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에스트레야
작가 : 소율낭자
작품등록일 : 2017.6.28
  첫회보기
 
프롤로그 + 어릴적
작성일 : 17-06-28     조회 : 420     추천 : 0     분량 : 5966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프롤로그-

 

 금색의 달빛아래.

 바람에 이리저리 물결치는 억새밭은 황금의 바다 그 자체였다. 하늘에 손이 닿을 듯 높이 솟은 절벽 위. 아름다운 억새들의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 별빛을 흔들었다.

 

 그 별빛들 아래, 두 인영이 있었다. 달빛을 받은 사내의 그림자 속에 한 여인이 갇혀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제르. 난 아직..”

 

 휘어져도 부러지지는 않을 억새 같았던 호박색 눈동자에 물기가 서려있었다. 다정한 손길이 떨어질 듯 말 듯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걷어냈다.

 

 길고 아름답게 조각된 손가락 끝은 상처와 굳은살로 거칠었지만 그 움직임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아직까지도 주저하는 리아의 망설임을 녹여낼 만큼.

 

 “..안돼.”

 

 탐스럽게 익은 여인의 가슴이 달빛을 받아 뽀얗게 빛이 났다. 그 위를 음미하듯이 미끄러져 내려온 사내의 손길에 리아의 솜털이 파르르 떨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비단 위에 푸른 물감을 풀어 뿌려놓은 듯한 파도가 출렁거렸다. 그녀의 머리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파도는 더욱 거셌다.

 

 아찔한 말캉거림을 두 손 가득 담은 제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거칠고 진득한 숨결이 그의 깊고 깊은 욕망 저 아래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더 이상은 한계야.”

 

 답답하리만치 얼굴 한쪽을 덮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자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딱딱하고 이질적인 용의 비늘이 달빛에 검은 빛을 뽐냈다. 열기를 머금은 제르의 흑요석 눈동자가 제 아래에 깔린 여인의 나신을 훑어 내려갔다.

 

 스치는 살결마다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얽히는 눈길, 주고받는 숨결 속에 그동안의 절절한 기다림과 숨겨왔던 욕망이 있었다.

 

 모든 것을 거침없이 쏟아 붓는 그의 간절함에 리아의 망설임이 모두 녹아 내리는 순간, 리아의 손이 제르의 목을 휘감았다.

 

 그의 참을성을 무너뜨리는 불안감을 알기에. 괜찮을 거야라는 말 보다 따뜻한 체온으로 그 불안감을 녹여주고 싶어서였다.

 

 그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도착할 곳이 원하던 미래가 아닐지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소중한 것들을 잔뜩 잃을지도 모르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하고, 현명해질 테니까. 영원하지 않을 미래라도 함께 걷자고.

 

 소리 없는 떨어진 허락에 제르의 숨결이 더욱 거세졌다. 하얀 피부 위에 붉은 꽃잎들을 하나 둘씩 피워내는 그는 정원사였다. 이제 곧 그녀에게 굳건한 뿌리를 내릴.

 

 제르가 리아의 무릎을 붙잡아 벌리고선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그녀에겐 당연하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하지만 한걸음 뒤에 은근히 피어오르는 기대감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깊숙한 곳을 점령당한다. 그 사실만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완만한 가슴 선을 따라 피부 곳곳에 세세한 입맞춤을 남기던 제르가 리아의 입술을 찾았다.

 

 제르의 두 손이 가늘게 휘어 들어간 허리로 내려갔다. 몇 번이나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 단단하게 굳은 근육들이 주춤대며 긴장을 풀었다.

 

 “처음부터 바랬어. 이렇게 널 가지기를.”

 

 리아는 달팽이관이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았다. 귓가에서 달싹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에 몸이 절로 움찔 거렸다.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은 두 팔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나만을 보고, 나만을 생각해. 제발.. 나의 것이 되어줘.”

 

 “아..아파..!”

 

 리아의 미간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내려다보던 제르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가지고 싶은 것이지 파괴하려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대의 것이니까. 날 가져줘.”

 

 제르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주 조금씩. 그녀의 아픔과 긴장을 달래며 저를 묻었다.

 

 “아..!! 아.. 아!!”

 

 비명 같은 여인의 신음소리가 억새밭 사이로 퍼져 나갔다.

 

 바람에 실려 온 금목서의 청량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그들에게 닿은 순간, 진득한 밤꽃냄새와 비릿한 혈 향이 금목서 향기에 달라붙어 그의 심장으로 스며들어갔다.

 

 그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세상 단 한번뿐인 향기를 각인시키면서.

