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형으로 만들어진 외형 탓에, 은연 중 '신의 요람'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리엔 대륙에서 가장 문명적으로 발달한, 나아가 문화적으로 발달한 제국을 손꼽으라면 모두 주저없이 외칠 '슈르벤'이란 이름을 가진 제국의 수도인 '마할레스'는, 타 제국이나 왕국에 비해 거진 오지라 불러도 좋을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옆의 큰 산맥을 중심으로 건립된 '예하난'과의 국경선에서 무려 200km도 안되는 지역에 세워지고 발달한 오지의 도시가 바로 마할레스, 이른바 '신의 테라스'라 불리는 슈르벤의 수도였던 것이다.
서쪽은 예하난이 숨어있는 산맥, 북쪽은 '가바츠'란 왕국으로 가기 위한 길목인 작은 사막 지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동쪽은 본격적인 슈르벤의 영토가 시작됨을 알리는 거대한 곡창 지대가 지평선 너머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남쪽은 서쪽과 마찬가지로 예하난의 거친 산맥이 마치 번갯줄기를 보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꺾여 쭉 아래로 뻗어나가 있었는데, 약 오십여 년 전에 일어난 대규모 '겨울나기' 덕에 뚫려버린 커다란 원통형의 상처는 여전히 일직선의 올곧은 모습을 유지하며 예하난의 중심부를 흉하게 꿰뚫어 놓은 상태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거친 땅의 광경이 말해주듯, 쓸려나간 산천초목의 본질적인 도입부라 할 수 있는 어린 새싹들이 장장 오십여 년이 다 되가도록 '겨울나기'가 휩쓸고 간 장엄한 풍혈 사이로, 그 머리조차 내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건 다소 신비롭다라 할 수 있는 엘프들의 마법으로도 절대 고치지 못한 일종의 저주와도 같은 흔적이었는데, 그 덕에 생긴 지름길 같은 원활한 유통 경로는 오히려 마할레스의, 다시 말해 슈르벤의 전체적인 경제력을 다지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결국 겨울나기가 끝나고 십여 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하나의 길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슈르벤, 예하난, 그리고 '마하멜'과 가바츠의 공인 아래, '바람의 계곡'이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바람의 계곡을 관리한다 할 수 있는 슈르벤의 '계곡지기' 델리스는, 아침부터 찾아와 떠들어 대는 하얀 법복을 정갈하게 입은 사내. 언젠가부터 바람의 계곡 한쪽 구석에 터를 잡고 눌러 앉아, 차가운 눈보다 더 희게만 느껴지는 다섯 개의 기둥이 돋보이는 신전을 그 위에 뚝딱 세워 놓고, 오로지 사내, 그 한 명으로만 이루어진 이름조차 불길한 '겨울나기' 신전의 유일무이한 사제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신께서 제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저 멀리,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귀중한 손님이 온다고 하시더군요. 여기, 바람의 계곡 위에서부터 내려오신다고 했습니다. 신께선 저와 델리스 씨가 마중을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갑작스레 찾아와 시끄럽게 문을 두들겨대는 통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임의적으로 검문소 안까지 데리고 들어왔건만, 대뜸 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 사제의 말에 델리스는, 그러니까 약 2년 전의 첫 만남 때부터 자신을 카르디엠이라 불러달라 요청했던 사내의 뜬구름만 열심히 잡아대는 말에, 그는 또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신탁의 내용인가요? 제가 당신과 함께 행동을 하라는?"
벌써 수 년을 계속한 계곡지기의 일은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는 사람들의 명단과 목적을 받아 적고, 그 목록을 가까운 예하난의 위병소와 마할레스의 검문소에 차례로 통신 구슬을 통해 전달을 해주는 극히 단순한 작업이 계곡지기의 전부였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엔 가히 수백의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은근히 많은 정신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탓에, 한나절이 훌쩍 지나면 스멀스멀 머리가 아파오는 꽤 고생스런 직업이기도 했다.
헌데 지금의 델리스는 출근한 지 채 한 시간도 흐르기 전에, 본격적인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꼭두새벽부터 벌써 머리가 다 아파 오는 지경이었다.
카르디엠이 말하는 신탁인지 뭔지가 영 껄끄럽기 그지없는 예하난의 위병소에 연락을 취하는 것처럼, 혹은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 사람과 괜한 입씨름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그의 기분을 짜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찍어 누르던 델리스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딴 헛소리나 하실 거라면 좀 가십시오, 사제 님. 오늘은 바쁘다구요. 이따가 유펜의 사절단이 오기로 했단 말이에요. 이제부터 그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구요. 그러니 좀 나가주세요. 사제 님이 이곳에 오신 후로부터 머리가 안 아픈 날이 없었다니까요?"
그러자 카르디엠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거야말로 신께서 당신을 필요로 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방문을 할 때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제가 모시는 신 님께서 당신을 귀히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보살핌은 필요 없어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저 오늘은 바빠요. 엘프들의 왕국인 유펜에서 사절단이 오기로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사제 님하고 어울릴 시간이 없어요."
단호한 델리스의 태도에, 방금까지 헛소리를 뱉어내던 카르디엠이 잠시 입을 다물고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말을 이어붙였다.
"오늘 오시는 손님께선 델리스 형제 님이 꽤 마음에 들어할 미인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 오실 겁니까? 신께선 엘프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에 델리스가 '풉'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엘프보다 이쁘다고요? 그 신이라는 작자는 눈이 좀 안 좋은가 보네요."
"글쎄요? 적어도 델리스 형제 님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은 잘 보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제 욕망이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델리스가 묻자, 카르디엠이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성인식을 치뤄야 할 18세가 되기 전에, 예쁜 여자 친구를 가지는 게 지금 형제 님의 첫 번째 되는 욕망이 아니십니까?"
"…아, 카일로스… 그 자식이 다 나불거렸나 보군."
금방이라도 탁자를 내려칠 것만 같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약이 잔뜩 오른 한숨을 내쉬던 델리스가 이내 카르디엠을 살짝 짜증이 돋아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신이라는 작자의 공상적인 말이 아니라 제 친구의 말을 따르시는군요. 차라리 제 친구를 당신 신전의 신으로 모시는 게 어때요?"
"오! 그것 참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지만, 아쉽게도 카일로스 형제 님은 아직 죽기가 싫다 하셨습니다."
"그 말은 결국 신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죽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소리군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희를 돌보시겠습니까? 죽음도 결국 하나의 생명이 시작되는 현상입니다."
"아직 죽은 뒤에 살아온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죽는다는 것은 이곳에서의 육체를 잃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미 잃어버린 육체를 되찾을 방법은 없지요. 죽음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세상엔 끔찍한 혼란이 찾아올 테니까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단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카르디엠의 다소 능구렁이 같은 넉살스런 태도에 살짝 질려버렸는지, 델리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잊을 만하면 뱉고 싶어지는 한숨을 길게 토해 내며, 탁자 위에 내려 놓았던 나무 컵을 집어 들고 그 안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