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무런 스트레스 받지 않고, 놀려고 왔더니 가장 불편한 사람하고 마주 쳐 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나를 알아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과자를 입에다 쑤셔 넣었다.
그는 잠시 서서 두리번거리더니 우리 쪽으로 걸어 왔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한번 쭉 훑어보고는"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낸 것 같네." 하며 친하게 말을 걸어 왔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냐!’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인호는 "설...설마! 서문 현!!!" 엄청난 성량으로 소리를 지르며 그를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인호의 말에 모두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아니기를 나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나 자신을 되새겼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라는 걸 깨닫자, 지은 죄를 이렇게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꾼 꿈이 예지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병열이가 나를 보더니 걱정되는 얼굴로 "야 하림, 너 얼굴이 창백하다. 꼭 귀신 본 것처럼."
나는 그런 병열이 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그래 귀신보다 더한 놈을 만났다. 갑, 을 관계로는 갑이고, 나한테 좋은 감정 없는 정말 소중한 고객분 이다.'
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걸까 하고 나의 멍청함을 후회했다.
"유하림?"
내 이름을 마치 모르고 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부르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 구식이라고 생각했던 말이 나를 알아보고 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고개를 들고 당황한 듯 바라보자, 녀석은 어제 보았던 그림으로 그린 미소를 보이며 "반갑다. 오랜만이지" 하며 너무나 뻔뻔하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내민 녀석에게 속으로 ‘그래 참 오랜만이다. 12시간 이상 지났으면 오랜만에 보는 거지,’ 하며 겉으로 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반갑다." 하면서 녀석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가에 웃음은 계속 유지한채로 다른 녀석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녀석들은 서문 현에 대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반상회 하는 아줌마들 같이 자리에 앉은 녀석에게 쉼 없이 질문을 던졌다.
키는 언제 그렇게 컸는지, 뭐하고 지냈는지, 직업은 뭔지 등등 반상회 아줌마들의 새로 이사 온 사람 호구 조사하는 모습과 빙의 되여 보였다.
동창 녀석들의 질문에 서문 현은 눈살하나 찌푸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하나하나 친절하면서도 자세히 말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녀석의 입이 열릴 때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했던 악행이 언제 밖으로 나올지 모르니까...’
불안함 심정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어깨를 툭 치면서 인호가 말을 걸어 왔다.
"야 유하림 넌 오랜 만에 현이 봤는데 궁금한 것도 없냐."
눈치 없는 인호 녀석은 나를 보며, 뭔가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정말 저놈의 입을 꿰매던지 해야지.'
인호는 아까부터 쉴 틈 없이 들이 붓던 술로 인해 취기가 돌았는지, 과한 몸동작을 더해 가며 입을 쉬지 않고 놀려 댔다.
나는 인호의 술버릇이 오늘처럼 고마웠던 적이 있었을까.
덕분에 어색한 서문현과의 대화를 필할 수 있었지만, 서문 현의 목소리와 다른 녀석들의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점점 속이 안 좋아지면서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어떡해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은 한계라는 생각이 들자, 더 있어봤자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옆에 있던 병열이 에게 "병열아, 나 먼저 갈께."
인호의 말에 맞장구치며, 다른 녀석들과 이야기하던 병열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인호에게 말하려는 걸 고개를 저으니 "얼굴색 안 좋다, 얼른 가봐라 택시 타는데 까지 가줄까?"
이마의 손을 짚고 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병열이를 손으로 누르며 "그냥 앉아 있어. 인호 저 새끼 챙길 사람은 하나 있어야지"
"하지만..."
"괜찮아, 육군 예비역 이정도로 쓰러지지 않는다. 놀다가라 먼저 갈께."
그렇게 가게를 나와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었지만 이런 날에는 이상하게 빈차인 택시는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지나쳤다.
다섯 대 정도가 나를 지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몸이 더 안 좋아 진건지, 아니면 술기운이 오르는 건지.
택시 문을 열고 자석에 타려던 나의 몸이 휘청하고 크게 흔들렸다.
바닥에 곤두박질 칠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누군가 나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얼굴을 들자 내 눈에 보인 건 아까와는 다른 본적 없는 서문 현의 얼굴 이었다.
당황한 나는 녀석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내 팔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은 나의 팔을 놓아 주지 않았고, 강압적인 힘으로 나를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를 택시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녀석은 차문을 닿기 전 얼굴을 내 쪽으로 가져오더니 나의 귀에 되고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아무대가 없는 호의야." 하는 이해 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내가 탄 자석의 차문을 닿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안에서는 그저 녀석의'아무대가 없는 호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계속 고민해봤지만,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집에 도착한 다음 침대에 누워서도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과 '아무 대가 없는 호의'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내가 저질렀던 악행을 서문 현은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걸까.
다음날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소리의 잠이 깼다.
어제 먹은 술에 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심적 부담감이 커서였을까 머리가 아프고 몸이 떨렸다. 그리고 일요일인 오늘, 나에게 전화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다고해 병렬열이나 인호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녀석들은 분명 어제 떡이 되도록 마셨으니,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유 하림 씨, 전화 맞나요?]
중년여성의 무게 있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귀가에 울려 퍼졌다.
[어머니.]
어머니의 전화, 집으로 부터 걸려오는 언제부터였는지 조심스럽게 받게 되었다.
[그래, 하림아... 잘 지내고 있지.]
걱정 섞인 목소리 그리고 주저하며 건내는 한마디, 그 말에 나는 그저 앵무새가 된 듯 매번 똑같이 대답한다.
[네,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
[그냥 연락이 없기도 하고, 잘 지내나 해서 전화 했어.]
[죄송해요. 아버지는 잘 계시죠.]
매번하는 똑같은 안부인사, 하지만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한층 밝아진 목소리가 내 귀가에 울려 퍼진다.
[응 그럼 잘 지내시지 오늘도 기원 가셨어, 요즘 기원으로 출, 퇴근하시니까.]
몇 마디 이어나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전화를 이어가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보다 무슨 일로 전화 하셨어요.]
나의 목소리가 무미건조하게 말을 자르자, 당황한 듯 더듬는 목소리
[어..어 하림아, 다음 주 주말에 엄마가 둘째누나 보러가려고 하는데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시간 괜찮니?]
거절할까 했지만 무미건조하게 자른 말과 어머니에 당황하시는 모습이 죄송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 날 뵐게요.]
조금이라도 빨리 전화를 끊고 싶은 생각에 전화를 끊으려하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어머니의 따뜻한 음성.
[몸조심하고, 밥 꼭 챙겨먹고 반찬 떨어지면 전화하렴, 참 그리고 쉬는 날 언제 한번 내려오고 아버지가 많이 기다리고 계셔 아들.]
그 말을 다 듣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를 끊고는 침대의 누워 가만히 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어머니와 전화 하고 나면 왠지 심장에 돌덩이가 하나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어머니의 전화뿐 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누나들 가족들의 전화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뿐이었다.
그 사람이 집을 방문한, 다음부터 항상 이런 기분이 들었다.
죄를 지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