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이는 생각보다 잘 지낸거 같았다. 북촌은 여기서 가깝지만 여기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세진이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전의 이야기따윈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치 친구로 날 대하기로 굳게 맘을 먹고 온 것처럼-
"왔어?"
많이 긴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은 모습이었다.깔끔한 안경이 돋보였다.
평소엔 안쓸때가 많았는데.. 나는 그런 사소한 질문도 입 밖으론 못내고 그저- 대답만 겨우 할 뿐이다.
"응..."
내 건조한 대답에도 살갑게 다른 말을 덧붙인다.
"좀 말랐네- 요즘 잘 못먹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볼을 만져본다-
"크게- 몸무게는 차이 나는 편 아닌데..."
세진이의 눈이 약간 매서워 지는것 같은건 나의 착각일까-
"볼살이 많이 빠졌는데 뭘- 뭐 주문할까?"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 커피?"
"...? 커피?, 파는건 진하다고- 별로 안 좋아하잖아-"
".... 아냐 커피 좋아- 커피로 해-"
그 말에 세진이가 씩 웃는다.
"긴장 하지마- 오늘은 순전히 친구로 , 너 보고싶어서 나온 거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다구- 정말로-"
세진이가 고갤 낮추며 웃는다. 그 웃음에 내가 자신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 담겨 있어서 나는 좀 무안해지고 만다.
"하여간....."
하여간 여우라니깐-... 하여간 까지는 자연스레 나오는데- 그 다음의 것은 영 자연스럽게 나오질 못한다.
" 그 사람이 허락 해 줄줄 알았어-"
"......?"
내 어리둥절하단 표정에 세진이는 씩 웃었다.
하지만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작업은 잘 되고 있어? 요즘 그림 얘기를 별로 안 하네"
세진이가 가볍게 물었다.
"응 - 거의 , 하나 큰거 끝나고 ... 이젠 좀 쉴까 해서? "
세진이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너 프리랜서 하고 쉬겠다는 이야기 , 자진해서 하는건 두번째인거 같다.."
"아.. 그때처럼 시간 확 빼서 쉬겠다는게 아니라- 바로 일 잡지 않겠다는 거야
이번꺼 많이 - 아주 오래 그렸거든-"
아주 오래- 아주 오랜만에.. 나는 온 마음을 바처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싶어서- 다른 어딴것이 아니라...
그의 웃는 얼굴이.... 보고싶었기 때문에...
세진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보더니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랬어? 서점에 나와?"
"........응"
"어차피 난 보면 알아 볼 텐데...."
가르쳐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뭔가 아는것 같은 태도였지만 묻지 않았다.
"......응 그럼 나한테 전화 해-"
전화하게 될거야- 그때가 되면...묻고 싶지 않아도 묻게 될거야....... 나는 가끔은 잊고 있었다. 작약을 작약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그토록 아름답게 생긴 그 남자가
이토록 섬세한 글을 쓴다는걸- 몹시 정교하고 몹시 애틋해서 , 여자작가가 아닌가 , 혹은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아주 다른 사람이 아닐까
늘 추측성 기사만 나오고 마는- 그러고도 곧 수그러 들수 밖에 없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피오니라는 것을, 그 피오니라는 것을
나는 가끔... 잊고 있었다.
나에게 어제 안아달라며- 내 목에 안심했다는 듯 코를 묻고
진정 안심한다는 듯 숨을 내쉬던 그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마음을- 그야말로 찡하게 만드는 그런 글을 , 그는 그 가느다란 손 끝으로 쓰고 있었다.
이제껏- 또 앞으로도 그렇겠지...
나는 왠지 목이 매여서 숨을 잠시 죽였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
"... 너는 요즘 좀 어때? 잘 되가? "
내 질문에 그는 한참이나 내가 질문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찡긋했다.
"그럭저럭? 이제 팀워크도 좀 맞는거 같고- 다들 좀 적응하기 시작한다 같아-
다들 개성이 강해서 뭉쳐지기가 쉽지 않았어- 확실히 이런건 파트너십이 있어야
좀 쉬워지거든- 다들 서로 트집잡기 바쁜 느낌이었는데- 이젠 좀 섞이는거 같아-
중간에 내가 큰 역할했지.... 삼겹살도 먹이고 - 목욕탕도 데리고 가고-
좀 이해 안되겠지만- 남자들은 목욕탕 같이 가면 좀 친해지거든-... 물론
외국인한테도 통할줄은 몰랐지만-"
세진은 씩 웃는다- 이 애가 이렇다. 소탈하다 못해 불편한 사람들까지 친해지게
만들어버린다. 섞이는 것 만으로 분위길 부드럽게 만드는...
"그래, 넌 그런애잖아, 그건 좋은 재능이지-"
내 건조한 칭찬에 , 그 너머에 품은 뜻 까지 다 알았다는 듯이 세진인 웃는다.
"예전엔 니가 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던거... 알아- 하지만 사실 난 좋은 애가 아니었어-
약은 애였지-"
세진이의 말은 솔직하게 들렸다.
