼마나 독하게 굴었는지....
나도 잘 알고 있단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가 미쳤었다 싶더구나.. 니 탓이 아님을 알면서 니 탓만 했지-
니 탓 아니였어... , 그 사고로 너도 얼마나 다쳤는지 뻔히 알면서-... 넌 다리가 다 갈렸던 와중에도 온몸으로 기어가서
뼈가 성한 뼈가 없을 만큼 부서져서도.... 손으로 기어가서..........
하민이 상탤 확인했다고.. 한참이나 뒤에 의사가 이야기 해 주더구나.. 정신을 잃을수 밖에 없는 큰 부상에도
매달려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고.... 의사가 그런 건 처음 봤다고... 그랬었어-
알면서도 널 , 선뜻 용서할수 없었단다..... 그러기엔...."
어머님은 울고 계신것 같았다. 난 심장이 떨어져 흙이 묻은것 처럼 가슴께가 서걱서걱 거렸다.
"내가 하민이를 참 아꼈거든- 그 애를 참 아꼈어- 어떤 엄마가 안 그랬겠냐만은... 그랬어-
다른 애들 보다 , 어릴때 더 같이 못 있어줘서 더 미안하고 더 아꼈어- ...
거의 억지로 널 만나게 했었는데
둘이 너무 좋아졌을때 .. 나라고 왜 기쁘지 않았겠어-... 그랬었어-... 남들은 그랬지- 널 욕심내서 딸 인생 망쳤다고...
... 너의 집안 배경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 다른 사람을 만나게 했어도 됐을꺼야.. "
어머님의 말씀은 진솔하게 들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흉한 소문에 시달리셨다는
이분의 슬픔이 얼마나 클지... 난 이해조차 할수 없었다.
나는 도망쳤다.
참을수 없어
모든걸 버리고 모든걸 단절하고 도망가길 택했다.
이런 이야길 듣는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분은 계속 그 안에 있었다. 계속, 벗어나지 않고 그 이야길.. 들으셨다.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일지- 충분히 알수 있었다.
계속... 이 속에서......
"그래........ 하나도 관심 없기야 했을까.... 그래.. 지금 이것도 다 겉치례로구나......
이 상황에서도 말이야...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안타깝다는 듯한 어머니의 말씀에 난 입을 열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아마.... 그렇게 만나지 않았대도.."
하민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웃는 얼굴- 빛나던 미소, 예쁜 손가락과 그 손가락으로 내 손을 잡을때의 그 감촉-
지금 내 손엔 허망한 바람만이 감돌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내가 입은 그녀의 향기가- 그때 그녀에서 나던 향기와는 사뭇 다르게 내 혈관을 타고
내 어깨 너머로 날 따라 잡는다
목이 콱 멘다
참고 참았건만... 목이 뜨겁도록 목이 멘다..
"우리는 아마.. 만났을 거에요 어머니... 그리고 ... 하민이는 몰라도 전 아마... 하민이를 좋아 할 수밖에.. 없었을 거에요-"
부끄러움도 모르고 입에서 흐르는 자백, 그 말에 어머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신다.
"..... 이제는.... 지혁아..... 하민이를 놓아 줄 때가 됐어........
아무리 뇌사는 아니래도 이미 이렇게 시간이 지난거 자체가 뇌사인거나 마찬가지야
판정만 안 내렸다 뿐이야.
그 동안 하민이는 사랑 많이 받았던 아이인 만큼 모두가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했어.....
니 죄도 아니고, 니 탓도 아닌거 알아...... 그 뒤로... 니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나도 잘 안단다-"
-
하민의 어머니는 연한 빛에 비치는 딸아이의 , 마지막 사랑이라던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내내 자신은 그저,
이 아이와 직면하기를.... 말하자면.. 망설였을 뿐이다.
독하게 밀어내고 독하게 욕했지만 이 아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한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꽃-
병상의 꽃은 색은 바뀌어도 한번도 싱싱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다.
그저- 얼굴만 봐도 알수있다. 아무리 오늘은 티 안나게 단정하게 하고 왔어도-...
