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앞에 내가 내린 따스한 커피가 놓였다.
그녀는 내게 묻지 않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결국 이렇다 할 결론 없이 그렇게 헤어졌어- .....그럴걸 솔직히... 왜 나갔는지 모르겠다.."
내가 힘없이 입으로 꺼낸 그 결말에... 하임은 별 다른 말 없이 날 그냥 바라보았다. 하지만 책망하는 눈빛은 아닌거 같다.
그저 바라 볼 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해한단 듯한 눈빛이다.
나는 내가 무능해진것만 같아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수 없음이 슬퍼지고 만다.
아니.. 무능했다.
어머니는 강비서의 말 대로 고민하고 계셨다. 이미 형이 쥐고 있는게 많다고 느끼신 것이다.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줘봤자 얼마나 줄수 있을까 묻는 그 얼굴- 어머니의 얼굴에 묻은 절망을 난 보았다.
역시... 어머니도 후회하고 계신 것이리라.. 그때 형을 잡아주지 못한것을, 좀더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 못한것을...
누구나 실수를 통해 배운다지만... 자식에 대한 것이라던가.. 가족에 대한 것....
그런것은 실수같은게 없을수 있었더라면 ..누군가가 가르쳐 줄만한 지침이라도 있었더라면.....
거칠기가 그지 없는... 우리들의 인생은 조금이라도 부드러워 졌을까...
어머니는 내게 하임이와의 관계를 물으셨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무리 지킨다 해도.... 아니 아무리 아버지에게 안간힘을 다해 들키시지 않으신다고 해도... 혹시라도 벌어진 틈새로...
내가 이 여자를 잃게 될까봐 난 , 진실 이전에 겁부터 났으니까-
"그래도 어머니를 뵈었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잘했어요-"
달콤한 그녀의 입으로 내리는 명쾌한 해답- .....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그렇게 정식으로 뵌 것 차제가 오랫만이었는데.. 단 둘이-뵌것은
정말로 간만이었는데도....
우린 다정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신을 아끼세요-... 다른 말 안 들어도 알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당신을 보는 눈빛이 그러셨거든요-....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좀 불안해 하시는거지...글쎄..... "
"에이 불안과 사랑은 다르죠-..."
손 끝이 무연히 시려왔다. 겨울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그녀를 완전히는 지키지 못했다는, 옅은 불안감에서 오는걸까?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게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녀가 나를 선택한걸 , 그리고 그 친구를 놓은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가 같이 하임을 데리고 유학을 가고 싶다고- 잘 되면 데리고 갈 꺼라고 이야기를 했을때 나는 그게
몹시도 부러웠다.
글이야 나도 가서 쓰면 될 일이었다. 그곳이 어디라고 해도- 그녀가 행복해 하고
둘이 있을수 있다면 .....
서로가 다른 곳에 눈을 두지 않고 서로만 볼수 있다면...
하지만 나에겐 하민이가 있었다. 아버지보다- 형보다 더 큰 .. 이곳을 아무리 떠나고 싶어도
떠날수 없는 이유-
나는 요즘 그 생각을 안하려 무의식 적으로 그 생각을 피하고 있었다.
하민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의 나는 그런것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하민이가 돌아올꺼라고 굳게 믿으려고 '애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순간 그 믿음을 살짝 내려놓자.
하민이가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 남들이 그토록 말해온 그 이야기가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우리가 나눈 웃음, 사랑- 그녀를 안았을때의 따뜻함 우리가 속삭이던 이야기들-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우리는 아주 많은 추억을 남겼다. 그녀는 나를 사랑할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이기적이고 나만 생각하고- 겉치례에만 매달려 있던 나를 - 진실된 사랑에 눈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망망대해 같던 내 인생에 유일하게 떠 있던 부표였다. 의지하였다. 그런데
그녀를 난 내 손으로 눈을 감게 만들었다.
유일한 부표를 잃고- 나는 정적이 흐르는 물결하나 일지않아 얼었대도 믿을
매끈한 그 위에서 웅크리고만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눈 앞의 하임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는데 마치 아는 것 처럼-
알기라도 하는 것 처럼 바라본다.
나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이 여자를 내가 망칠까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길이
이토록 간절한데- 그녀가 불행할까봐서 -.... 지금 나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이 여자가 , 이토록 남에게 관대하고 자상하고 상냥한 그녀가
희생에 익숙한 그녀가-
혹시 , 착각을 하고 있을까봐-
사랑이 아닌데-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을까봐 나는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
앞에 앉은 그의 표정 변화가 , 나는 너무나 낯설었다. 불안해 하는 눈빛이 무엇때문인지 대충은 알것 같았다.
설마 그 어머님이 욕심으로 그럴수 없다 한건 아니실테고-... 다음 타겟은 나일까봐
두려워하는거다.
그게 아버지던 , 형이건 내게 피해를 입힐 거라고 , 솔직히 난 그 두려움이 선뜻은 와 닿지 않았다. 내가 뭐 대단해서 나한테까지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는 내게 무섭게 경고했지만 난 , 솔직히- 단박에 와닿진 않았으니까..