그 말을 하는 표정도 그랬다, 슬쩍 웃음을 품은 얼굴
"너는 늘 남의 일도 맘 아파 하고도- 좋은 소린 못 듣는 경우가 많았지-
나도 모르지 않았어-... 사실 그 애들의 큰 착각은 그거야- 단지 용기를 주었던 쪽이 좋았던게 아니야
나는 용기를 주면서- 사실은 그 애들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조차 없을때가 많았어-
그 애들에게 맘을 써서 좋은 이야길- 좀더 좋은 결말을 주고 싶어서 에너지를 썼던건
너였는데도....
솔직하게, 그런 애들을 좀 무시하기도 했었어- 나랑 아무런 관련 없다고 생각하곤 했었거든-
돌이켜 보니까-... 남의 맘의 상처를 좀더 생각할껄 싶더라고
좀더 진심이었다면- 좀더 그런 애들에게 , 마음 어린 충고를 해 줬더라면...."
그랬다면, 내 마음이 달라졌을 거라고?
하임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고 세진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상냥한 얼굴로 웃었을 뿐이다.
"니가 옳았던 거야"
그렇다면 나도 , 내 사랑도 평안하고 평탄하기만 했어야 되는거 아닐까,
내 사랑도 그렇진 못해- 나도 아프고 다치고
질투가 나서 때론 내가 너무도 싫어져-
그 사람의 듣지 못한 말이나-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면 그게 너무도 좋은데
이게 두번째일까봐- 좀 초조해져
이젠 내꺼였으면 싶은데- 내것이 아니게 될 까봐 두려워져
그는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신 곁이 돌아올 곳이면 상관 없다고 했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소리야-
그가 눈을 떴을때- 내가 없어서 불안할까봐 혹은 내가 없다는 걸 모를까봐-
어찌되었던 그와 내가 연결된 어떤것이 멀어지면 조금이라도 달라 질까봐
그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자꾸만 돌아가고 싶은걸-
그 사람의 숨을 마실수 있는 거리에 있고 싶은걸-
이건 사랑이라기보단 구속하고 싶은 욕구일지도 모르는데 그런걸-
내가 속으로 그런 말을 생각하는 동안 세진이는 그 말을 마치 들은듯
내게 물어보았다.
"힘들지 않아?"
"........."
어떤게 힘들지 않냐는 거냐고 물어야 되는데- 이미 그가 알고서 묻는다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묻지도 못했다.
앞에 놓인 커피의 향이 , 늘 그가 내어주었던 그 커피의 향에 반도 못미쳐서
나는 세진이가 앞에 있는데도 - 쉬고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해서- 마치 그에게로 달려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대답대신 고갤 끄덕였다.
세진이는 날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힘들다면서-그런 사랑에 빠질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시키고 싶었지만- 부러 설명할 필요 없었다.
그는 마치 내 눈에 빼곡해 그 이유가 적혀 있는 것 처럼 내 눈을 읽고
내가 뭐 때문에 힘든지도 알아차린 듯 했으니까-
"힘든데 그만두기는 싫어?"
그 말에 난 고갤 또 끄덕였다.
그 행동에 세진이는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다른 말 대신 힘겹게 웃을 뿐이었다.
"참 나도 나다- 니가 보고싶어서 다른 일이 좀처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라고-
그래서 보고싶었는데-...... 너를 보고 나니까-"
세진이의 눈은 탁자위만 향하고 있다.
"너무 좋은데- 너무 힘들다-
니가 고생 안했으면 해서- 그만 두기 싫다는 니가 미운데...
미워야 하는데....... "
그는 망설인다..
결국 입을 타고 나올거면서
"뭐 어떡해, 이렇게 좋은데.."
뒷말이 너무 애틋해서 너무 간절하게 들려서 난 고갤 돌린다.
"하임아-.... 나랑 그런 사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언제든- ... 니가 갈곳이 없다고 느낄때- 그때 나를 불러
니가 안와도 내가 데리러 갈게-"
세진이는 내게 다정하게 말한다. 마치 내가 지금- 내 자리를 불안해 하는걸 다 알기라도 하는 것 처럼
세진이는 언제나- 거의 언제나 다정하다.
"니가 있을곳은 니가 정하는거야- 니가 날 기다리게 한단 생각 하지마-
기다리는게 아니야-.... 그냥 여기 서 있을 뿐인거야- "
다정한 말투에 난 그를 바라본다. 세진이의 눈빛은 정말 따뜻하다.
내가 얘에게 이정도로 특별해진 이유를 다 알수 없을 만큼-
그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내 손에 내가 좋아하는 가게의 사탕을 한움큼 쥐여준다-
"좋아하잖아- 그지?"
그의 되물음에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한다.
"응"
"...... 이렇게라도 좋으니까- 가끔 얼굴 보여줘, 힘든데.......
좋다- 어쩔수 없이, "
어쩔수 없이 좋다는 그말-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우리가 좀더 - 알맞게 만났다면 나는 세진이를 그런 눈으로 볼수 있었을까
그럼 내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거였을까-
쌀쌀한 바람이 드는 작은 창때문에 놓인 커피의 훈김이 사라질 때 까지
우린 사소한 이야길 나누었다.
내내 다정한 눈길을 나누면서-
-
몇시간이나 잠들었을까-
지혁은 한참 뒤에야 일어났다. 일어났을때의 싸늘한 느낌-
하임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놀라지 않은 자신에게도
놀라지 않았다.
그럴줄 알았다는 옅은 , 아주 옅은 실망감은 있었을 뿐이다.