 

 

 

 -1-

 

 검은 용 에스트레야. 차원을 넘나드는 이 위대한 용은 크렌시아라는 세계에 남기를 자청했다. 특별한 마음을 품었던 이를 위해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었으니.

 

 에스트레야라는 명칭은 고귀한 용의 이름을 허락받은 왕국임과 동시에 그 위대한 힘의 명백을 이어나가는 왕족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이다. 용이 잠들었다는 아스트로 산맥이 세상의 끝을 막아 멸망을 멈추고 있다는 전설이 살아 숨쉬는, 산천이 수려하고 계절의 순환이 아름다운 왕국.

 

 대대로 에스트레야의 왕들은 초대 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블랙오팔 눈동자로 용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 힘을 실제로 마주한 이는 극히 손에 꼽을 정도였다.

 

 왕족 중에서도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만 이어지는 제약 때문에 왕의 측근들만이 그 소문의 힘을 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국경을 세운 그대로를 유지하기만 하는 이 왕국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지도 침략 받지도 않았으니 쓸 일이 사실상 없었서였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에스트레야의 백성들 중 누구하나 그 핏줄을 의심하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우리의 왕족은 위대하신 용의 핏줄이 그 선조인지라 성품이 온화하시고 매사 공명정대하여 모든 생명을 존중하시며 쓸데없는 인간의 욕망 같은 건 몸에 담지 않으신다고. 그리하여 전쟁 같은 걸 먼저 일으키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나라에서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신분의 고하가 있기는 하지만 약하디 약한 백성이 핍박 받지 않는 왕국이었다. 노블레스오블리주가 환상이 아닌 곳. 전쟁과 기아에 휘말리지 않고 대대손손 안전하게 살아갈 수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온 에스트레야의 왕실에 뜻하지 않은 소란이 일고 있었으니..

 

 크렌시아력 1983년. 에스트레야의 29대 왕의 하나뿐인 장자가 왕실에서 미아가 된 사건이 발생 했다. 언제나 온화하고 조용했던 왕비궁이 발칵 뒤집어지고 사방에서 태자를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자전하~~!!”

 

 “어디계십니까~~!!”

 

 “전하~!!!”

 

 “제르~~!! 어디 있니~!”

 

 적게 잡아 사오십명의 사람들이 왕비궁 곳곳을 뒤지며 6살 난 꼬마 태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중 아이의 이름을 가장 애타게 부르던 이가 있었다. 작고 가냘픈 몸의 주인은 태자의 어머니 하세디안 왕비였다. 그녀가 벌써 한 시간째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마,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러다...”

 

 “오~! 데일. 내 아이가 사라졌어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녀를 마마라 부르며 곁으로 다가온 시종장 데일은 안 그래도 하얗게 질린 왕비의 안색이 퍼렇게 변해가는 걸 보고는 단호하게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마마께서 본인을 찾다 쓰러지신걸 아신다면 제르전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하..하지만.”

 

 “폐하께 전갈이 갔으니 곧 무탈하게 돌아오실 것입니다.”

 

 데일이 왕비가 더 이상 고집부릴 수 없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나라의 왕이자 아이의 아빠기도 한 그가 위대한 용의 힘으로 아들을 찾아줄 것을 믿으라고.

 

 “알겠습니다. 어서 돌아가 제르를 혼내줄 준비를 해야겠네요. 야단도 체력이 있어야 칠 수 있을 테니까요.”

 

 “네, 마마.”

 

 시종장 데일이 제르의 어머니이자 에스트레야의 왕비마마를 처소로 모시고 갈 즈음, 왕궁에서 가장 으슥하고 후미진 구석에서 청량한 향기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작은 금목서 아래에서 작게 재잘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향기에 실려 들려왔다.

 

 “누구야? 인사 안 해? 어허! 너 지금 무엄한 거야! 무엄하면 나쁜 거랬어!”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흑요석처럼 빛나는 동그란 눈동자, 오동통하니 발그레한 뺨이 귀여운 남자아이였다.

 

 제법 어른들처럼 멋있게 호통을 치는 소년이 바로 수십의 사람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에스트레야의 태자. 제르나쿠안 드 에스트레야였다.

 

 방년, 6세. 두뇌가 비상하여 또래보다 말이 빠르고 구사하는 어휘가 남달랐지만, 그 역시 어린아이이기는 마찬가지.

 

 어른이라면 누구나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뒤에 피어있는 금목서 꽃이 비쳐질 정도의 투명감, 바람조차 통과해버리는 가벼움.