나는 그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싶었다. 언제나 어둠이 남들보다 더 얼마간 짙게 내려 앉을 그의
어깨위의 어둠을- 그리고 그 무게감으로 잠 못이룰 이 남자를 걱정하였다. 나를 걱정할때가 아닌데
그럴 때가 아닌데..... 그는 온전히 스스로만 걱정해야 할 때인데 이 사람은
마치 내게 자신을 다 줘 버린것처럼- 내가 사라지면 자신의 일부까지도 잃을 것 처럼 나를 바라본다.
나는 말 없이 내 가까이 놓인 그의 손을 , 잡아 내 얼굴에 가져다 댔다.
여전히 손은 얼음같이 차갑다. 내 얼굴에 닿은 그의 큰 손이 마치 대리석처럼 싸늘한데-
왜 내마음은 이렇게 따뜻해지는건지 멍청하다 느낄 정도로 심장이 동요한다.
"얼굴 따뜻하다-"
어느새 웃음이 스며든 눈으로 그가 속삭인다-
"그죠? 난 당신 손이 닿으니까-.... 마음이 따뜻해지는데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날카로운 눈매 사이의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장하임 닭살이야-"
곧 눈매를 아주 귀엽게 구기며 웃는다.
"뭐 어때요 서로 유치해 지는게 연애라면서요-"
그는 그 말에 미소짓는다.
"그래- 그런거야 니가 그러니까 좋다고- "
단 둘 뿐인데- 우린 좁은 테이블에 붙어 앉아 서로 속닥인다. 마치 누군가 우리의
얘기를 옅듣기라도 할 것 처럼- 서로에게만 서로의 말이 들릴것 처럼 속닥속닥 속닥인다.
그는 내 손을 살짝 가져가더니 빤히 쳐다본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잠시 멈칫했더니 그는 의외의 이야길 꺼냈다.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매니큐어 바른걸 한번도 못 본거 같네- 발톱도 그렇고.."
나는 언제나 곱상하지 못한 손이 컴플랙스였던 지라 손을 살짝 뺀다
"항상 그림 그리니까- 손톱은 아주 금방 망가지거든요- 아주 금방-"
그가 되 묻는다.
"그래서 안발라?"
"네... 그리고 손 뼈 마디가 굻어서... 안 예뻐요- "
그 말에 정색을 하고 대답하는 그-그의 얼굴엔 진지함이 묻어나오고 나는 웃음이 난다.
마치 국정 문제라도 다루는 듯한 진지한 얼굴-
"예쁜데... 내 눈엔 너무 예쁜손인데? 당신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색들만 아름다운게 아닌걸, 그런 색을 쏟아낼줄 아는 - 손이 가장 아름다운데 왜-"
내가 내 손을 다시 내려다본다-
정말 이 남자의 눈에 얼마나 두꺼운 콩깍지가 씌여버린건지... 나는 히죽 웃고만다. 닭살돋는 대사를 눈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말도 안 멈추고 한다. 이 사람과의 연애는 좀 다른게 많긴 하다. 전엔 연애 초반이라도 이런 말을 해 줄만큼
내 모든걸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었던거 같으니까-
"안 예뻐요-"
"예뻐-"
"안 예뻐요-"
"예쁘다니까?"
말도 안되게 유치한 실랑이 끝에 난 머릿속에 뭔가 떠올라서- 잠시 기다리라 해 놓고서
집에가서 화장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걸 들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아직 상자를 뜯지도 않은 채인 네일 락커였다,
바르리라곤 생각도 못한- 펄이 섞인 핑크빛- 예전 삽화를 그려줬던 작가가 외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내게 선물이라며 준 거였다.
나는 그때 그녀의 생각을, 좀 나쁘게 말하면 정말 성의 없다고 생각했었다.
미술 하는 사람에게 네일이라니....물론 손이 예쁘다면 상관 없겠지만- 나는 그저 생긋 웃으며 받았고- 그 뒤 잊고 있었는데-
그는 그걸 받아 들고는 탈깍 하고 상자에서 꺼냈다. 그러곤 웃었다.
"이걸로... 뭘..."
그의 가느다란 손에서 작은 네일락커가 또르르 구른다.
"나한테 발라주세요- 손가락 열개- 다-"
내가 심술궅은 척 말하고- 그 말을 들은 그가 씩 웃는다. 좀 당황할까 해서 해 본 말이었는데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일 락커를 흔든다- 안의 펄이 물결친다.
"그래- 발라주지 뭐- ... 이것도 처음이네- 나도 한번쯤 그래보고 싶었거든-"
".....?"
"남들은 다 한번씩 그래 보잖아- 연인의 머리를 서투른 손길로 묶어준다거나... 이런걸 발라 줘 본다거나..... 그런적이 없었어... 한번도 다른 사람한텐 발
라준적 없어- 좀 삐뚤 빼뚤할 텐데 괜찮겠어?"
사려 깊게도 묻는다. 나는 웃음이 났다. 그가 발라 준다면야 - 그것이 무엇이라도 그 자리에서 꽃으로 피어버릴 것이다.
삐뚤빼뚤해도, 당신이 발라 준 거니까 안 지울건데..
"그래요-괜찮아요 - 최선을 다 해봐요"
그는 씩 웃더니 테이블위에 손을 내려놓자 하나 하나 집중해서 손에 분홍색을 채워 넣는다.