약이 그제야 약효를 발휘했던 건지- 잠귀 밝은 자신이 전혀 깨지 못하고 잠들었었다.
몸에 덮혀있는 하임의 카디건- 그 가디건은 지혁에게는 턱없이 짧아서- 발이 시릴까봐서 쿠션을 비스듬이 기대놓고 간 그녀때문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외출해요- 다녀 올게요-' 그녀다운 글씨에 그 쪽지를 쥐고 잠시 현실로 공기가 돌아 올 때까지
머리를 쓸어 넘긴다.... 머리...? 딱딱한 뭔가가 잡힌다...
막 잠에서 깨어 아직 멍한 듯한 다릴 움직여 거울앞에 가니 정말 웃긴 자신의 얼굴-
"진짜....... "
별모양 머리핀이 마치 깻잎머리처럼 앞머릴 꼭 붙들고 있다.
솜씨를 보니 장하임 짓이군-..... 거울속의 자신이 우습기 그지 없는데도
바로 빼지는 못하겠다. 그녀는 한참 내 머릴 만져서 이렇게 핀을 꽃아 두었겠지
거울앞에 드러난 자신의 파리한 얼굴에 위화감 가득한 웃음만 떠올라 있다.
그 얼굴과 그녀의 손이 닿은 머리를 빤히 바라본다- 자신의 눈이 눈 앞에 가득 비치어 온다.
아릿하게 웃음을 짓고는 머리에서 한참만에 핀을 뺀다.
시계를 보니 나간지 벌써 3시간은 지난듯 하다. 아마 내가 잠들때까지 그녀는 기다렸을 것이다.
자신이 잠귀가 밝은것을 아니까... 그는 마치 시계를 본적 없는척, 스스로를 눈속임 하면서-
샤워실로 들어선다- 뜨거운 물을 틀자 얼굴에 맞닿아 오는 훈김에
혼자 되뇌인다
"기다리고 있지만 말자- ... 그건 부담이다... 부담주지 말자.....
부담주기 싫어... 싫다"
손에 진한 바닐라 향 거품이 생겨 코가 찌릿거릴때까지 머릴 감는다. 푹 잔 덕분에 머리께에서 떠나지 않던 자욱한 안개가 걷힌 느낌이다
한참을 샤워를 하고 , 나와선 로브를 걸치고 머릴 한손으로 닦는다.
나오면서 비친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빼짝 말라 있다.
이런 내가 부드러운 어머닐 닮았다니... 믿을수 없는 이야기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아주 옅은 실망감은- 자신을 피곤하게 했다.
그때 누가 벨을 눌렀다. 지혁은 인상을 썼다. 벨이라는 건.... 하임이 아니다. 하임은 어느순간 부터 벨을 누르지 않으니까-
내가 벨소리를 싫어하는걸 알아챈 것처럼-
로브의 끈을 꽉 묶는다.
모니터에 비친 얼굴은 강비서였다.
문을 열자 강비서는 좀 놀란듯 했다.
"어.... 지금 시간에.... 아니... 지금 시간이 아닌데요?"
강비서는 더듬더듬 놀란듯 내게 말하고 난 간단하게 대답한다.
"알아- 탓 안해- 왜 왔어?"
"오늘 가제본 최종 체크하신거 가지러 왔어요 편집부에 넘기고 이제 마무리 할때 됬잖아요-"
지혁은 젖은 머릴 한손으로 대충 닦으며 묻는다.
"이사가 그래?"
"아뇨- 편집부에서 독촉하던데요- 책도 내는 시기따라 조금씩 다르니까요-
조금 길어진 건사실이니까요-"
지혁은 말 없이 가제본을 내민다.
"안에 수정해야 할 내용은 포스트잇으로 적어뒀어- 색감같은 경우는 좀 사람을 더 붙여서라도
그대로 표현하게 애 좀 써- 영 다른게 몇장 끼였더라- 이사랑 회의는 따로 안해도 되?"
지혁의 사무적인 말투에 덩달아 긴장한 강비서가 대답한다-
"네- 그때 가져다 드린 그대로예요- 언론 인터뷰는 아예 사절인건 변동이 없으니-
이번에도 그대로죠- 하임씨가 삽화가인거 아는 사람은 출판 부장이랑 이사님이랑
그 정도지만, 아마도 편집인은 그림보면 아마 알아 볼거에요- 따로... 이야기 해 드려야죠 할까요?"
그 말에 지혁을 조심스레 살핀다.
지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대답한다.
날카로운 눈매가 자신을 슬쩍 향한다. 오금이 저린다- 저 눈매- 요즘엔 한동안 못 봤었는데....
"....... 왜 날봐?"
"..... 작가님이.. 직접 말하시는게-"
지혁은 그럴 맘 없다는 듯 고갤 살짝 젓는다
"그럼 제가..."
강비서는 맘이 복잡하다.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설마 싸웠나?
"그래- 그런 사항은 니가 이야기해- 내가 말하기가..."
지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한다.
"좀 그렇더라, "
그 말에 강비서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 였음을 알수있다. 그런 일적인 이야기가 하기 어색해서 그랬군-
강비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웃음기를 죽을힘을 다해 자제하며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걸 못 본척 지혁은 한 손으로 머릴 탈탈 털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이사님이 김희영이랑 개인적으로 비서들까지 나가있게 하고 이야길
많이 나누시던데...."
"......."
