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의 하얀 목덜미와 떨리는 음성이 아직도 기억난다.
고2 겨울, 기말고사가 끝나 들뜬 마음으로 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종례를 기다리면서 책상 위를 정리하다. 책 사이에 끼워진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방과 후 교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정갈하게 쓰인 편지, 왠지 우리 나이 또래가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게 느껴지는 글자 한자, 한자에 마음이 쏠렸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들의 방과 후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빈 교실에 남아 멍하니 앉아 ‘왜 나에게 이런 걸 보낸 걸까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저 친구 놈들의 장난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녀석이 들어 왔다.
고2 초에 전학을 온 녀석과는 말을 걸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
시골학교 특성상 전교생이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전학 온 녀석은 겉도는 느낌으로 우리와는 어울리지 못했다. 말을 하는 건 어쩌다 한번 필요시에만 대화를 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녀석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아 가만히 녀석을 지켜봤다.
녀석을 보다 느낀 점은 일반적인 여자 애들 보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사람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자습시간에 인호가 던진 농담이 생각났다.
‘야, 왠만한 여자애들한테 고백 받는 것 보다 OOO 한테 고백 받는 게 더 설렐 것 같지 않냐?’
분명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을 텐데, 녀석을 가만히 보다보니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나의 시선을 알아 챈 걸까.
묵묵히 가방을 싸던 녀석은 내가 앉아 있는 곳을 힐끔 쳐다보더니, 금세 고개를 돌리고는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바닥을 바라보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갈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녀석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앞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내 앞에 서서는 고개를 숙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기다려줘서 고마워’ 하고 힘겹게 말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서있는 녀석의 고개 숙인 얼굴을 쳐다봤다.
굳어있는 표정과는 다르게 붉게 상기되어있는 얼굴, 녀석의 뒤에 할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몇 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녀석은 뭔가 말하기를 주저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다 결심한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의외였다. 아니 상상도 못했다.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좋아 한다고, 자기 생각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가깝다고 나에게 털어 놓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의 생각은 ‘진짜로 이런 녀석이 있긴 하네.’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나에게 고백하는 녀석이 싫은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또래보다 작고 왜소한 체격에, 하얀 피부와, 진지한 눈빛을 나는 오히려 좋아 했다. 하지만 녀석의 고백에 나의 대답은 “쓰. 레. 기.” 이 세 글자였다.
이 말을 들은 녀석의 표정이, 어땠는지 그때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녀석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런 고백을 받은 나는 방학이 시작하기 전까지, 녀석을 매일 불러 때리며, 욕을 하는 묘한 화풀이를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녀석의 고백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지금의 녀석에게 그때 그 일에 대해서 사과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 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하림씨, 오늘 저녁에 약속 없으면 한잔 어때?”
“죄송합니다. 오늘 김 부장님하고 약속이 있어서...”
씁쓸하게 웃으며 되받아치자, 나에게 말을 건 낸 선배는 안됐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래, 이번에는 하림씨 차례인가.”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우리부서의 김 부장 잘난 것 하나 없는 그저 나이 많고 성격은 약한 사람한테 강하고 강한사람에게 약한 전형적인 히스테리적인 중년 남자다.
그래 여기까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 남자가 부서내의 사원들의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 남자는 항상 자신이 만나기 부담스러운 윗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신입을 데리고 가던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기에 만만한 사원을 데리고 나가는 버릇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나 사원을 덩그러니 앉혀놓고는 회사 전화를 핑계로 자리를 피해 거래처 사람들과 불편한 자리를 이어나가게 하고는 유유히 돌아와 그런 분위기가 같이 갔던 사원들 잘못인 것처럼 깍아 내리기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 김 부장이 찍은 타켓이 이번에는 나였던 것이다.
나는 시계를 확인한 다음 나에게 말을 걸던 선배의 말에 가볍게 대꾸를 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며 생각을 했다.