전에 화장을 지워놓은 꼴이 너무나 투박했기에 이번에도 그럴까 했는데 아니다- 오히려 잘 하는거 같다.
엄청나게 집중하는 얼굴- 그의 숨이 닿는 손이 간질간질거린다-
분홍빛으로 매끈하게 물드는 손가락을 내려다 본다 - 나는 완전한 오른손 잡이라- 학창시절에 잠시의 일탈로
칠했을 때도 왼손의 결과물은 처참했다. 이번엔 왼손도 깔끔한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다.
그는 고개를 바싹 붙인체 내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참으로 열심히도 바른다-
"그런데 이거 얼마나 갈까?"
그가 여전히 집중하며 살짝 고갤 들고 물었다.
"글쎄요- 당신이 발라줬으니까-... 내가 관리 잘하면... 2주는 갈까요?"
내가 갸웃하고 대답했다.
"2주? 그것밖에 안가?"
그는 그 사실에 놀란 것 같다... 그리곤 내게 안 듣길만큼 조용히 중얼거린다.
"여자들이 왜 그토록 바쁜지 이해가 간다.."
웃음이 나는 발상이다...
전에 하민씨는 어땠을까... 엄청난 숙녀였으니 아마 손톱을 항상 어떤 색으로든 물들이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일일이 그런 생각까진 해 본적 없었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수 없는 얼굴로 내 손을
깔끔하게- 두번씩 발라 은은히 빛나는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여자들은 손톱 색을 옷 갈아입듯 바꾸고 그걸 눈치 채는지 못하는지 아마 남자친구에게 기대할 것이다.
그런게 부족한거다, 나한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당신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일부러 시간을 내 손톱까지도 신경 썼다는걸
알아주는 그런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것인데......
작약은 네일락커 뚜껑을 돌려 닫으며 고갤 으쓱한다. 끝났다는 듯이..
"와- 진짜 -"
"예쁘지?"
전혀 악의 없는, 말간 낯으로 순진하게 묻는 얼굴- 나는 웃는다
"네 고마워요-당신 생각보다 .. 아니 생각만큼! 정말 꼼꼼하네요 .. 나보다 한참 낫네-"
그 말에 그가 씩 웃는다. 물론 글씨 써 놓은것만 보고도 알긴 했다.
그의 글씨는 말 그대로 새초롬 하다-한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내가 좋아하 하는 그의 정갈한 글씨체-
그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생각하는 듯 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럼 이리 와 - 발톱도 내밀어- "
이 사람이 정말- ! 나는 슬슬 뒤로 도망치며 대답한다-....
"손으로 충분해요- 바...발은 됐어요- 더럽기도 하고-"
"안 더러워-"
"더러워요!"
"안 더럽다니까?"
저놈의 고집! 단 한마디도 양보를 안해 하여튼!
"더럽다고요!"
또 아까같은 상황이라 내가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릴 내자 그는 찡그리며 되 묻는다
"진짜 안더러워 이리 와- 앉아-"
나는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 워.. 원래 발이랑 손은 다른 색으로 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됬어요-"
그 말에 그가 피식 웃는다 내가 그런걸 알리 없다는 듯한 얼굴로
저건 무시인가? 나는 발끈하게 된다.
"누가 그랬어?"
".... 채..책에서요-"
그의 눈에 의심만이 가득하다.
"무슨 책을 읽었길래 그런 말이 나와?"
그의 짗궃은 표정에 난 계속 더듬거리고 만다. 사실인데...
"잡지책에서요-"
그는 그 말에 낮게 흐음 하는 소릴 내더니 내 팔을 끌어다 기어이 자신 옆에 앉힌다.
그리곤 자신의 다리 위에 낮은 쿠션을 올리더니 내 발을 끌어당긴다- 내 발에서 방문자용 이라고 적힌 슬리퍼가 툭 하고 떨어진다-
" 내가 발라주고 싶어서 그래- 다음번엔 다른 색으로 발라줄게- 내가-"
고작 발일 뿐인데- 왜 그가 손을 살짝 대자 얼굴이 붉어지는 건지 알수 없다.
연애란게 이렇게 긴장의 연속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는데- 그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아릿아릿
찌릿찌릿하다- 그는 길어진 머리를 내리고서 내 발에 가느다란 손으로 붓을 가져다 댄다-
"발톱 되게 작다-"
그가 나를 보면서 속삭인다
"손톱도 작더니- ... 발톱은 더 작네- 엄지 발톱이 내 엄지 손톱만 한데?"
그가 중얼거린다. 내 발을 자기 손과 비교해 보면서- 내가 피식 웃는다.
"당신이 평균보다 손이 크기도 하죠-"
그가 그 말에 날 쳐다본다- "큰편이라곤 생각해 본적 없는데.. 긴편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살작 팔락거린다. 정말 길긴 기네... 내 손을 내려다보니
비교도 안되게 가느다랗고 예뻐보인다. 끝이 예쁘게 오므려지는 손톱- 나는 투덜거린다
"에이 자랑같이 들리네요-"
그가 그 말에 피식 웃는다.
"어머니가 그러셨었어- 피아노 치기에 좋은 손이라고-"
그립다는 듯한 말투기에 난 되물었다.
