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줘. 어차피 조금 남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차에 대한 처분은 결국 전부 마시는 것으로 선택했는지, 미미하게 고개를 젓는 행동과 더불어진 소유의 나직한 말에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다시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 놓은 알파가, 이어 자신과 똑같은 휴머노이드, 베타의 옆에 다가가 섰다.
알파의 그런 행동을 차근차근 지켜보며 빠르게 차를 홀짝이던 소유는 곧 비어버린 찻잔을 알파와 마찬가지로 침대 옆, 꼭 보석처럼 반짝이는 무언가로 테두리를 가볍게 치장한 하얀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잇따라 베타, 자신과 알파보다 약 네 뼘 정도가 더 큰 휴머노이드에게 물었다.
"너는? 너도 마더야?"
쿠르르릉.
침대에 걸터앉아 있음에도 전해져 오는 우주선의 진동이, 소리로까지 유형화되어 소유의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마침내 우주와 하나가 된 격납고 안에도 마찬가지의 진동이 울려퍼졌지만, 그건 우주에선 아무런 소리도 없는 단순한 진동일 뿐이었다.
약간 덥수룩하게 보이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 앞머리가 눈썹 바로 위까지 내려오도록 만든 베타의 살짝 포근한 인상을 돋보이게 하는 부드러운 눈매가, 곧바로 소유에게로 향했다.
"저는 아닙니다, 소유 님. 마더 님은 소유 님의 수발로 알파만을 선택했으며, 저는 소유 님의 경호원과도 같은 역할로서 배속되었습니다. 때문에 소유 님도 알다시피, 저에겐 가사의 관한 프로그램이 저장돼 있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알파의 몫입니다. 그래서 마더 님은 저에게 원격 제어 장치를 달지 않았습니다."
다소 어린아이 같은 알파에 비하면, 좀 더 성숙한 목소리를 지닌 베타의 말투 또한 알파나 마더 못지 않게 무척이나 딱딱하기 그지없는 기계식 음성이었으나, 부드러운 눈매 탓인지, 소유는 베타의 어조가 조금은 원만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알파의 눈동자 색관 정반대라 할 수 있는 푸른색 눈동자가 만들어 내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무심한 눈빛은, 알파의 붉은색 눈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마찬가지인 사항이었지만, 어차피 휴머노이드에게 인간이 가진 사사로운 감정을 굳이 눈동자 안에 새겨 넣을 필요는 없었다.
마더의 정보와 말에 따르면, 인간은 상대방의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상대방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확률은 비록 인간에 따라 다르나, 평균적으로 약 60% 정도인 그럭저럭 높은 정답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 바 자체적인 거짓말 탐지기나 진배 없다는 소리였다.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감정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았다.
-알파나 베타에겐 그런 쓸데없는 감정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소유 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기에, 개인적인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쿠르르릉.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주는 마더의 말에 소유가 미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다시 한번 우주선 내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마치 괴물의 뱃속에 들어온 것처럼 울려퍼졌다.
-사출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마더의 말이 재차 흘러나옴과 동시에, 양쪽에서 우주선을 고정했던 거대한 후크가 순식간에 풀리면서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건 우주선도 마찬가지였으나, 아직 우주선을 붙잡은 후크가 하나 더 존재하고 있는 건지, 그렇게 떠오르던 우주선은 어느 순간 '덜컹!' 우주선 내부에만 들리는 소리를 토해내며 우뚝 멈춰섰고, 잇따라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주선은 정확히 몸통의 반절을 격납고에서 끄집어내고 나서야 나아가는 것을 중지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어 보이는 진공의 세계가 마침내 소유의 눈 앞에 펄쳐졌다.
수 많은 감정들과, 수 많은 공허함이 감도는 공간들이, 이를 데 없이 수 많은 성운들로 가득한 우주가 뿜어내는 담담하지만 맑은 빛과, 총천연색을 보는 것 같은 화려한 수천억 개의 성단 사이에 조용히 녹아들어 있었고, 격납고를 비집고 들어왔던 밝은 태양빛은 기어이 소유가 있는 우주선 안까지 들어와 살포시 손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인 영롱한 빛이었으며, 손길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건지, 아니면 그저 출발을 위한 준비 단계 중 하나인 건지 알 수 없는 두꺼운 차단막이 일순 우주선 전체를 뒤덮어 버린 탓이었다.
소유는 자그마하게 피어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곧 알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뭘 해야 할까?"