나는 그 과정을 알고 있다.
얼굴부터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서도 깨자마자 이 아이는 하민이 안부부터 챙겼다.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때렸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집히는 대로 집어 던졌을 때도- 욕과 독설을 죽도록 소리치며 , 악을 쓰며 할퀴었을 때도
눈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워했다.
그게 깨어날거란 굳은 믿음인지를 안건 1년이 지나서였다.
하민이가 깨어나도 다리를 못 쓸까봐 , 이 아이는 못걷는다고 한 의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독하게 이를 악물고 재활하는 거란 이야길
전해 듣고도 나는 한동안 부정했다.
결국엔 자신을 챙기기 위한 일이라고 매도해야 속이 조금은 편했다... 지혁이가 어떤 아이인지 나라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내겐 분노였다... 시간이 지나자 이해,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이 아이의 마음에 눈물이 났다. 엄마인 나도 포기한 , 이제 깨어날 일은 없겠구나 하는 아이를
하나의 의심없이 기다렸을 이 아이는..... 얼마나 그 사이 혼자였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혼자였을까... 그 자리를 얼마나 힘겹게 지켜내고 있었을까....
소문은 무서웠다. 나는 알던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할수가 없어졌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웠다.
두려움음 현실이 되어 불어닥쳤다. 그러나 솔직히 귀에 별로 듣기지 않았다.
난 이미 최악의 일을 겪고 있었다.
바닥에서 더 내려갈때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난 적어도 숨을 아직 쉬었다. 내겐 남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저 넋 놓고 있을순 없었다. 아이들은 아직도 지혁이를 용서치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 아이가 왜 나왔는지 , 사람들은 술렁였다. 그것이 나 때문임을 아는 사람은 나 자신, 그리고 지혁이 부모님 그리고 지혁이 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으로 어떤 이득을 얻던- 난 아이를 보는 순간 알았다.
내 이야기는 이제 이곳에서 , 적어도 탐욕으로 아이를 잃었단 이야기 대신-
.... 그저 딸아이를 잃은 가엾은 사람이란 이야기로 남을수 있겠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내 가슴에서 확 일던 안도감- 난 그것이 몹시도 치욕스러웠다. 신경 쓰지 않는 다면서 더 나빠질 일도
없었다면서- 내 마음에서 일던 안도감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이 대화를 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참을 수 없었다. 내 자신이.. 이토록 , 아이를 잃었는데도 날 생각하는 나 자신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젠 그만하렴- 니가 어떤 삶을 선택하던 그건 이제, 자유야 ... 니가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해도- 하민이를 전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만나도- ...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꺼야 지혁아- 이제 고집... 그만 피워 지혁아
스스로에게 물어봐- 하민이를... 죄책감 때문에
잡고 있는 것 아닌지-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건 하민이 한테도 못할 짓이야 -... 둘의 사랑은 적어도
순수하게 남겨 둘 기회조차.. 없애 버리는 일인거야 ..."
지혁이는 얼굴은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으나 이미 말을 꺼낸 이상 그저 말을 끝내기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잘 생각해봐 지혁아- 너는 앞으로 남은 날이 더 많잖아-"
내 말을 자르며 지혁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고통스럽다 못해 딱했다. 듣는 것 만으로도 가슴께가 콱 아렸다.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그런 이야기는 누구나 저한테 했어요-
너는 살았으니 살아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목숨 붙어있으면 살아야지- "
뱉듯이 말을 한다. 참을수 없어 뱉어버리는 것 처럼-
"그런데 그게 뭐요, 살았다는게... 대체... 뭔데요.."
지혁이는 참을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머리께를 감싸쥐었다..
그 말들은 가슴을 뚫고 나오는 듯 저렸다.
지혁이의 눈은 고통으로 타고 있는듯이 괴로워 보였다.
이 아이는 여전했다.
변한줄 알았는데-.....
지혁이의 입에서 힘겹게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그렇게 살아서 뭐가 남는데요?"
"....."
"다들 매일 저한테 니 탓이 아니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게 제 탓이 아니면...