"피아노 치기에 좋은 손이요 ?"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이 길다고들 하더라고- 아마 건반때문이겠지만-"
그는 그 이야길 꺼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발톱으로 시선을 돌린다-
"피아노 .. 친적 있어요?"
그 말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은 커다랗고 우아한 하얀 그랜드 피아노에 - 창으로 드는 달빛-
그 피아노 앞에 너무나 잘 어울릴 그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 ,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하민씨의 모습이다-.. 나는 곧 생각하고는 후회한다
가슴이 찌릿- 하고 아파와서... 잠잠하던 마음이 탄산수로 변한 것 처럼 가슴이 따끔따끔거린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두 사람이 사랑한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나는 그 생각을 피한다 피한다 하면서도 , 때로 떠올려 부러 가슴을 다치게 하곤 한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그저 가벼이 대답한다.
"가끔?- 잘 치진 못해 배웠어도 끈기가 없었어서- 뭐든지 금방 그만뒀거든....
그래도 어머니가 고집 부리시면서 배우라고 하니 배우긴 했어- 안그럼 배우지도 않았을껄- 간단한 것 정도는 치지만 굳이 쳐야겠다.. 뭐 이러질 않아서"
바싹 다가선 그는 중지 발가락에 온 정신을 집중한채 분홍색을 채워넣고 있다.
"난 피아노 치는 남자를 늘 만나고 싶었어요-"
그 말에 그가 고갤 들고 웃는 날 빤히 바라본다- 삐뚤어진 눈썹으로-
"늘?... 그 동안은 없었나 보군-"
조금만 화가 나도 아니 , 하다못해 조금만 질투를 해도 그의 말투는 몹시 딱딱하게 변한다.
전에 내가 들었던 말투들은 다 방금 전 말투같다. 늘 화가 나 있었던 걸까- 궁금할 만큼-
"그런건 여자들 다 꿈꿀만한 로망이죠- 피아노 치는 남자- 멋있잖아요-"
그 말에 그가 냉소적으로 웃는다- 픽 하고 바람 내는 소릴 남기고는 다시 발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당신 손이 정말 예쁘거든요- 그 손으로 피아노 쳐 주면 행복할것 같아서 그러죠-"
새침한 표정의 그의 입술이 살짝 꿈틀댄다.
"됐어 , 다 까먹었어... 아부해도 못쳐-"
아부한다면서 씩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건데... 나는 그런 그가 귀엽다고 생각하고 만다.
"무슨 곡 좋아하는데?"
관심 없는 척 발가락만 보면서 묻는다... 진짜 귀여워 이럴때-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한다.
"캐논.. 캐논 쳐 줘요- "
"캐논? .. 그래도 칠줄 아는거 말하네 - "
그 말하고는 그가 웃는다- 그는 그 말을 하고 마지막 발가락을 바르곤 얌전한 동작으로
매니큐어를 잠근다- 그리고는 내게 돌려준다-
"마를때까지 발 내리지 마-"
엄한 표정으로 경고한다- 나는 주춤거린다-
"조심할게요 다 마를때까지- "
그가 조용히 덧 붙인다. 모르는 사람들은 놀랄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발 내리면 다가가서 안는다?"
..... 이건... 또 협박인가?
"이거 당신이 힘들게 발랐는데 다 뭉개졌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그가 씨익 웃는다-
"뭐... 그럼 또 발라주면 되지- 좋네- 붙어있을수도 있고-"
"벗겨지면.. 다시 발라줄 거죠?"
"...."
내 얼굴이 이상했나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생각이었는데,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 하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공백-
"그럼-"
그의 간결한 대답에 나는 목숨이 길어지는 시한부 환자같은 기분이다.
그 대답에 숨통이 트인다. 이상하지.. 그 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제야 후 하고 숨이 편안하게 쉬어지는 것 처럼,
"그럼 언제라도 발라주지 뭐- "
그는 자신에게 확인하듯이 한번 더 말한다. 그 말이 나오기 까지의 아주 잠시의 공백이 있다.
내 맘이 조급해 지는건 이런 공백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너무 좋다.
이런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게 정말 믿기지 않을만큼- 누군가는 그러겠지 분수에 어긋나는 걸 욕심내니까 자꾸만 불안해 지는거라고-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바보 멍청이같다고 몰아 붙여도 내 마음이 가서 안긴 곳이 이곳이었는걸-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날 밀쳐냈더라도 질질 짜며 그에게 매달리거나
혹은 어쩔수 없이 갈곳 잃었을 내 사랑이 ,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게- 그가 먼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내가 그 손을 어떻게 잡지 않겠는가... 어떻게 잡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의 만류에도 그의 무릎 위에서 발을 살며시 내려 놓았다. 물론 그가 소중히 발라준 색을 안 뭉개지게 조심하면서
그리고 그에게로 다가선다. 그는 내 행동에 살짝 놀란듯 하다 . 하지만 곧 고갤 내 쪽으로 향하면서 다가선다.
내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간다. 내 손이 그의 얼굴을 스친다. 반듯한 얼굴,
나는 말 없이 그를 응시한다.
그도 흔들림 없이 날 쳐다보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적어도 완전하다.
