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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레야
작가 : 소율낭자
작품등록일 : 2017.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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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작성일 : 17-06-28     조회 : 239     추천 : 0     분량 : 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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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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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악수의 기회는 또 다시 1년 후에 제르를 찾아왔다. 이제 8살, 한층 더 똑똑해진 제르는 비슷한 시기가 되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 결과 금목서 향기가 짙어지는 시점에 그 소녀가 나타난 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또 1년 만이네. 저 금목서가 꽃을 피워야 나올 수 있는 거야? 혹시.. 금목서 요정 뭐.. 그런 건가?”

 

 8살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사였고 그걸 토대로 내린 결과였지만 소녀는 전보다 훌쩍 커진 모습으로 그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미소가 아닌 정말 재미있다는 듯 허리를 꺾어가며 낄낄대는 모습에 제르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는 걸 느꼈다.

 

 “아니면 말지.. 왜 그렇게 웃어!”

 

 입술을 한껏 내밀어 삐졌다고 광고하는 제르를 보며 소녀가 제르의 정수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마도 쓰다듬어 주려는 목적이었겠지만 놀랍게도 소녀의 손은 그대로 제르의 머리를 통과해버렸다. 그 사실에 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유..유령이었구나..”

 

 하지만 그녀가 요정이건 유령이건 사실 제르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냥 하얀 소녀인 것만으로도 1년간 기다림을 보상받는 기분이었으니까.

 

 “그..그래도 괜찮아.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제르가 자신을 용감하게 치장하며 소녀에게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제 손만 계속해서 바라보던 소녀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다.

 

 “어..? 아니.. 난 하나도 안 무섭다니까?!"

 

 사라지는 소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어보았지만 소녀는 제르의 손아귀에서 연기처럼 사그라져버리고 금목서 향기가 농익은 나무 곁에는 황당해하는 소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삼백 육십 다섯 번의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하고 나서. 소년은 9살이 되었다. 이제는 규칙이 되어버린 시간.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자 소년과 소녀는 만났고 오늘은 제법 길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들만의 의사소통 규칙을 만들어갈 정도로.

 

 “좋아는 이렇게 머리위로 동그라미. 싫어는 손가락으로 이렇게..”

 

 작은 손으로 꼬물거리며 검지를 교차시켜 엑스표시를 만든 제르가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곧이어 소녀가 제르가 한 것처럼 머리 위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손을 번쩍 들고 웃고 있는 소녀는 제르보다 키가 한 뼘이나 컸다. 그럼에도 제르의 눈에는 무척 귀엽게만 보였지만.

 

 “좋았어! 그럼 이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다음 암호를 정하려고 할 때였다.

 

 “태자전하!!”

 

 언제 어디서나 태자인 제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데일이 크게 소리치며 달려오고 그 외침에 또 다시 소녀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안돼!!!”

 

 “무슨 일입니까!!”

 

 제르의 절규어린 외침에 데일과 휘하 시종들이 더욱 빠르게 발을 놀리며 태자에게 다가왔고 그들은 곧 두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디 다치신 겁니까?!”

 

 데일이 다급히 제르의 앞으로 돌아가 작은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살짝 숙여진 제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데일 진짜 진짜! 미워!!”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 받지 않는 데일에게 2년만의 핵 펀치를 날린 제르는 한참이나 금목서만을 바라보다 왕비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안타깝고도 안타까워라.

 시간이 앗아간 세월 속 그 무엇이 애달프지 않을까.

 

 순수한 반가움으로 반짝거리던 소년의 눈빛을 대신하는 건 이제 감정을 억누른 짙은 어둠이었다.

 

 시야 안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리는 흑요석 눈동자를 마주한 날은 단 13일뿐이었지만.

 

 소년의 동그랗던 눈매가 점차 길어지면서 깊은 음영을 드러내고 귀엽던 콧날이 베일 듯 날카롭게 우뚝 서가는 걸 지켜봐온 세월은 13년이었다.

 

 1년에 한번 보는 거라 콩나물 자라듯 쑥쑥 커지는 모습에 놀라고 성인으로 보일 만큼 커버린 모습에 조금 두근거린 적도 있었다.

 

 그랬던 1년 전을 뒤로 하고 어느 덧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열아홉의 그에게 다시 나타난 그녀.

 

 1년 중 한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고열과 환상처럼 느껴지는 금목서향을 시작으로 그녀는 이상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릴 적엔 그저 열교차가 심해지는 계절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열과 함께 찾아오는 신기하고 애틋한 꿈이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되자 단순한 열감기가 아님을 어렴풋하게 깨달았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환상이든 몽상이든 약속된 사람이 있다는 걸, 다시 만나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버팀목으로 외로운 하루하루를 견디었으니.

 

 매년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일 정도로 자신을 기쁘게 맞이해주던 소년 덕에 버티길 잘했구나 라며 자신을 칭찬했고, 다음번 만남을 기약하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헌데 기쁘고 소중하기 그지없던 상대가 앞에 있거늘 오늘은 몸 여기저기가 이상하게 근질거렸다.

 

 ‘무슨 일 있나?’

 

 단 한 번도 건네지 못했던 목소리를 대신해 눈빛과 손짓으로 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쏟아지는 그 눈빛을 마주 볼 수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옆에 앉은 그를 훔쳐보면 어김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진득한 시선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오늘은 초장부터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지?’