"설마 그런 일까지 상관 있을지는 잘 모르지만- 특별히 조심하는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지혁이 결심했던 이야길 꺼내본다
오래 마음에 다짐처럼 담았던 이야기였다. 장하임을 내 생활에 들이던 시점부터-
"아버지가 쥐고 계신 것 까진 내가 뭐 형을 주라고 말 할순 없을꺼야
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나오면 다른 방법을 쓰시겠지.... 그러다가 또 장하임이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 그건 방법이 아니지만...
어머니가 쥐고 계신걸 주어서 좀 나 한테서 , 떨어질 수 있으면.... 어머님께는 한번 부탁 드려 볼까 해-"
지혁의 말에 강비서는 놀라고 말았다. 정말 욕심 없는 사람이군-
가질수록 욕심나는게 돈일텐데- 게다가 달랑 형제라고 해 봐야 둘이다-
다 버리겠단 맘 가짐 자체가 이상한 건데.....
"왜 그렇게 놀라- 뭐 벌써 난 내가 쓰고 살 만큼 충분히 돈 벌고.... 번것도 내가 다른곳에 투자해서
나름 이득 본 것도 꽤 있었으니까.... 나랑 , "
그는 그쯤에서 말을 잠시 멈추었다.
"내가 케어하고 싶은 사람들 케어 할 만큼, 충분히 있으니까-..... 아버지가 주시는 것 보다
어머니가 쥐고 계신 양이 적어도 그게 더 탐나는건... 형이 인정이 고프기 때문이야
그 인정과 이득을 한번에 얻으면 나한테서 관심이 좀 떨어질지도 모르지.....
외가쪽 주식까지야 어머니가 주실리 없을꺼야 그거 없으면 삼촌들 통제가 안 될 테니-
부탁 드리는건 아버지는 아셔서는 안되- 그럼 어머니한테 별의 별 협박을 다 하시겠지-"
".....전화 하시게요-?"
그 말에 지혁이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전화론 설득 안될꺼야, 아마... 뵈어야지-"
"....."
사모님이 과연 그렇게 하시려고 하실지 , 강비서는 의문이었다. 이미 이사가 쥐고 있는 것도
충분했다. 이사는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인품의 부족을 다른 걸로 매울수 있다고 믿는 거 같은데...
그걸로 이미 사모님은 이미 이사님에게 많은 경고를 하신 참이라는걸 강비서는 눈치 채고 있었다..
회장님이 그걸 그냥 걱정하시는 쪽이면 사모님은 그 탓을 자신의 탓이라고 약간 자책하고 계시는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당에 그걸 순순히 이사님의 손에... 넘겨 줄려고 ...하실까?
아무리 작가님이 부탁해도?
"차는 다른 사람 시켜서 옆쪽에 주차 해 둘거에요- 일단 키는 여기 있습니다-
흰색 차에요 **사 ***모델이구요- 지하엔 원래 주차 공간이 없었나요?"
지혁은 그 말에 대답한다.
"원래 개인 창고로 호마다 배정되어 있는걸로 아는데- 안쪽에 주차 공간도 한 두개 있었던거 같애-
만약 있으면 지하로 해 놓는게 낫겠지..."
하긴 여기 와서 차라고 쓴 일은 장하민씨에게 갈때 말고 있었겠는가... 지하에 주차장이 있는지 없는지
알리가 있을까... 그마저도 불안할땐 운전도 안하는데....
"네 , 내일 중에 올 거에요- 오기 전에 한번 더 확인하고 메세지 드릴게요-"
지혁은 자신의 할말을 다 했다는 듯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옆 얼굴이 참
잔망스럽게도 아름답다- 긴 눈꼬리 끝에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의 앳띈 느낌이 묻어 있다.
"그럼 이사님하고는 안 뵈셔도 될거 같으니까- 책 완성본 들고 다시 찾아 뵐게요-"
"그래- 가봐-"
그 말을 끝으로 지혁은 방으로 돌아가 버린다- 하임씨를 생활에 들이기가 꽤나 벅차셨던 걸까-
확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웃었기에 , 하임씨의 영향이 그래도 좋구나 생각했는데
아까의 표정에 드러난건 피로에 가까웠다.
어쩔수 없는걸 참는듯한- 가지지 못할걸 노력하는 듯한 ....
짙어보이는 피로-
강비서는 스스로 하임씨를 그만큼 욕심내는 지혁이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분명 하임씨는 좋은 사람이었다. 밝은 사람이었고 또 나름대로는 자기 주장도 정확하고 바른 여자였다.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여자지만- 지혁에게 딱 맞는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장하민양 처럼 그 자리에 딱 맞는- 그야 말로 작가님 옆에 딱 맞는
여자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님은 그 곳에서 자라셨다. 사람들이 냉혹하고 사사로운
정보단 한걸음 물러서서 재산을 다투는 곳- 하민씨 또한 그랬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하민양은 .... 이제와 이런 말 해 보았자지만 정말 작가님과 있으면 그대로 그림이 될 만큼- 아름다웠다.
자신은 고작해야 사진으로 본 장면이었지만 - 실제로 본 사람들의 감동은 더 했을것이다.
물론 하임씨는 아름다웠지만 좀 애같은 인상이라서, 작가님과 어울린다곤 생각한적 없었으니까.....