그런데 왜 우리 사이엔 뭔가 모자라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드는걸까- 어째서-
우리 사이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은 대체 무얼까- 나는 그의 얼굴을 자꾸만 쓰다듬는다
그는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얼굴이 어둡네 무슨 생각해?"
그가 그런 걸 단도직입적으로 물은건 처음이었다.
나도 얼버무릴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나는 조금 두려워요-"
내 목소리는 내 귀에도 내 목소리 같지 않게 울렸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말해 주는 것 처럼
그리고 몹시도 대책없게 솔직하고 - 사춘기 소녀처럼 유치하기도 했다. 일기장에나 적으면 좋을만한 단어였으나
그는 그 말을 들었다.
그는 그 말에 놀란거 같앴다. 약간 상처받은거 같기도 했다. 표정이 그랬다.
"좋은데 왜 두려워?"
물으면서 이유를 아는것 같은 얼굴이라.. 난 대답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또 잠시는 망설였다.
"당신이 너무 좋은데.... 내가 남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요-"
다 바른말은 아니었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남의 자릴 탐내는게 다가 아니었다.
이 행복이 지속되지 않을까 두려운거였다. 혹은 이 순간이 결국엔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
그는 내 얼굴을 그저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안타까워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도 망설이는 것 처럼 보였다. 다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 하민씨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말을 멈췄다, 눈은 애원하는 듯이 날 향한다.
내가 어쩔수 있는게 아니라는 듯한 얼굴
그래도 난 결국엔 하민씨 탓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건 약점을 건드리는 거고 그건 치사한 짓인걸 알지만....
이 답답함이 다 그녀 탓처럼만 느껴진다.
그녀를 덜어내면 좀 편해 질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탓하고 만다.
"하민씨의 빈자리를 다 채울수는 없나봐요- 아니... 하나도 신경 안쓴다고 했지만-
내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겁이나요- "
"......"
대체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원하고 있는건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데 그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내가 한심하다.
내가 더 조리있게 말하면 내 마음을 알까? 그저... 이해하지 못해도 좋으니 내 가슴의 불안감을 종식시켜줬으면 좋겠다.
아주 오랫동안 내 곁에 있어주겠다고 걱정 말라고 이야기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설마 거짓말이고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해도
그 말이 너무나 간절해진다.
그러나 그는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일은 자신도 지긋지긋하게 겪었기에
쓸데없이 희망을 주진 않겠다는것 처럼
그는 잠시 망설이다 내 머리께로 손을 살짝 올리곤 대답했다.
"하임아.... 그런 생각 하지 말아... 너는 하민이랑은 완전히 달라- 니가 하민이의 자리를 채우는게 아니야... 처음에도 말 했지만-
한쪽 손은 하민이가 잡고 있을지도 몰라..."
이럴때까지 솔직하다니까- 이럴땐 거짓말이라도 나뿐이라고 해 주면 좋을텐데..
나밖에 없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해주면 좋을텐데...
팩트 폭력이라는 말이 있다더니... 그 팩트는 나를 갉아먹고 있다.
"하지만 그 공백을 내가 너로 채운다 , 그런 생각은 정말... 하지마- 너 아니었으면 난 다시 이렇게 웃을일도 없었을꺼야..
분명 니가 지금 앉은 그 자리는 니꺼야- 그러니 그 공백을 채울수 있는것도 너 뿐이지...
그러니까 의심 하지 마- 내가 하민이의 페이지를.. 차마 못 넘기는건......"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본다. 마치 내가 어디있는지- 지금 자기 말을 듣고 있는지 확인하듯이
"솔직하게... 지금은 죄책감인거 같아... 사랑의 끝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더니...
그게 끝인줄도 몰랐던거지"
그는 쓸쓸하게 말했다. 끝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은 사랑중이었고-.....
내가 알기론 그 사랑은 끝이란게 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끝이란 이야길 자기 입으로, 아주 힘겹게라도 꺼내었다.
"사실 내가 하민이라면... 지금 깨어난다고 해도 나랑은 헤어질거야 단박에...
내가 어쩔 시간따위도 없이 날 보고 싶지 않아질테니까.....내가 가장 미울거야- 원수 이상으로 미울거야...
물론 옆에서 도와줄 의향이야 당연히 있어- 그런건 당연히 내가 책임 지기로 한 거니까-
그래도 예전같이.... 서로만을 위한 사이는 될수 없을거야......
무엇보다.... 하민이가 사랑에 빠졌던 나는 .... 내 안에 없어- 사라진지 오래야.... 그녀가 만들었던 나는 내 안에 안 남았어.. 하나도.. "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간혹 간직해서 툭툭 무방비하게 튀어나오곤 하면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꺼낸다.
"하지만 너는 달라-..... 원래도....나는 염세적이고 지독히도 냉정했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못되게 굴었고-
니 마음을 알면서.. 아니 내 마음도 알면서 뻔뻔스레 도망치기를 택하기도 했지...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가장 별난 놈이었는데.... 너는 나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었지.. 남들은 그런 일 안해..
누구든 한 군데 오래도록 고립되어 있으면.. 무서워서라도 다가오지 않지 - 고립의 이유가 무엇이건
현실감이 전혀 없으니까-... 그런데 너는 손을 뻗었잖아-.."
그는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그는 손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 나를 꽉 안았다.
