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이란 존재들에 대한 것도 있어?"
-물론입니다. 확실한 샘플을 구해왔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스크린의 빛이 꺼지며 소유의 방이 다시금 어둠에 잠겼다.
동시에 방문을 열고 뮈제던이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고, 그것을 소유의 앞 탁자 위에 내려놓은 뮈제던이 곧장 덮어놓은 천을 벗겨내었다.
화악!
순간 초록색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포근하면서도, 약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바람'같은 빛이었다.
소유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꺄아아아악!"
천이 뒤덮고 있던 새장 안의 작은 생명체가 비명을 지르며 더욱더 초록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더의 푸른빛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들 부르는 '실프'라는 정령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구의 요정과 같은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테론에선 인간과 같은 생명체들과 공생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지구의 요정과는 달리 테론은 이처럼 실체가 존재하며, 또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너, 너희들!! 지금 실수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테론의 언어는 마더가 어느 정도까진 입력해 놓았기에, 소유는 실프라는 생명체가 외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실프?"
"흥! 내 고귀한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마! 이 나쁜 인간...?"
말을 내뱉던 실프의 표정이 순간 경악에 물들여지고, 두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이, 인간이 아닌 건가?"
-소유 님을 한낱 인간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 정령이여.
"뭐, 뭐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난데없이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상당히 놀란 실프가 주위를 휙휙 두리번거렸다.
마더가 마치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
-이 공간 자체가 나다.
"그, 그럼 내가 지금 네, 네 뱃속에 들어와 있다는 거야?!"
-어리석군. 하지만, 그래, 너희들이 사는 곳의 명칭으론, 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성? 성이 무슨… 설마 유, 유령?!"
안색이 새하얘지며 호들갑을 떠는 실프를 보며 소유는 작게 눈을 빛냈고, 마더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침묵을 가졌다.
-…이해력이 안좋군. 물론 테론의 생명체들이 나나 소유 님을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소유의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뮈제런이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아까 마셨던 허브차가 아닌 달콤한 향기의 유자차였다.
"뭐야, 뭐야? 사람인가? 다른 종족?"
신기하게 생긴 뮈제런의 모습에 다소 호기심이 동한 건지, 실프는 금세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뮈제런을 바라보았다.
-'네오 휴먼Neo Human' 족의 기사다.
마더의 말에 실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족인 탓이었다.
소유도 실프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부터 휴머노이드들이 네오 휴먼 족이란 알 수 없는 종족이 되었는지 현재 입력된 정보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테론은 종족 간의 이념이 뚜렷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임의적으로 네오 휴먼이란 가상의 종족을 만들었으며, 소유 님은 이러한 네오 휴먼 족의 공주로서 테론에 정착하시면 됩니다.
소유의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마더의 설명에 그제서야 소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위장 신분이었다.
테론은 종족 간의 유대가 유별나지만, 이상하게 각 종족의 이념정신도 무척이나 투철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긴 하지만 함부로 각자의 문화나 종족의 이념 같은 것은 잘 교류하지 않는다는 소리였음이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하며, 엘프는 엘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게 각 종족의 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유가 제대로 인간 흉내를 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네오 휴먼이란 미지의 종족이 탄생한 것이다.
한편, 실프는 철창 앞에 바짝 달라붙어 뮈제런을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기에 바빴다.
뭔진 몰라도 멋진 갑옷(?)을 입은, 또 그 이름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네오 휴먼'이란 괴상한 명칭을 가진 종족의 기사는, 소유라는 어마어마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의 옆에서도 마치 석고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절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아름다움을 살짝 훔쳐볼 만도 하건만,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흔히들 말하고 존경하는 진정한 기사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았기에, 실프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정말 멋있는 갑옷이구나! 또 아름다움을 멀리하는 저 자세라니! 인간들이 좋아하는 기사라는 족속들은 절대 따라오지 못하겠는걸?"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뮈제런은 가사용 안드로이드.
어쩌다 보니 네오 휴먼이란 뿌리조차 없는 정체가 불분명한 종족의 기사가 되었지만,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계가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 적용되는 '아름다움'이란 것을 보고 감탄할 리 없었다.
게다가 소유는 자신의 주인. 주인을 몰래 훔쳐보는 짓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금기였고, 또 이미 데이터 베이스에 그렇게 프로그램 돼 있었다.
어쩌다 오류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실프가 생각하는 인간들 같은 욕망에 사로잡힐 일은 절대적으로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