대체 누구 탓인데요 ?.....
저는 고작 다리와 몇년의 시간을 잃었지만 , 하민인 전부를 잃었어요- ....
그리고 전 하민이를 잃었어요....
그게 제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이겠어요?"
지혁이가 이런 말을 하는걸 처음 보는거 같다. 지혁이는 언제나 내 앞에선 말을 삼켰다. 내 앞에선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지혁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고는 한참 전이었다. 그러나 그 사고는
우리 두사람에게서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지워졌다고 믿을 뿐, 지워지는 사고는 아니었다.
"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저는 여전히 사고에 잡혀 있고 여전히, 힘들어 하고 , 또 여전히-"
지혁은 말을 잇는 자신의 입이 부끄러웠다- 눈에 차오르는 슬픔도- 그저 부끄럽기만 했다.
지혁은 정말 참을수 없었다. 방금 전 까지-
나는 방금 전 까지도- .....
방금 전 까지- 자신은 품에 하임을 끌어 당겨 안고 있었다.
내 옷깃에 남은 향기가 아직도 있는데 , 난 그 입을 열어서 하민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자신의 뻔뻔함을 난 내가 참을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놓지 않겠다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을 멈추자 하민이 어머님은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 그저 날 바라보셨다.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인자해 보이는 예전의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으로- 살짝 웃으신다-
어머니가 다가오셔서 나는 바짝 얼었다. 손을 올려 내 볼을 쓰다듬으신다- 차가운 손의 감촉-
나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어머님의 눈이, 내 고통이 비춰지는 그 눈에도-..
고스란히 고통이 , 담겨 있었기 때문에....
"그래, 더 말하지 않아도 알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혁아-"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말씀이실까 , 나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내가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이 너무 컸기에 다른 이야기 따위 할수 없었다-
지혁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요즘 겪어온 감정의 소용돌이는 자신을 할퀴고 뜯었다.
있던곳이 좋고 행복한 곳이면 아닌 곳으로 돌아올때는 더 힘들다는 것을, 자신은 안다고 생각했다.
컨트롤 할수 있다고 자만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못했다.
좋은 순간들은 이런 내게- 이따위로 사는 내가 이런 행복을 느끼는게 감히 될까 싶을정도로 따뜻하고
나쁜 순간들은 대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잔인했으니까
"......."
꽉 , 피나도록 입술을 깨문 , 약간 젖어든 지혁의 눈을 보면서 하민의 어머님은 짙은 죄책감을 또 느껴야 했다.
이 아이가 이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 였는데...
"그래- ....... "
그저 납득이 아닌 , 납득같은 대사로 마무리 할 수 밖에...
하민의 어머니는 말하고 싶었다. 기회가 왔다면 놓치지 말라고- 니 옆의 그 여자를- 니가 아주 조금이라도 ... 괜찮은 감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하민이 때문에 도리어 밀어 내지는 말라고- 이 이야길 해주고 싶었다.
심성이 착하다 못해 물렀던 내 아이는
니가 그렇게 불행한 줄 안다면 - 만약, 그래서 돌아 올수 있었다면 100번도 더 돌아왔을 꺼라고...
너를 그만큼 사랑했다고-
그러니까.. 아이를 생각한다면 -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사랑하라고- 더 이상 죄책감 갖지 말라고-
쉽지 않겠지만-
할 만큼, 넌 도리를 다 했다고-
그러나 하민의 어머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민이라면 그걸 꼭 이야기 해 주라고 했을 테지만
나는 그 아이의 엄마였다.
마지막 이기심이 마음 속에서 고갤 들었고 입으로 말하는 대신 눈으로만 말했다.
비겁하대도 어쩔수 없었다. 말한대도 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할 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말았다.
자리를 뜬다- 뒤에 작은 소리로 한숨을 쉬는 아이를 둔채로-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화장실로 황급히 들어 설 뿐이다-
문을 밀어 닫고서야 , 하민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힘겹게 참아온 모든것이 눈으로 흘렀다.