그 안은 팔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남들은 무섭다고 할지도 모르는 옅은 집착같은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가 더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 더 나에게만 매달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가장 무서운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저 그의 품에서 눈을 참을수 없이 꽉 감았다.
"그러니 불행하다는 이야긴 하지 마-.... 내가 널 불행하게 만든다는 게... 날 가장 두렵게 만드는 거야
더 꽉 잡아주고 더 꽉 묶어서 내 옆에 두고 싶은데 "
그는 이 말을 내 귀에 속삭이곤 천천히 몸을 떼며 내 눈을 보면서 마지막 말을 이었다.
"아마.. 그건 내 욕심이겠지.... 근데 뭐 어쩌겠어-"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욕심나는데...."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다가와서 코에 코를 살짝 비볐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여전히 손도 발도- 그가 곱게 발라준 색이 일그러질까 고정자세였다.
"너는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완벽한 존재야....... 절대 부족하지 않아-"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 그 말에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막았다.
-
다음날 유진이 보낸 선물을 받은 나는 세상 부끄러워서 얘가 정말 진심으로 이런걸 보낸건지 아니면 나를 놀리고자 장난을 친 건지 믿을수가 없었다.
안에는 축하 카드가 들어 있었는데...
생전 입을일도 없고 입고 싶지도 않고 설마 이런걸 입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들이 빽빽히 들어 있었다.
망사에다 레이스 , 레이스에다 몹시 작은.. 손바닥만한 천 쪼가리들이 가득하고 거기에다 가터벨트까지.....
유진이가 미친게 아닌가 속으로 의심이 되었다. 평생을 살면서 난 이런것은 근처에도 간 적이 없었으니까-
1970년대에나 가터가 필요하지, 입에서 허- 하는 혀차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때는 팬티 스타킹이 없었고 고정축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뜬금없는 형형 색색의 ......가터와
그걸 들자 툭 하고 떨어지는 털 달린 슬립..... 털?
가장 밑에는 그와 같이 털 달린 슬리퍼도 들어있다...... 이런걸 누가 신는단 말인가? 슬리퍼는 굽도 달려있고 뮬이라 예쁘지만 자신과는
참으로 ....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참으로 더럽게도 안 어울렸다.
축하카드를 펼쳐보니 발랄한 유진이의 글씨가 쓰여있다...... 맙소사
난 인상을 찡그렸다. 화가 난게 아니라- 어찌해야 할지를 알수가 없어서-
'그동안 잘 못 줬던 생일 선물인셈 치자- 유용하게 써- 속옷이 얼마나 중요한데-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니까- 꼭 입도록- 물론 뭐 보정속옷은 아니지만- 즐겁기 위해 입는거니까
내가 가르쳐 주는거야 생전 이런건 산적도 없지? 고맙게 생각해!'
글씨뒤에 웃고있는 표정이 가득한... 스마일리 페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걸 입으라고?
하임은 어이가 없어서 눈이 동그랗게 뜬 채로 앞으로 몹시 협소한 천을 팔락여 본다... 이왕이면 좀 몸도 들어가게 만들지... 이게 입는거긴 한가?
하임이 한숨을 내 쉰다-
많이도 보냈다. 레이스와 리본이 가득하다-..... 그보다.... 작약이 이런걸 좋아할리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작약은 도무지 '보통남자' 같지가 않다.... 아니면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하나.. 하여간 일반 남자같진 않다.
보통 남자였더라면 이런걸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동안 아무리 대화를 나눠봐도... 그런 이야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예보다도 때론
하민씨의 명예를 더 신경쓰여 하는것 같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어떤게 좋다. 어떤게 싫다-
이런건 이야기해도 내가 어떤게 좋다 하는 이야긴 하나 뿐이었다. 편안해 보이는게 좋다는 거-
그게 다였다. 아니면 린넨 정도일까-....
하임이 카드를 접어 넣으며 난감한 기분으로 박스를 내려다 보고 있을때 전화가 울렸다.
유진이었다. 궁금해서 견딜수 없었나보다.. 하임은 그 어쩔수 없는 궁금증에 웃으며 전활 받았다.
"받았어? 도착했다고 문자 오던데?"
"...야....... 난 이런거 머리 털 나고 첨 봐!!"
유진이가 전화 반대편에서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놀리는거지 이건?
"놀릴려고 보낸거였어? 어쩐지..... 이렇게 머리털 나고 첨 보는거 보냈을리가-"
"진짜야- 입는걸 보냈는데 무슨 농담.... 진심이야! 너야 이런거 니 돈주고 살리가 없으니까-"
".....?"
"야- 연인 사이에도 그정도의 가벼운 이벤트는 필요한거야- 그럼 뭐 입을려고 그랬는데?
뭐 할머니같은거 입을려고 그랬냐? "
유진의 가벼운 볼멘 소리에 난 아무런 대답도 못하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걸.... 그래도 이런걸 좋아하진 않을거 같은데...
이 털달린 신발은 뭐야?"