작가님은 사고 후에 한송이 꽃마냥 섬세한 외모가 되셨지만
하임씨와 같이 서있는걸 생각하면.... 왠지 어색했다.... 파티때는 안 그랬다. 본인도 놀랐었으니까-
파티때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곤 믿을수 없을만큼 평소의 모습과 화장을 꽉 채워 한 모습의 갭이 컸다.
하임씨의 어떤 부분이 그만큼이나 작가님을 자신의 속에서 끌어낸 건지....
강비서는 조금 의아했다.
작가님은 자신 앞에서야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과 행동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단지 , 작가님이 벅찬건 하임씨 뿐만이 아니었다.
하임씨를 먼저 걱정했던 건 당연히 작가님이 하임씨에게 벅찬 상대일거란 생각 때문이었는데....
작가님 또한..... 하임씨가 자신의 관점에서 벅찬 사람이었다. 어쩔수 없이- 가지려면 손에 쥔거 부터 포기해야 하는
혹은 자신이 가질수 있는거 부터 놓아야 하는
지금 사모님이 가지고 계신 걸 포기하겠단 얘기가 그랬다.
작가님은 그거라도 손에 쥐여줘서 자신에게, 또 하임씨에게 쏠릴 관심을
분산시키고자 하신 것 같으니까.....
그래,
어쩔수 없는 피로감또한 , 있으신거 같다.
냉장고엔 음식이 있지만 손 댄건 단 하나뿐이신듯 거의 그대로였다.
강비서는 낮게 한숨을 쉬고 찬장 안쪽에 비어 있는 것들을 적어두고서
조용히 제본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두고 나온 집의 싸늘함이 전과 다르지 않아- 마음이 아렸다.
-
세진은 자신을 집 근처까지 한사코 데려다 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세진은 자신에게서 한걸음쯤 떨어져 걸었다.
낙엽이 부서져 길에 스며 들어 있었다. 낙엽은 떨어질 때 부터 끝까지의 좀 슬프구나
하임은 괜히 감상적이 되는 자신을 다그쳤다. 맘속으로
약해지지 말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
말 없이 걷다가, 하임은 무연히 물었다.
"이탈리아... 그립지 않아?"
그 말에 세진은 웃었다.
"이상하네... 보통은 고국에 왔으면 그런거 안 묻는데.....
니가 처음이다 , 이탈리아가 그립지 않냐고 묻는사람은....
다들 한국오니 좋으냐고 묻는데........
역시 넌 나를 다 알아 버린다니까.... 그래... 사실은 좀 그리워-
어쩔수 없이 학생 신분이 좋았던 거겠지- 그리고 그곳의 풍경도 공기도 좀 그리워-"
세진이의 눈엔 그리움이 묻어 있다.
".... 내가 너한테서 한 생각이야- 넌 언제나 내 말의 너머까지 아는거 같거든
감추는 것 까지도-"
"......그래?"
세진이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웃는다. 마치 말하기 전 부터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는 약간의 항의의 마음을 담아- 조금 더 이야기했다.
"감추는건 - 몰랐으면 해서 감추는 건대도.. 늘 들켜"
그 말에 세진이는 살짝 놀란듯 했다가- 말을 이었다.
"니가 감추는건 - 알아도 말 하지 않아- 나한테 거짓말을 하기엔
내가 널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일거야, 니가 날 어쩔수 없이 아는 부분이 있듯이...."
세진이는 바람처럼 가벼웁게 말했다. 하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세진이는 '옳은 선택' 은 아닐수도 있었지만
어쩔수 없이 '좋은 선택' 이긴 했을 거라는 것을 , 모르지 않았다.
아마 세진이의 손을 잡았으면 세진이는 절대 날 상처주지 않을 것이었다.
말하기 전에 나를 아니까- 절대 고생시키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게 가다보면 그렇게 또 결말이 날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내 마음은 너무나 완고했다.
그 완고하고 지독하게 고집스럽고 원하는게 무엇인지 스스로 잘 아는
똑똑하기 그지 없는 그 마음은 알고 있었다.
사랑은 작약 하나뿐이란 걸
그토록 잠그고 잠그고 또 잠가두었는데
작약의 눈길에, 작약의 눈끝에 매달린 애수에-
작약의 소년같은 해사한 웃음 한번에-
마음의 빗장은 마치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는 듯-
굵은 사슬은 힘없이 둔탁한 소릴 내며 바닥으로 털썩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녹이 슬어 이끼가 잔뜩 끼여 빛 들기는 힘들겠다 싶었던 곳에
어느 순간 작약이 가득 피었다. 가슴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서........
난, 그 꽃밭을 외면할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었다.
아파트가 조금씩 가까워 질 수록- 그를 더 빨리 보고싶은걸-
그가 아직까지 잠들어 있었으면 하는걸 계속 뛰어서 내심 지쳤다고 느끼면서도
평생을 이렇게 지쳐도..... 그 사람 곁에 있었으면 하는걸-
내 자리가 아닌거 같으면서도 내 자리였으면 해서... 나 욕심 내는걸-
세진이는 근처에 다다르고 나서야 손을 흔들었다.
"또 전화할께"
그는 생긋 웃었다. 나도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내가 돌아 가서 한참뒤에 돌아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 빨리 가고 싶지 않은데
발은 제멋대로 달렸다. 그가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생각 뿐이었다. 아파트에 다다라서야 숨을 골랐다.
