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기껏 친해지라고 보냈더니 또 욕만 잔뜩 들어먹고 왔구나."
하얀색 가운을 몸에 걸친 30대 초반 정도의 여인이 한숨을 쉬며 마치 인형처럼 앉아있는, 방금 전 아이들에게 쫒겨난 아이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HADL-1호의 감정 변화는 없었습니다, 박사님."
여성의 옆에서 긴 차트를 훑어보며, 마찬가지로 하얀색 가운을 걸친 남성이 말했다.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주 미세한 차이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인형 같은데요."
그러자 박사라 불린 여성이 남자를 홱 돌아보며 눈을 치켜세웠다.
"살아있는 인형이란 말는 분명 금지랬텐데요!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세요!"
"헙!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남자의 안색이 금세 새파래지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남자를 잠시 노려보다 이내 무표정인 앉아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다시 옮겼다.
살아있는 인형이란 말을 듣고서도 아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김 박사님."
"예... 예."
"저 아이는 분명 가사용 도우미 로봇을 대신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홍 박사님."
여자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근데 어째서 저렇게 말도 없고 무심하기만 한 겁니까? 마치 대살상용 휴머노이드... 같이 말이죠"
"아, 그것은..."
"이 아이에게 입력될 프로그램은 모두 김 박사님께서 입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말이 끊겨서인지 남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곧 원래의 표정을 회복하곤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저는 확실하게 가사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만 입력했습니다. 물론 감정표현도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프로그래밍 했구요. 대살상용 휴머노이드 프로그램은 하나도 입력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저 아이는 대체 왜 저러는 것이죠, 김 박사님? 혹시 대살상용 프로그램과 가사용 프로그램을 잘못 입력하신 것 아닙니까?"
여자의 두 눈이 살짝 날카로워지자 남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대살상용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작동 정지가 되도록 만드신 건 홍 박사님이 아니십니까?"
"그건 그렇지만 애초에 김 박사님의 프로그램에 문제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변명스런 말에 여자의 두 눈이 살짝 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심쩍다는 기색은 여전했다.
남자는 내심 기분이 상했다.
비록 같은 프로젝트를 맡고, 여자의 실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여자가 자신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그리 차이가 나는 실력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종이 한두장 정도의 차이랄까?
'일본 놈한테 붙어먹은 더러운 계집 주제에 기고만장을 하는군.'
솔직히 말해 비슷비슷한 실력이었지만 여자는 현재 이 일을 추진 중인 일본의 AD그룹 회장 아들이라는 든든한 지지세력이 있었다. 그에게 몸을 거의 팔다시피해서 팀장자리를 얻어낸 것이다. 그에 반해 남자는 아무런 지지세력도 없던지라 AD그룹의 힘으로 팀장이 된 여자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쉬쉬하는 탓에 연구소 밖으론 그 사실이 퍼지지 않았지만 연구소 안의 사람들은 '여자가 팀장이 된 비밀' 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여자가 알지 못하도록 서로 조심하는 중일 뿐이었다.
남자의 눈에서 서슬퍼런 빛이 뿜어져나왔지만 여자는 알아채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인 남자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다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라면 저 아이가 저리 행동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대로 확인한 후 보고서 올리세요."
"..알겠습니다."
남자가 물러간 뒤 여자는 자신이 맡은 휴머노이드. '한소유' 라 이름 붙여진 아이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발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꼼꼼하게 훑어보던 여자의 눈이 소유의 얼굴에 향한 순간 여자의 두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샘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야, 휴머노이드는."
곧 피식 웃음을 흘린 여자는 소유의 풍성한 머리카락에 뒤덮인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어디론가로 바쁘게 사라졌다.
소유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여자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남자의 말처럼 인형이라도 된 양, 두 눈만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소유의 앵두같이 작고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마더."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의 소리가 이러할까?
너무나도 고운 미색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감에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새하얀 어깨가 훤히 들어나는 원피스 앞엔 끝이 동그란 넥타이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하얀색 구슬 같기도 한 그것에서 곧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나오더니 소유의 머릿속으로 딱딱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예. 소유 님. 말씀하십시오.
"가사... 가 뭐지?"
멍하니 앉아있던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소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