"큽... 그거야 말로 좀 농담으로 넣은거- 원래 슬립이랑 세트래- "
"너는 원래 이런걸 자주 사?"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가끔은?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야-... 너도 느낀바가 큰줄 알았는데- 그 동안 니가 너무 꾸미질 않아서 김도하한테 그런 대접밖에 못 받았다 싶어서 ,
친구인 나도 자존심 상해했는데- 스스로 좀 꾸미면 어때 - "
그 말에 떠오르는 이젠 말라버린 예전의 서러웠던 기억이 스친다.
그게 다 나 때문이었다고...?
"만약.... 물론 만약이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아래 위 짝은 맞췄겠지만.... 니가 보낸건
지나치게 과감하다... 좀 넉넉한 천으로 만들걸 보내주지 그랬어...."
하임이 다른걸 손으로 집어 들면서 그걸 바라보면서 말을 잇자 전화기 너머에서웃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이를 탓 할수야 있겠는가... 내가 그런걸 지나치게 몰랐던 것 뿐이지
나이를 먹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 알만한 걸 , 난 모르고 살았을 뿐이지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야시시한 팬티를 들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귀 뒤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붙어서 목에 확 들어오는 숨소리도
"뭐야?"
"으..으아아아악....!!!!"
놀라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전화와 손에 들고 있던걸 다 떨어 뜨렸는데 뒤에는 작약이 서 있었다.
창에서 드는 빛에 아무렇지도 않게 , 입은 분홍 니트로 반짝이는 낯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왜 이렇게 놀랐는지 모른단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보더니 자연스럽게 내가 떨어뜨린 전화를 집어 통화하는 상대자가
유진이란걸 확인하곤 씩 웃는다 그리고 자기가 전활 받는다
"여보세요 - 유진씨? "
전화기 너머의 유진이도 당황했는지 어버버 거리는 소리가 옅게 들려오고 나는 바짝 얼었을 뿐이다
너머의 유진이가 왜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물었는지 작약이 대답한다.
"약속 안하고 불쑥 찾아왔거든요- 좀 놀란것 같네요- 놀래킬려고 그런건 아닌데-"
끝에 묻어드는 여자라면 모두 얼굴을 붉게 물들일 유쾌한 웃음소리 , 그는 간단히 한마디를 더 한다-
"제가 또 전화하라고 할게요- 다음에 꼭 한번 봐요- 네- 그럼..."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고는 바짝 얼은 내 곁에 다가서서 내가 옆으로 밀어놓은 박스 안 내용물을 바라본다. 그리곤 낯빛하나 안 바뀌곤 내게 말한다.
"음- 이런건 내 스타일 아닌데- "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더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중 하날 들어서 대체 이게 뭐지 같은 얼굴로 본다. 그의 가느다란 손에 걸린 하늘색 가터,
그리곤 뻔뻔하게 한 마디를 덧붙인다. 눈을 내리깔면서
"난 좀 청순한게 좋은데-"
그 말 하곤 웃는다. 나는 이제야 현실로 사고가 돌아오는 기분이다. 소리를 빽 지르고 만다-
" 뭐!! 뭐에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문 닫겨 있지 않았어요?"
그가 왜 소리를 지르냔 듯이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당신이 아침 운동을 거르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전화 했더니 통화중이고 .... 나와보니까-
문에 저거- 저 슬리퍼 끼여서 문이 살짝 열려 있길래..... 뭐하나 싶어서-.... 열고 들어왔지...?"
끝이 의문문인걸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자신도 당황했는지 의문문으로 끝 맺는다.. 아까 소포 받고
플립플랍이 문에 끼인것도 몰랐었나보다... 나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애를 썼다.
내 얼굴을 보고는 작약은 그때 내가 들켰을때 처럼 다시 짗궃게 웃는다.
"유진씨 참 재미있네- 하임이 너도 그냥 물어봤으면 됐을텐데-"
"...뭘...뭘말이에요?"
"말에 자꾸 버퍼링이 걸리네- 왜 ?"
그는 박스를 살짝 밀어 닫으면서 내게 은근한 얼굴로 묻는다
"부끄러워서?"
나는 왠지 발끈해서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그는 내 그런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 쾌활하게 웃는다.
"아퍼- "
웃는 낯에 아프다며 때린 곳을 비빈다- 난 아마 아직도 얼굴이 빨갛겠지
"그럼 놀리지를 마요! 유진이가 장난친다고 보낸건데... 하필 그럴때 왜 소리도 없이 들어오고 그래요- "
내 잔뜩 화난 목소리에 그는 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제야 바뀐다
"아니... 신발이 끼여 있길래 살짝 열었는데.. 니가 전혀 모르고 손에 뭘 들고 잇길래... 나도 모르게 -
사실 다가설때까진 니가 그렇게 놀랄지도 몰랐어-"
그 말에 난 조금 화를 가라앉히고 몹시 심굴궃게 한마딜 덧붙일 뿐이다.
"정말 , 내 의사는 전혀 반영된거 아니에요-...."
그 말에 작약이 재밌단 듯 날 보며 씩 웃으며 한마디한다.
"알어-"
"뭘 안단 거에요?"
지금 나는 그의 모든 웃음이 날 놀리는 것만 같아서 발끈해서 묻는다.
"당신 뜻 아니었던거 안다구- 화내지 마- 정말이야- 미안해 다음부턴 꼭 기척 낼께-"
그의 부드러운 사과에 난 너무 화 냈던게 머쓱해지고 만다.