향한 곳은 내 집이 아니었다. 작약의 집이었다.
나는 문을 두드렸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자 문이 스륵 열렸다. 머리가 살짝 젖은 그는 나를 보며 생긋 웃어보였다.
청초한 웃음이었다.
"왜 뛰어왔어-"
웃는 얼굴과 달리 안 뛰어오면 원망했을것 같은 말투로- 마치 골이 난 듯한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얼굴엔 웃음이 비쳤다.
" 빨리 보고 싶어서-"
내 말에 그는 행복함을 감추는 것 처럼 입술을 살짝 깨물며 희한하게 웃는다.
그 얼굴이 참을수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도 그랬어-"
그 대답이 가슴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다.
"다녀왔어요- "
내 말에 그는 다가와서는 날 끌어 안고서 귀에 속삭였다.
"어서 와-"
-
그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약간 넓은 칼라 끝에 내가 머리에 꽃아 놨었던
핀이 꽃혀 있었다. 난 그걸 보고 픽 하고 웃었다. 그걸 눈치챈 그가 말했다.
"진짜 -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도망가? 내가 깨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왜요- 예뻤는데.....?"
내가 정색을 하고 되 묻자 그는 무슨 소리하냐는 듯 미간 사이를 구겼다.
"이쁜것 같은 소리하네- 깻잎소녀를 만들어 놨더구만-"
골을 내는 낮은 목소리- 듣기 좋다 , 가슬 가슬한 그만의 목소리-
나는 픽 웃었다. 깻잎소녀라니.... 자신도 소녀같다고 생각은 했었나 보다 싶어서-
"머리는 왜 다 안말렸어요?"
그는 그 말에 아무말 없이 타올을 들고 다시 나왔다.
"니가 닦아 줬으면 해서 기다렸지- "
나는 그가 바닥에 앉기에 뒤에 소파에 앉고, 순순히 타올을 받아 들었다.
그야 말로- 나도 모르게....
"이제 쌀쌀한데- 여름에도 나한테 머리 싹 안말린다고 혼냈잖아요-"
그 말에 그는 웃는거 같았다. 뒷모습이라 알순 없었지만-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게 내가 너무 많이 변했어.... 당신이랑 닿아 있으면 시간이 달려가나봐
몇년이 걸릴 일이 , 자꾸만 변해-"
그 말을 끝으로 날 올려다 본다- 가지런하고 촘촘한 속눈썹- 나를 뚫어질듯 올려다 보는 눈동자-
나는 볼이 뜨거워지는걸 느꼈다.
"당신하고 닿으면 내가 좀 그런가봐-시간이 달려, "
눈 앞까지 내려온 그의 머리칼을 나는 조심스레 쓸어 넘겨 주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다- 마치 어쩔수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 앉았다.
" 잘 다녀왔어?"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 말을 물었다.
"네 잘 다녀왔어요-"
나는 단정하게 대답했고 그는 그 말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세진이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그는 알았던 것이다. 내가 왜 그런 말을 남겨뒀는지도 내가 말 안한 부분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조금은 억울하기도- 말 안해도 알았다는 그 사실에서 좀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나는 되바라지게 묻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하민씨를 만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묻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눈물겹도록 정직하다.
하민씨는 만나도 대답조차 못하는 상태인데- 그런데도 질투하는 나도 한심하지만 그러한 내게 자신이 오히려
미안해 하는 그도 ..... 우린 뭔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되어 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만한 것 조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하민씨를 배신할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가족 같은 세진이가 한번 보자고 하는데 절대 못본다고 할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잘못은 내 쪽에 있었다. 적어도- 적어도 .... 세진이는 대답 할수 있으니까-
"머리 다 말랐는데요-?"
머리카락이 가느다랗게 살랑였다. 내가 다시 물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눈 살짝 찔릴것 같은데-"
그는 조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그럼 묶어줄까요?"
그 말에 그가 귀엽게 돌아본다- 그러더니 금방 미간 사이를 구긴다.
"또 이상하게 만들려고 그러지? 니 표정이 그런데?"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묻는다. 또 당하지는 않겠다는 개구진 표정이 웃기다. 나는 픽픽 ,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아닌척 애쓰며 대답했다.
"아뇨 반만 묶어 줄게요-"
"?........반만?"
나는 손목에 끼고 있던 머릿고무줄로 그의 머리를 반묶음 머리로 살짝 묶어 주었다.
그의 칼같은 턱선이 드러났다. 그는 내가 머리를 만지는게 좋은듯 내내 눈을 살짝 감고 있었다.
늘 입던 칼같은 차이나 카라가 아닌 , 마치 테일러드 자켓처럼 카라가 넓은 셔츠를 입어
그의 가느다란 목이 보인다- 머릿카락이 그 목에 스치는데 기분 좋다는 듯
그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웃으면서-
"됐어?"
"네- 봐요- "
그는 거울로 걸어가더니 생각보다 마음에 든듯 씩 웃었다.
"이건 생각 보다는... 안 이상하네- 물론- 평생 없을줄 안 모습이긴 하지만-"
"예뻐요-"
그 말에 그 말을 싫어하는 그는 핏 하곤 심드렁한척 표정을 바꾼다- 그 말에 난 묻는다
"제본 , 가져갔어요? 책 얼마나 있다가 나올까요?"