 

 색감마저 하얀색으로 통일되어 있는 소녀는 맨발임에도 그 어떤 흙먼지도 묻지 않은 채 깨끗함을 유지 하고 있었지만 제르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그래도 말 안해? 빨리 이러케 인사해.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소녀가 뭐라 입을 뻐끔거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제르는 어쩐지 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어서해! 아니면 데일에게 혼이 나! 들키기 전에 빨리 해!.. 빨리..으..흐윽.. 빠..빨리 해야..되는데..왜 안해에!! 으..으아앙!”

 

 제르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를 찾던 한 검은 머리 사내의 귀에 흘러들었다.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으로 나무를 밟고 튀어 오르던 그는 곧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왕궁의 후미진 곳에 주저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제르!”

 

 “우아아앙~!! 아버지!!”

 

 제르의 울음소리는 제 편을 발견하고는 더더욱 크고 우렁차게 하늘을 울렸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소녀의 형체가 물결치듯 사그라져버렸다.

 

 “제르! 무서웠구나. 이제 이 아비가 왔으니 괜찮단다.”

 

 “으..흐흑.. 아버지.. 어..어쩌지요?”

 

 “응?”

 

 “저.. 저 누나가 데일에게 혼이 날거예요. 나는 마..막으려고 했는데..”

 

 “누나?.. 어디?”

 

 “..저기요.. 어?”

 

 콧물을 훌쩍거리며 눈을 비비던 제르는 방금 전까지 하얀 소녀가 서있던 자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래봤자 사라지고 없는 이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어..?”

 

 “어떻게 생긴 누나였지? 그 누나를 따라 여기에 온 거니, 제르?”

 

 “...몰라요.”

 

 “뭐? 하지만 방금 전에 ”

 

 “졸려요.. 아버지..”

 

 제르는 혼날지도 모르는 누나가 사라진 것이 기뻤다. 데일에게 혼날 걱정이 사라지자 힘차게 울다 힘이 빠진 어린 육체가 아버지의 품에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이 날, 제르는 왕비에게 어마무시하게 혼이 났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졌지만, 모든 건 시종장 데일에 의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절대, 혼자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은 1여년 만에 다시 깨지고 말았으니.

 

 또 다시 만개한 금목서 향기에 이끌리듯 도착한 곳에 조금 더 커진 하얀 소녀를 발견한 제르의 눈동자가 기쁨과 놀람에 휘둥그레졌다.

 

 “또 여기 있네?!”

 

 

 

 

 

 어린아이의 기억은 그리 길지 않음에도 호되게 혼이 났던 그 때의 추억 때문인지 소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제르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그동안 생각했는데, 너 말을 못하는 거지?”

 

 “.........”

 

 또 다시 하얀 소녀가 뭐라고 입을 벙긋 거렸지만 제르에게는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제르가 제 생각을 확신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프레투스 아저씨 말이 맞네.”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제르는 이상하게도 말이 통하지 않는데 하얀 소녀가 프레투스 아저씨가 누군지 궁금해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왕국에서 제일 똑똑한 아저씨야. 아저씨가 누나가 인사하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누나입장에서 왜 인사를 못할까 생각해 보라고 했는데.. 내가 맞았지?”

 

 소녀가 고개를 끄떡거리다 제르를 내려다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고 갑작스레 손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어? 이..이건!”

 

 아직까지는 소년이 하지 못했던 인사법이었다. 동등한 지위나 친구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악수는 제르에게 무척 인상 깊고 멋있었던 인사법이었다. 하지만 왕궁의 어느 누구도 제르에게 건네주지 않아 해보지 못했던 인사법이기도 했다.

 

 “..나..나랑 이렇게 인사하자고?”

 

 “.......”

 

 얼굴을 위 아래로 흔들며 재차 손을 더 내미는 소녀의 손. 그 손은 바닥의 푸른 잔디가 비쳐질 정도로 투명했지만 동시에 제르의 눈엔 그 어떤 것 보다 존재감이 짙어보였다.

 

 주저하는 작은 손이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땀이 날 것 같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며 드디어 다다른 하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간 순간이었다.

 

 “태자님!!!”

 

 “으학!!”

 

 어디선가 뒷골을 땡하고 울릴만한 시종장 데일의 외침과 함께 제르의 눈앞에서 하얀 소녀의 잔영이 사라졌다.

 

 “..아!!”

 

 그토록 바라던 악수를 바로 지척에 두고. 소년의 손이 공중에 외로이 떠있었다. 소년의 이마가 한껏 일그러지며 흑요석 눈동자 끝에 작은 이슬이 매달렸다.

 

 “..데일. 미워!!!!”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3 마리아와 리타니아 6/28 248 0
2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6/28 239 0
1 프롤로그 + 어릴적 6/28 42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