"됐어요... 진짜 , "
다르게 말도 나오지 않자 내가 그저 시선을 돌리자 그는 픽 웃었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 해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닌데-"
그가 싱긋 웃으며 덧붙이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 말이 있어야지
"굳이 뭐 이야기 해주자면 내 취향은 그런거 아니라고-"
"....."
내 얼굴이 빨개지는걸 즐기는 듯 그 말을 하더니 그는 가볍게 말했다.
"시간 있으면- 나랑 놀러 안갈래?"
그의 생각외의 말에 난 잠시 멈추었고
그는 내 방의 창에서 드는- 왠지 그의 얼굴에 부딫히면 다르게 빛나는 것만 같은 그 빛을
받으며 눈부시다는 듯 웃었다.
-
그녀는 아마 몰랐겠지만 난 그녀를 돌려 보낸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불안해했던 게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셈이었다 .
장 하임이 이 손이 힘이 부족하구나를 느꼈고, 난 늘 신경 쓰고 마음쓰고 있던 그 남자의 그 말을 떠올릴수밖에 없었다.
장하임이 특별히 욕심이 많은게 아니라 - 결국엔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걸 힘겹게 느끼게 될 거란 그 이야기....
그 남자가 얼마나 날 헤아린 건진 몰라도- 확실히 장하임의 이야기와 얼굴을 보며 난 더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렇게 빨리 그 날이 올줄 몰랐을 뿐이다. 난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와 가까워 질 일이 없었다.
한동안- 그래서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그녀에겐 아마 충분치 않았나 보다 싶으니 더 마음이 아팠다. 하민이 이야길 하면서 나도 느꼈다.
거짓말이라도 할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민이가 상관 없다고 , 내게 중요한건 당신 뿐이라고 그렇게
말만이라도... 할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그 말이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장하임의 실망한 눈빛...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하민이를 모른채 할수는 없다.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고 믿는 것은 ... 그렇게라도 해야 눈곱만큼이라도.... 마음이 편해 질것 같아서이지만...
원래도 하민이는 나 보다 한참 지혜롭고 아량이 넓은 애였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깨어난다면.. 그리고 나를 원한다면... 아니... 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면...
내가 과연 그 말을 거역할수 있을지.... 난 그것조차도 장담할수 없었다.
나는 장하임과 있고 싶어도- 하민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난 전혀 모르고
하민이가 내가 , 자신만을 위해 있어줬으면 한다면.... 그때 나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할까
내가 원하는 대로만 선택할수 있을까? 내가 그런 일을 벌여 놓고서? 죄책감 없이? 아무런 도리도 없이?
달콤한 시간속에 잊고 있었다. 누가 나의 죄를 이해한다고 해도 용서 해 준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거였다.
내가 , 멀쩡한 한 여자의 생명을 꺼트렸고-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고 만약에 깨어난다고 해도 걷지도 ,
예전처럼 예쁜 발로- 우아하게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든게 다 내 탓이라는걸
그 죄는 결코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 거였다.
어머니에게 말할때 나는 포인트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형을 좀 더 이해했다면 좋았을까, 조금이라도 더 헤아렸다면
더 좋았을까?
어머니에게 그저 난 어머니가 부족한 어머니였음을 지적하는 것 밖에 되질 않았다.
형은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거 같은데... 그게 장하임에 대한 걸까봐 난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어머니라면 뭔가 해답을 지니셨을꺼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아둔했다.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토록 삐뚤어진 아들을 이제와서
더 혼을 내겠는가 아니면 그때 내가 감싸주지 못해서 미안했단 이야기로 돌릴수 있겠는가...
단지 지금 기대하기로는 어머니가 뭘 주시는 것 만으로도 잠시는 ,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장하임에게서 관심을 떼어 내어 다른곳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지금 내가 쥐고 있는 걸 준다고 형이
날 무시하냐고 길길이 날뛰지 오히려 기뻐할 것 같진 않으니 어머니의 힘을 빌려 보려는 거였는데-
낮은 한숨이 쉬어졌다. 시간이 굉장히 늦어서 잠을 조금이라도 자 보고자 약을 찾아서 먹으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빈 공간에 전화 소리는 귓가에 굉장히도 따갑게 울렸다.
"여보세요-"
"만나셨어요 ?"
강비서였다. 하긴 그 뒤로 뭔가 이야길 기대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긴장했겠지...
"응... "
난 더 무슨 말을 해야할까- 머리를 넘기며 고민했다.
".... 별로 이렇다할 이야긴 못 들으신 모양이네요-"
내 목소리에서 기색을 읽은 건지 강비서는 자신도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는 망설였다. 강비서는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보다.. 내가 ..... 좀 더러운 일을 벌여야 될것 같아-"
"...네?"
이제는 마지막 승부수라도 띄우는 수 밖에 없었다.
형은 얻고 싶은걸 위해 싸운다. 나는 이제 지키고 싶은걸 위해 싸우기로 했다,
"어머니가 붙이셨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봐줘, 그리고 그 사람을 형에게 붙여야 겠어-
김희영에게도...."
"........"
전화기 너머의 정적이 너무나 커서- 나는 그 어두움에 내 자신도 빨려들것만 같아
숨을 내쉬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