‘왜 이번에는 나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 부장과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뭔가 접선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딱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애매모호 그 자체 였다. 그리고 입사한 뒤로 한 번도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낌새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피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동행 하게 된 것이었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있을 쯤, 중년 아저씨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김 부장이 주차장 안으로 들어 오는게 보였다. 그리고 차안에서 김 부장은 나를 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레스토랑 매너는 아느냐, 와인 볼 줄 아느냐 등등 회사 신입사원 면접을 보는 것처럼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어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물어보고는 궁금한 걸 다물어 봤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미안했는지, 사원들한테 물어보니 ‘너가 호텔경영학과 라고 하더라, 그래서 레스토랑 매너 좀 알지 않을까 해서 데리고 가는 거다.’ 하면서 날 왜 데리고 가는지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으로 만나러갈 거래처 사람의 대한 정보가 아닌 험담 이였다.
‘이번에 만날 사람이 우리가 납품하는, 대기업 계열사 고급레스토랑 전무이사인데, 젊은 놈이라서 그런지 까다롭다.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왔다. 잘생겼다. 허여 멀건 하다. 능구렁이 같다. 웃는 얼굴을 하고 못하는 소리가 없다‘는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날 때 쯤, 김 부장이 차를 세운 곳은 김 부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앞 이였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 직원 하나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차키를 받아갔다. 그리고 안내받으면서 들어온 레스토랑 내부는 밖에서 본 것처럼,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자주가거나, 보통사람들은 기념일에나 한번 오기도 힘든 고급 레스토랑 이였다.
그리고 아까 말한 대기업 계열사 레스토랑이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든 생각은 ‘도대체 젊은 나이의 이런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젊은 놈의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 거야, 이런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 할 정도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이 안내 해준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티브이나 신문 등에서 한번쯤 볼 수 있는 그런 유명인사들 뿐 이였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밥 먹다가는 체하겠네, 김 부장 이래서 날 데리고 왔나. 먹다가 체하라고 ’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른 테이블에 앉은 유명 인사들을 넋 놓고 구경하고 있는데,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평범하다.' 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동양인 치고는 하얀 피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슈트를 차려입고, 입가에는 여유 있는 미소 모델처럼 들어오는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는 남자를 쳐다보며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자신들의 테이블의 고정 시켰다.
하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 옆에 앉아있던 김 부장은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를 보고서는 "서문 현 이사님, 반갑습니다. 듣던 대로 미남이시네요. 이렇게 식사 대접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입에 발린 인사와 함께 갑과 을에 관계를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나는 속으로 아까 험담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부담스럽게 웃으면서 인사하다니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한다는 말이 맞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사를 하는 김 부장을 따라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고,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 남자의 부담스러운 시선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되었다.
식사하는 동안 사이사이 사업이야기를 할 때도 남자는 김 부장보다는 나를 더 많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갈 때 쯤 김 부장은 "잠시 통화를..." 하면서 뻔한 수법으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그나마 나의 방패막이였던 김 부장이 사라지자, 남자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나온 디저트를 절대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먹고 있던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멘트 아마도 내가 여자였다면, 저 정도 외모와 능력을 가진 남자에게 끌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남자였다. 그리고 웃겼다.
요즘도 저런 구식 멘트를 날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구식 멘트를 날리는 그 남자를 나는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을 잊어버리고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 잘라 "네, 오늘 처음 뵙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자가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 순간, 김 부장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합니다.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라고 하며 말을 흘렸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김 부장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럼, 식사도 다했으니 그만 가죠.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다음에..." 약간은 아쉬운 듯 그림으로 그린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남자는 걸어 나갔다.
남자가 사라지고 나자, 김 부장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이 없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어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딱히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아니고 해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이야기하자 데려다 줄 테니 차를 타고 가라는 김 부장에 말에 나는 굳이 거절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김 부장과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지하철역 까지만 얻어 타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지하철역 까지 나를 바래다준 김 부장은 날 보고는 오늘 수고했다면서, 내일은 주말이니 푹 쉬라는 형식적인 말을 건네고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지하철 안에는 술에 취한 직장인, 퇴근 하고 돌아가는 사람,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는 남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로 지하철 안은 만원이었다. 자리가없어서 피곤한 몸을 작은 손잡이의 의지하면서 사람들한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집에 돌아오니, 몸이 마치 오래달리기를 하고 난 듯 몸이 피곤하면서 나른해졌다.
역시 평소 하던 일이 아니면 몸에 피로가 많이 쌓인다는 걸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꿨던 꿈이 나의 피로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불현듯 오늘 만났던 서문 현 이라던 젊은 이사와 그 녀석이 겹쳐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꿈을 이상한 걸 꾸니 별개다 겹쳐 보이네.’ 하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