 

 정수리부터 발끝 까지 햇살에 하얗게 부셔지는 자신의 몸이 오늘따라 유난히 불투명해서 더 불안해 그녀는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늘 푸른 잔디를 비추던 투명감이 시간에 따라 점차 짙어지는 걸 눈치 채긴 했지만 오늘은 하얀 원피스아래 드러난 맨다리에 살색이 덧칠해져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를 만질 수 있다고. 그의 손이 닿을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인지 유달리 창피하네..’

 

 무릎 바로 위에서 하늘거리는 치맛단을 억지로 잡아 당겨 보지만 애초에 짧은 천이 더 늘어날리 없었다. 괜히 맨발과 맨다리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그에게 가르쳐 줄뿐.

 

 “여기..다친 건가?”

 

 제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발등 위를 서성거렸다. 늘 투명하기만 했던 피부 대신 살색이 감도는 덕에 푸른 멍도 함께 보이고 있었다.

 

 ‘아.. 이런..’

 

 일하는 도중에 열이 올라서 들고 있던 박스에 발등을 찧었던 게 바로 어제. 이곳에 올 땐 항상 유령 같은 상태지만 보여지는 건 항상 현재의 자신이었다.

 

 그래서인지 매년 올 때마다 그녀역시 자라나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었지만, 이런 상처까지 보여진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아냐! 괜찮아!’

 

 들려줄 수 없는 말 대신 연신 고개를 흔들고 손바닥을 내저었다. 제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시선은 발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아니 점점 시선의 위치가 옮겨가는 걸 느꼈지만 그저 발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발등에서 올라와 복숭아 뼈와 종아리를 지나는 시선이 허벅지를 덮는 스커트에 멈추었을 때는 더 이상의 현실부정은 못했지만.

 

 ‘어..어딜 보는 거야!’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린 그는 외모로는 같은 성인일지 몰라도 그녀 안에서는 줄곧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서 이런 시선을 받은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긴장된 적은 없었다.

 

 작년부터 어렴풋이 느낀 가슴의 두근거림과 지금의 긴장감이 제르를 남자로 보기 때문이란 걸 애써 부정하고 있었건만.

 

 노골적인 시선도 모자라 얼굴을 자신에게 성큼 들이민 제르 때문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 현실로 돌아가 버릴 만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가지마. 오늘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그동안 심하게 놀라거나 충격을 받으면 돌아가 버렸기 때문인지 커다래진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제르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틀어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리 없는데도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그래서 드는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치 실제로 닿은 것 마냥, 겹칠 듯 섞인 입술에 온기가 스며들어와 강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행여나 그대로 통과해 버릴까봐, 그래서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이 몰려올까봐 감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저 돌아가지 않기 위해 마음을 진정시키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있자 제르가 조심스레 얼굴을 떼어내었다. 오랜만의 그리운 미소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조금 쑥스러운 거군... 첫 키스라는 거.”

 

 이걸 첫 키스라고 칠 수 있는 걸까 부터, 그 외모를 가지고 여태껏 입술을 어떻게 지킨 걸까, 궁금해도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들이 쌓였지만 그저 그가 웃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기뻐서.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 보면 굳어갔던 그의 입술과 눈빛이 곤란한 연정 때문이었단 걸 이제야 알아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누나, 아니. 금아.”

 

 제르가 제멋대로 붙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린 시절에야 그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티가 났지만 지금은 그저 호칭 하나에 남자와 여자가 되어버렸다.

 

 “내년에 성년식을 치른다고 했던 거 기억하나? 내가 이 나라의 태자이기에 단순한 성년식이 아니라고 했던 것도?”

 

 작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그가 잠시 크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어내려 했다.

 

 “태자는 성년이 되면서 용의 힘을 함께 계승해. 왕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그 힘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도록 수련해야 하지. 그 용의 힘은.. 특별해.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에 대해 알아내고 널 완전히 실체화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말을 마친 그가 쏟아내는 눈빛엔 자신감과 불안함,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와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앞으로도 매해, 날 찾아오겠다고 약속해줘. 반드시.”

 

 이루어 질 리 없는 애틋함,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걸고 그가 애원했다.

 

 “성년식과 함께 태자비가 결정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난 포기하지 않을 테니. 너도.. 약속 해주길 바래.”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랬어. 그러니 태자비랑 알콩달콩하게 살아,’

 

 그녀 역시 철없던 시절 자상한 교회오빠에게서 깨달았던 첫사랑의 법칙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전달할 수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거려야 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아주 똑같진 않더라도 아끼고 소중한 마음은 비슷해서. 이런 식으로나마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좋았어!”

 

 기쁘게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그에서 조금은 제 또래들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태자라는 직분에 얽매어 어깨가 굳어가던 그가 아주 오랜만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놀랐다. 갑작스럽게 꿈에서 깨어버린 이 상황에.

 

 “..뭐지?”

 

 간밤에 흘린 땀이 체온을 빼앗아 피부가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놀라거나 충격 받은 것도 없는데?”

 

 체온만큼이나 머릿속도 차분하게 식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아니 애초에 실타래가 얽힌 그 이유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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