-
지혁의 어머니는 잠시 목을 축이며 마침내- 자리에 잠시 앉은 참이었다. 쓸데없는 인사들과 사회를 본다는 사람의
의례적이고 뻔한 얘기들을 듣고- 그 후에도 방긋 방긋 웃느라 얼굴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이 생활은 이렇다-
줄곧- 나는 줄곧 이렇게 살아왔건만- 쭉 이렇게 살아왔건만 이 상황엔 언제나 익숙해 지질 않는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나도 이 여잘 알고- 이 여자도 나를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아주 달랐다. 내가 이 여잘, 아주 싫어했으니까-
"사모님, 안녕하셨어요?"
밝은 목소리의 인사- 그 인사 뒤에 감춰져 있는게 뭔지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인사-
".....네, 오랫만이군요-"
아마 큰 아이를 할수 있는 만큼 모든 방향으로 설득했지만 - 실패했을것이다. 큰 아이는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나를 원망한다고 해도-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게 신경쓰이는 것이다-
단지 그 이유만이란게 조금.. 슬프지만
그러니. 차마 이 여잘 데이고 올순 없었겠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아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이 여자를 순수하게 그저 만나고 싶을순 있다-
심성까지 추악한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걸 모른다면- 정말 큰아이야 말로 큰일이었다.
그러나 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것 자체가
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거나.. 마찬가지 였으니까-
"오랫만에 뵜는데도- 여전하시네요-"
"...... "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난 가만히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앉아도 될까요?"
여자는 의자를 살짝 빼면서 물었다. 이 여자의 오만함은 아마 지견이를 쥐고 있다는 뿌듯함에서 나오는 거겠지
아마 속 좀 쓰렸을 것이다- 지견인 약삭빠르게 정회장의 딸을 데리고 왔다.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이 여잔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감히 내게 말을 걸고 있겠지-
지혁의 어머니는 씩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김 희영은 다소 겁이 났다. 우아한 미소가 아닌
살벌하기 그지없는 미소였기 때문이다. 그대로 앉으려고 했는데... 다리는 멈추었다. 그러면 안 될것 같아서였다.
" 왜요- 앉아요- 앉겠다면서요?"
사모님 앞에선 기가 죽는다. 이 분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큰 사업체의 고명딸에- 그 주식 말고도 가진 재산이
많고, 곱게 자라 그야말로 나와 전혀 다름 인생을 살아왔다. 나는 여기까지 손톱이 다 뽑혀라 매달려서 기어 올라왔지만-
이 분은 원래도 이 안에 , 이 위에 있었다.
내가 더 노력하니까.... 내가 더 열심히 하니까... 이길수 있는 어떤것은 아니었다.
이 분이 날 못마땅해 하시는 것도... 난 왜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고아여서? 혹은.....
내가... 그런 배경이 없어서? 자신 같은 배경이?
희영은 솔직해졌다.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 사람 앞에서 허세는 전혀 통하지 않는단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이번에 조금.... 놀라셨나요?"
지혁의 어머니가 고개를 살짝 치켜든다- 눈에는 평소와 달리 싸늘한 불친절함이 감돈다-
"..... 제가 지견씨랑 오지 않아서요-"
희영은 솔직하게 말했다. 놀랄 줄 알았는데 지혁의 어머니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대한게 아니었기에 말을 이었다.
".....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같이 올수 있을 줄.... 알았죠-"
지혁의 어머니의 눈은 냉담하다. 희영은 자신이 속내를 드러낸 걸 살짝 후회했다.
어떠한 반응을 원한 거였는데... 적어도- 이젠 좀 지견에게 어울리는 짝임을 인정 해 주길, 내심 바랐는데..
"이사님이라고 호칭은 똑바로 쓰는게 어때요?"
"....."
냉담한 눈은 , 아까 그 사람과 꼭 닮았다.
얼굴까지도 말이다- 끝으로 갈 수록 서늘한 목소리-
마음이
얼어 붙는듯한 목소리
그러더니 갑자기 격의 없이 말을 툭 던지신다.
"내가 너를 지견이 짝으로 안 보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단정짓는 말투였다. 희영은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왜요? 제가 고아라서요?"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로 튀어나간 말이었다.