그에 알파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포니테일의 형식으로 묶었음에도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유 님. 그냥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너희들은? 그렇게 서 있어도 괜찮아?"
"소유 님의 안전을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또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는 알파에게 소유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쿠르르릉.
-사출.
반복적인 진동음이 거듭 배어져나오고, 마더의 짧고 간결한 단어가 드디어 자신의 귓속에 파고 들어온다라 소유가 인지하던 순간, 일순 새카만 우주와 비스무리한 정적이 감돌던 우주선에서 돌연 거대한 쏠림 현상이 소유의 몸을 그대로 덮쳐왔다.
무작정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허리가 의지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굽혀지고, 탁자 위의 찻잔이 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으나, 천신에서 벗어나면서,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우주를 유영하는 단계에 이르러 우주선 내부에 약간의 무중력이 존재하게끔 되었는지, 떨어지던 찻잔은 다행히 완전히 바닥에 닿지 않았다.
대신 소유와 알파, 베타를 비롯한 수 많은 가구들이 모두 손바닥 한 뼘 정도의 높이로 두둥실 떠오르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건 이후 들려온 '무중력 상태를 제거하겠습니다.'라는 마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원래대로 돌아온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러기 전에 알파가 찻잔을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산산조각이 났었을 것이 분명했다.
-궤도 진입까지 2분 남았습니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흰 구름 덩어리가 가린 거대한 두 개의 땅덩어리와,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을 가진 바다가 고스란히 소유의 눈에, 비록 두꺼운 차단막에 가려져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마더가 실시간으로 보내오는 우주선의 영상 속에서나마 평면적으로 전해져 왔다.
-궤도 진입까지 1분 남았습니다.
영상 속의 테론이 더더욱 커졌다.
평면적으로 보이던 대륙과 구름, 바다가 서서히 입체적으로 바뀌어 갔다. 더불어 우주선의 맨 앞 돌출부위에 백열등 같은 하얀 빛이 서리기 시작했는데, 그건 마더의 '고궤도 진입 완료, 앞으로 약 30초 후 저궤도에 진입합니다.'란 말과 연이어 튀어나온 '대기권에 진입합니다.'란 말이 약간의 틈을 가지고 새어나온 이후로 점점 더 길어지며 늘어나는 혜성의 꼬리 같은 현상이었다.
두두두두.
고속 낙하로 인한 마찰 현상이 우주선까지 들썩거리게 하며 그 안의 소유를 연신 두들겨 대었다. 고통 같은 건 없었지만, 시야를 제대로 고정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던 알파와 베타는 조금도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소유와 똑같은 압력을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자리에 마치 붙박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질 않았던 것이었다.
-외기권에 진입했습니다. 앞으로 약 10초 후에 성층권에 진입합니다.
마더의 말이 기폭제가 된 건지, 우주선은 비로소 거대한 하나의 빛덩어리가 되었다. 많아지는 산소의 양 만큼이나, 많아지는 마찰력에 의한 공기의 가열로, 이제 완전히 백색의 전구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적어도 천 킬로미터는 되는 높이에서 겨우 십여 초 만에 무려 오십 킬로미터까지 내려왔으니, 어쩌면 새하얀 빛에 둘러 쌓인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다소 무식해 보이는 방식으로 성층권에 돌입하자, 테론에 존재하는 두 개의 대륙들이 더욱더 또렷하게 소유의 눈망울 위로 맺혀졌다.
그 중 반달형으로 깎여 나간 리엔 대륙 위로, 다시 나뭇가지같이 얼기설기 얽히는 산맥의 풍채들이 약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감속을 시작하겠습니다. 클로킹 시스템을 작동합니다.
그대로 지상에 추락해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낳을 것만 같아 보이던 우주선이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갔다. 그에 따라 마치 불이 붙은 것만 같아 보이던 백색의 빛도 점차적으로 사그라 들었고, 두꺼운 차단막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대류권에 다다르자, 새하얀 구름의 질감이 금방이라도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해졌다.
에베레스트를 연상케 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모두 약속이라는 한 양 구름을 뚫고 솟아나와 하나 같이 제 존재감을 웅장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그것을 지나 마침내 대지의 형태마저도 어렴풋이 구분되어 보일 정도의 높이까지 내려간 우주선은, 더이상의 감속도 필요치 않은 잔잔한 모습으로 유유히 구름 속을 거닐었다.
-테론에 도착했습니다.
뚜렷한 감정 표현 하나 없는 마더의 딱딱한 말이 마치 마무리를 지어내듯, 그렇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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