"서점에 깔릴려면 시간 좀 있어야 겠지?.... 첫 책 나오고 나서- 뭐할까? 뭐 하고 싶은거 있어?"
그가 적극적으로 묻는다. 그런 말을 물을줄은 몰랐다. 매일같이 만나는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만날수 있을까? 계약따위 없어도- 우리는 그런 사이일수 있을까. 계속해서...
"저 소원 하나 더 써도 되요?"
-
"저 소원 하나 더 써도 되요?"
장하임이 물었다. 그녀의 감색 면 원피스는 그녀를 더욱 어려 보이게 했다.
앳띄어 보이는 얼굴- 그녀는 언제나 좀 여러 시간을 품고 있다.
어쩔때는 정말 소녀처럼- 어쩔때는 한없이 인자한, 누나처럼도-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사람이다. 언제나-
"그럼-"
나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조금 긴장되었다. 그녀는 소박한것을 바랄테지만 내겐 언제나
그런게 더 어려웠다. 그녀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보다 언제나 다른것을 원했으니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속에 있는 진심이라는 알맹이다-
그래서 그녀가 더 특별한 거겠지만-
"여행가요 우리-.... 나 거기 가 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들렸다.
"여행? 어디?"
"당신 삼촌이 남겨주신 별장이요- 거기 가 보고 싶어요- "
말했었지만 먼저 말할줄은 몰랐어서 놀랐다.
그곳은 조금 외딴 곳이었다. 많이 떨어진...
"거기? 가보고싶어? 사실 조용한 곳이라 막 재밌고 그런 곳은 아닌데-"
"네 가보고 싶어요- .. 거기서 당신 그려보고 싶어요- 아틀리에 있다 그러지 않았어요?"
아틀리에- 그 빛이 가득 드는- 아주 얇은 창틀이 작은 사각형인 유리를 감싸고 있는
그곳은 , 그야 말로 거의 해가 찾아오길 원하는 장소라고 밖에 이야기 할수 없을 정도로
빛이 가득 드는 곳이었다.
"있어-... 그런데 나를 그린다고?"
그건 의외의 이야기였다. 누군가 날 그려주는 일이라고?... 평생 없을줄 알았던 일이었다.
하기사 이 여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이렇다니까.....언제나 하지 않았던 할거라고 생각한적 없는 일만 하게 된다.
귓가에 박힌 만지면 아릿거리는 붉은 피어스처럼-
"네- 간직하고 싶어요- "
이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휘둘리는 내가 이상한걸까- 간직, 이란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으면 되지- 그럼 간직하지 않아도 상관 없잖아-
" 그려줘- 40대에도 50 대에도- 그때까지 내가 그리고 싶을만큼 당신에게 좋아 보일지는 모르지만-"
내 말에 그녀는 싱긋 웃었다. 마치 그 말에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했다는 듯이-
"당신은 50대가 되도- 멋있을 테니 당연히 내가 영광이죠-"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한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품에 쏙 들어오고 따뜻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는 언제나 내 품에 안겼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품에 얼굴을 묻는다.
강비서는 의아해 했지만- 어떻게 그런것도 욕심내지 않을수 있냔듯한
표정으로 , 나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것은 단지-
아버지가 형을 통제하고 싶어서 내 내놓으시지 않으시는 것 뿐- 그것조차도 형에게 다 쥐여 줘도 난
상관 없었다.
이 여자와- 글과- 잊지 않고 반대편에서 서 있을 그녀만 있으면
난 부족할 것이 없었다.
이 여자를 해칠 그런 것들을 다 때어낼수만 있다면야- 아무런 ,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런건 이미 내게 소용있는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한낱 바람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는것이었다. 그저 스러질 것-
그는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꼭 안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
희영의 간곡한 부탁때문에 지견은 희영의 집 앞에 와 있었다.
벨을 누르자 다른 물음도 없이 문이 열렸다.
"왔어?"
반기는 목소리가 , 반갑지 않다.
이 여자의 홈웨어는 도저히 지견의 기준에선 이해가 안되는 옷이었다.
어머니는 늘 잠드시기 직전이 아니면 옷을 꼼꼼히 갖춰 입고 계셨다.
줄곧 그게 불편하지 않으시나 싶었었다. 그게 습관 정도가 아니라 몸에 배인 일이라는걸
알고서야 그런게 배경의 중요성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하물며 실크라니- 잠들기 직전도 아니고- 내가 온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저런 옷을 입고 있는건지...
지견은 이미 희영에게 좀 실망한 참이었다. 그러나 희영은 마치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대했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 처럼, 예전처럼 돌아갔다.
"뭐야- 무슨 일인데-"
희영은 웃었다.
"급하게 굴지 마- 전에 약속한거 지키기에 좀 도움 받을까 해서-
와인? 아니면 위스키나 꼬냑?"
"와인이면 돼-"
희영은 씩 웃으며 와인을 지견앞의 잔에 따랐다.
그러고 나서 종이를 내밀었다. 희미한 사진이었다. cctv로 찍힌 사진 같아 보였다.
아주 희미했지만 누워 있는 사람은 장하민처럼 보였다. 지견은 너무나 놀랐다. 이 여자가 대체
이 사진을 어떻게 얻었지? 더군다나.... 이런 사진을?