그 말에 지혁의 어머니는 무슨 소리냔 듯이 쳐다보았다. 그것이.... 아니란 말인가?
"... 넌 지견이 마음조차 못 얻었잖니-
내가 신경쓰이는건- 니가 부모님이 안계셔서도 , 배경이 없어서도... 또 다른 이유 때문도 아니야-
넌 지견이의 성미를 부추길 뿐이란걸 알기 때문이지..... 지견인 자기 성질을 컨트롤 해줄 좀 순수한 , 참한 여자가 필요해-"
말을 잠시 멈추고 그녀는 지긋이 희영을 응시하였다. 몹시 엄한 눈초리로-
"넌 , 그러기엔 맘속에 품은게 너무 크지....."
마치 속을 읽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곤 씩 웃었다,
"지견이도 알 거야- 그래서 널 데리고 오질 않았겠지- "
희영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찌 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욕심 내지 마, 똑똑한 사람이니까- 내 말 알아듣었을 꺼야-
당신에게도.. 지견이에게도- 이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그러곤 앞의 잔을 들어 우아하게 물을 한모금 머금는다. 그러곤 냉정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깍듯하게 말을 남기고서..
"얘기 반가웠어요 , 그럼 다음에 봐요-"
그 말을 깍듯하게 던져놓고 지혁의 어머니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희영은 한참이나 물을 거푸 마시며
속의 불을 꺼트렸다. 그리고는 독한 마음을 품었다.
당신은 몰라, 당신의 첫째 아들이 얼마나 나랑 비슷한지....
그 성격을 잡으려면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걸 곧 알게 될꺼야....
불은 불에 가까운 법이야-
어설픈 물은 , 불의 화만 돋울 뿐이지-
당신 아들을 잡을수 있는건 나 뿐이야,
희영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화를 힘겹게 진정시키며 더 많이 , 더 악바리처럼 웃었다.
지견과 눈이 마주쳤다. 지견이 고갤 피했다.
희영은 맘속에 뜨거움이 서늘함 슬픔과 자릴 바꾸는걸 느낀다.
가슴께의 아린 통증을 모른척 한다- 그녀도 그제야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홀 안의 공기는 더웠다.
어딜가나 따라붙는 , 시선들
다리는 통증이 심해졌다. 다리의 따끔거림이 고통스러웠다.
의자에 앉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앉아서 들을만한 이야긴 끝난 상태였고
다들 서서 이야기들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키면 끝장이다...
그런데도 아까의 대화는 지혁의 다리를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눈은 자신도 모르게 두고 온 하임을, 찾는다... 하임이 그 이야길 혹시라도 들었을까봐서.. 그게 더 걱정이다-
믿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대화를 하고도.. 나는 장하임을 걱정하고 있었다.
잘근잘근 씹히듯 , 안에서 서로 제 목소리를 높여대는 엉망진창이 된 감정이 아니라
장하임을 걱정하고 있었다.
믿을수 없었다. 내 자신을-
그토록... 신뢰해온 내 자신을
전혀 믿을수가 없었다.
방금전의 내 세계를 뒤집어 버릴 일이 있었는데-
그분이 날 드디어 용서하듯- 이해하듯-
그랬는데.... 평소라면 날 무너뜨리고 넘겨뜨리고 갈기갈기 찢어발길 일이 있었는데....
난 장하임을 걱정하고 있었다..
..
내겐 고통이 언제나 존재했다. 이후엔 언제나 그랬다.
사고 후에 난 고통이 너무나 익숙했다.
절대로 떠나지 않는 어떤것-
그것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난 익숙해졌다.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니까-
그녀는 아플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내 품속의 어떠한 기억만 품었으면 해서.... 아까의 기억-
내 옷자락을 살며시 적시던 그녀의 숨
그것만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리의 아린 기운이 죄책감이 되어 날 찔러왔다.
살짝-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팔이 내 팔 사잇세로 빠져들어 온것은
장하임이었다. 눈칠 챈건지 팔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사람들의 목소리와는 달라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도
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그 다정함이- 맘에 다른것과는 한참 다르게-
그대로 슥 스며들어버리는 -
그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렸다.
"아파요?"
"......"
난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조금 놀랐다. 쳐다본 그 눈은 맑아서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한참 전- 몇년 전- 이 홀에 들어설때의 예전 내 얼굴이 떠오르고
난 슬퍼졌다.
차라리 울고 싶었다-
주변의 소리가 이명으로 옅어질 만큼
그녀의 얼굴만이 눈에 비쳐왔다. 오롯이-
내 표정을 보곤 그녀는 날 밖으로 이끌었다-
아까 나선 복도로- 남들이 눈치 못 챌 만큼 팔을 꽉 잡고서
그 뒷편의 계단으로 날 이끈다-
나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는 신난듯 그녀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빨간구두를 신은 발 처럼- 내 발이 아닌것 처럼
잘려나갔는데도 춤을 추며 사라졌다던 그 빨간 구두의 발처럼-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다시 날 찾을지도 몰랐다.
하민이의 다른 가족은 쳐다 보지도 못했다.
아무리 다들 날 모른척 한대도 아는 사람들과도 인사, 많이 나누지도 못했다...
그런대도 난 달아나고 있었다.
오늘은 나는 오래 준비했다. 아주 - 오래-
몸 보다도 마음이 오랜 준비가 필요했다. 그녀에게 미안해서
또는 내가 겁이나서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다리가 아픈데도
힘이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멀리 달아나 주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파티장에서 도망쳤다-
밖에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숨을 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수분을 머금은 공기가 사슬로 묶인 듯 빡빡한 가슴에 숨을 실어다 날랐다.
그녀는 밖에 있는 분수를 눈부시단 듯이 응시하면서 내 손을 다시 살짝 잡았다.
따뜻한 , 작은 손- 가느다란 손가락들-
난 차마 그 손을 놓지 못했다.
아까의 대화가 내 맘을 짓누르는데도
이 손을 놓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니.....
놓고싶지 않았다.
반대편에 잡고 있을 하민이의 손이- 조금씩 힘을 주는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 힘은 아마도 죄책감이란 감정일 거였다.
그런데..
이 손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놓을 방법이 도무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노래하듯-
가벼운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든다-
"진작 이럴걸 그랬네- 아무도 모르나봐요-"
난 대답치 못했다
그녀는 쾌활하게 웃었다- 나는 차마 웃진 못하고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이 따뜻해서 결국엔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 따뜻함이 , 좋아지는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그 눈빛에 항복을 한 자신이 싫어
피했다.
어쩔수가 없었다.
-
택시를 타고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기사는 우리의 차림이 이상한지 쉴새 없이 뒷자석을 흘긋흘긋 보았지만
나는 장하임때문에-
장하임은 나 때문에
다른 생각따위 할수 없었다-
소파에 던져 둔 전화에 20번째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한가지 걱정되는 사실은 강비서 , 어머니, 아버지 - 모두가 정신없이 전화를 하고 있단 거였다.
이러다 설마, 찾으러 찾아 오시는 건 아니겠지?
강비서는 비번을 알지만-..... 그래도 설마-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 난 불안감을 감추려
목을 다듬었다.
장하임은 여전히 화장을 한 채로- 옷을 갈아입곤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얼굴은 아직 화려한 화장이 되어있는데
입은 옷은 트레이닝 복이라니 , 조금은 어색했다. 난 타이만 겨우 푼 채였다.
" 다들 찾아요?"
눈으로 핸드폰을 본다- 난 대답치 않았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들어와서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발치의 까망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 어차피 더 있을순... 없었을 거에요-"
위로하듯이 말한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로 티가 났단 말인가?
"그렇게 , 보였어? 티가 났나?"
내 목소린 까슬까슬했다. 그 목소리에 장하임이 고갤 들어 날 보았다.