희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마치 원래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야기 하는듯이-
"사모님은 자주 가시나 보더라, 아직- 당신 동생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가족의 방문이 적더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견이 눈을 치켜떴다. 빨리 본론을 이야기 하라는 의미였으나
희영은 이런 기회가 있으면 절대로 순순히 뭘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희영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이해하는게 중요해- 당신에겐 이미 이 여자애 쯤이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싶겠지만
당신과 달리 당신 동생은 마음 여는것도 안 쉽지만- ..... 한번 준 마음을 잊는 성격도 아닌거 같던데...
당신은 장하임이란 여자를 어떻게 건드리나 싶었겠지만 , 반대야
이 여자애를 건드리면- 자연스레- 장하임이랑도 끝나게 될걸?"
김희영은 와인을 머금으면서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구두점 없이 우물거리는 이야기는 지견은 딱 질색이었다.
"....? 왜 그렇게 될꺼라고 확신하지?"
"그래서 이해가 필요한거지... 죄책감-"
"......."
죄책감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 자식이 얼마나 스스로를 자책했는지 쯤은 , 녀석은 사고 후에 유령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그 녀석이 말을 하는 순간은 장하민의 어머니를 마주하는 순간 뿐이었다.
한시간을 기다려도 3시간을 기다려도 말따위 하는 놈이 아니었다. 그런 놈의 유약함에 자신은
오히려 강한 확신을 얻었다. 자리는 하나고- 앉을 이도 , 이젠 하나구나 싶어서 안심을 했었단 말이다-
그래도 이미 시간이 지날만큼 지났다. 근데 무슨?
"당신은 그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아니야- 장하임이란 여자와 내가 느끼기엔
건조한 사이가 아니었어- 당신이 안 볼때- 그 여자는 시큰둥한척 했지만-
당신 동생은 내가 그 여자랑 이야기 좀 했는걸 가지고 나에게 으르렁 댔지- 마치 내가 그 여자에게 해로울걸 안다는 식으로 위협도 하던걸?
거기서 알았지- 둘은 건조한 사이가 아니야-
당신 동생이 지금 느끼는 죄책감은- 아마 상상 초월이겠지- 차라리 장하민이 죽었다면
잊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장하민은 안 죽었잖아- 사라지지 않지...
자신이 저지른 가장 잔혹한 실수, 잘못이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에 의문을 품게끔 만들거야.... 말하자면... 자격이지-
내가 저 애를 저렇게 만들었는데.... 내가 행복해도 될까? 그런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될꺼야, 인간은 원래 간절한 곳에 매달려-
그것에 매달리는건 본능이거든- 어쩔수 없는-
그러니까 지금쯤 일깨워 주는 것 만으로 장하임을 놓칠꺼야- 당신 동생은 그 여자 놓치면
끝이야, 재기 불능일거라고-"
지견은 살짝 웃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냔듯이
재기불능- 뭐 되든 안되든 듣기에 좋은 단어였다. 애초에- 그 녀석이 날 화나게 하는건 하나였다.
완전히 물러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것
그런게 없었다면 아마 다른 기업의 형제들처럼- 적어도 가식이라도 친한 척이라도 할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재기불능? 그 정도로 대단한 여자가 아니던데?"
지견이 믿을수 없단 듯 물었다.
" 동생한테는 다를꺼야- 뭐, 재산이나 외모를 보고 있지 않을수록 있잖아-"
"뭐, 좀 곱상하긴 하던데- 전의 애를 생각해봐-"
김희영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게 아니야- 그 여자가 대단한건 그런 포커 페이스를 흔들었다는데 있어-
아마 하나님은 희망일껄- 그걸 부수는건 힘들지만 뺏기는 쉽지-.....
그 여자도 알고 있을꺼야 전의 여자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냥 대충 느끼기론 그런데-
열등감에 불만 지펴주면 돼- 이쪽에 관심이 쏠릴수 밖에 없는 이유를 주면 어쩔수 없이
열등감이 들 테고- 손 안대도 스스로 사라질 확률이 높지"
지견은 이를 드러냈다.
"확률게임은 안해- 손해 볼 짓 시키지마-"
"확률 게임 아냐- 확실히 망가질거야- 날 믿어-
단지 당신 입으로 약속하한 거야-"
"무슨 약속-"
"장하민은 코마야- ... 아직 뇌사가 아니라고- 계속 식물인간이었지만- , 적어도 희망부터
걷어내 보자고- 방심한 사이에- 장하민을 뇌사로 만들거야-"
"........?"
"그리고 장하임이 떨어지고 나면- 그때 죽으면 최적이지.... 당신 동생이 남은 희망을
싹 다 잃고 재기할수 있을거 같아?"
김희영이 와인이 담긴 와인잔을 날카로운 손으로 삭 훑었다.
지견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약속이 필요한지 알수 있으니까-
"한배를 탔다는 확언이 필요한거군"
"그래-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득이니까-"
무서운 여자였다. 목숨 쯤이야 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자신은 미처 생각지 못한 거였다.
그 녀석은 놀랍도록 정에 휘둘리는 자식이라는걸 난 잊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지견은 이 방법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와인을 한모금 머금었다.
아까와는 달리 와인이 더 없이 향기롭게 느껴졌다.
진한 향기 속에서 물었다.
"더 뭘 원해? 말해- 들어줄테니-"
김희영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웃음은 와인보다도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