그런게 아니란 듯이- 아주 살짝-
나를 아주 닮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면서-
울수 없어 웃을때.. 내가 짓는 미솔 , 그대로 얼굴에 띄우고서
"... 아무도 당신 보고 있지 않았을 거에요- 난 다리보고 안게 아니에요 당신 눈 보고 안거지-"
깊은곳에 있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당당하게-
나는 재킷을 그제야 벗었다. 셔츠의 커프스를 푼다- 그걸 찬찬히 보던 장하임은 진동하는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걱정하는 기색이다. 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자 입을 연다-
"원래 있어 줄 시간 이상, 있었어- 당신 탓 아냐- 어차피 그대로 있었다면 전처럼 주저 앉았을지도 모르지-
그럼... 나선 이유가 없지 , 잘 됐어- "
이건 거짓말이었다. 물론 다리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자리를 비운 건 어머니한테 너무 무거운 일을 맡긴 셈 이었으니까-
어차피..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하지 못하고 왔다.
하민이의 다른 가족에게 사과하는 것도-
오랜시간 떠나 있었던.... 이젠 친구라고 말하긴 어색한 지인들과의 사이를 정리하는 것도-
하긴.. 정리할 것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아는 이들의 시선은 이미... 그들은 내게 타인이고 나도 그들에게
100만년은 떨어진 타인이었다. '상관하고 싶지 않아' 의 눈빛
그 모든 이들이 내 친구였는데 인사를 건낸 사람은 단 하나뿐이 었으니까-
내 눈을 가만히 보다가 그녀는 물었다-
마치- 별일 아닌 이야길 하듯이- 애써서 눈에서 힘을 빼면서-
화장으로 강조된 눈매를 어색하게 누그러 뜨리면서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
내 눈에 서린 충격에 그녀는 약간의 공포를 느낀거 같았다. 황급히 말을 덧 붙였으니까-
"문 틈으로 그분이랑..... 마주치는거- ....... 봤어요- 그리고는 문 닫고 한동안 안 나섰어요, 시간이 필요할것 같애서요-"
"........"
그래서 알았던 걸까, 내 다리가 아플거란걸- 이야기의 내용을 몰라도 충분할 만큼 알게 되어 버린걸까-
하민이 어머님이 하시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한가지 확실한건 조금은 덜어낸 죄책감을-
반대 쪽 손에 잡고 있었던 하민이의 손에- 온기가 없어서 잊고 있었던... 아니 의식적으로 잊으려 애 썼던 그 손을-
내가 분명히 잡고 있음을 알려 주신것과 같았다.
'잊지' 말라고-
"끝날만한 이야긴 아니니까... 또 결론없이 끝났을 뿐이야-"
내 목소리는 거칠고- 낮고- 싸늘했다....
장하임이 이 사실에 상처를 받을까봐 난 두려웠다. 그러나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 밖에 내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여자가 소중해 지고 나니... 난 이런 사실을 털어 놓을 때 마다- 이 여자의 마음 상태를 살핀다.
그것이 순수하게 이 여잘 위한건지- 아님..... 이 여잘 잃을까봐-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건지는 아직도.. 난 맘을 결정하진 못했지만...
그래, 둘 다지... 둘 다야,
내가 셔츠 단추를 두어개쯤 풀자, 그녀는 내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더니 내게 뜬금없는 소릴 했다-
"기분 전환.... 할까요?"
그런 그녀를 난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날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은 정말- 뜬금없이 느껴졌다.
속삭이듯 달콤하고 가벼운 어조로 그녀는 한번 더 말했다.
"... 내가 기분 전환 좀 시켜줄까요?"
......
그리곤 씩 웃었다. 내가 불안하도록 개구진 표정으로-
"........ 뭐...하게?"
"... 그럼 약속해요 일단은 내 말대로 하기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할질 이야기해- 들어보고 결정할래-"
그 말에 장하임은 발을 도도도 움직이며 답했다.
"한다고 약속하면요-"
"......"
왜 이런 고집을 피우는 건지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씩 웃었다.
난 그 웃음이 상한 기분을 감추는 어떤것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며, 대답했다.
그 얼굴이 , 가면따위 쓸줄 모르는 , 내가 아는 장하임이기를 .. 바라면서
대답했다.
"....... 그래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