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2 93의 의미 2
“ 93번 남았네? ”
오른손을 가볍게 펼치며 골목길 벽 쪽으로 뻗었다. 그 순간 온몸에서 진동이 일어나듯 미세하기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느낌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오른손을 뻗은 쪽의 벽이 물결치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 인수야 하하! ”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를 위안삼아 호탕하게 웃으며 물결치는 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골목길에는 누가 있었냐는 듯 어둑한 골목길 어귀만 덩그러니 남아졌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전국에서 나름 유명한 테니스 유망주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대회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코치님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 오늘 경기 이기면 결승전인거 알지? 이거 우승하면 그냥 장난 없는거야 알지? ”
“ 아, 코치님 저는 테니스 선수 재목이 될 그릇이 아니라니깐요? 거참... ”
“ 또 그 소리! ”
코치님은 나를 테니스 선수로 키울 생각이신지 항상 나를 세뇌교육(?) 시키는 것 마냥 저런 류의 말을 늘어 놓으신다. 하지만 난 테니스 선수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테니스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 조차 없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대학생활 라이프를 다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예쁜 여자와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 상상만해도 입이 귀에 걸린다.
“ 야! 니 재능이 아깝잖아 재능이! ”
“ 됐고. 이번 대회까지만이에요. 진짜 거짓말 아닙니다 이거? ”
“ 이번 대회 좋아하시네! 절대 포기못해! ”
코치님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형, 동생처럼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옥신각신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것도 참 힘들다. 대화를 얼마나 주고 받았을까? 뭔가 앞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앞으로 틀었다. 맞은편의 차량이 우리 쪽으로 점점 향해오고 있었다.
“ 코...코치님! ”
내가 다급하게 외치자 코치님도 상황을 직감한 듯 본능적으로 빠르게 핸들을 틀었다.
‘ 콰아아아앙! ’
정면충돌은 피했지만 사고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차가 공중으로 뜨면서 회전했다. 차와 함께 내 몸이 공중에 뜬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18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18년은 살았다고 그간 살아온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유치원 때 울었던 일, 초등학교 때 군것질하던 일, 중학교 때 친구와 싸웠던 일, 고등학교 때 누군가를 좋아했던 일. 별의 별 일들이 미친 듯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내 손을 꽉 잡은 그 장면. 그 순간만큼은 정말 누군가가 내 손을 잡은 것 마냥 착각할 정도로 선명한 느낌과 기억이었다. 내 손을 놓음과 동시에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지며 내 기억은 끊어졌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눈을 떴을때는 병원이었고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뜬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옆에 있던 아빠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정확히 나를 향하는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목소리의 방향이 나를 향하고 있다. 이것만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을까? 그 장면에서 다시 내 기억은 끊어졌다.
지금 이건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손 끝의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하다. 아주 살짝 휘젓기만해도 공기의 감촉까지 손 끝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주변은 일렁인다. 당연히 꿈이겠지? 몇 걸음을 내딛었을까? 오른손목이 시큰거려 본능적으로 내려다봤다.
‘ 100. ’
어라? 난 문신한 적이 없는데 10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뭐지 이건. 하지만 궁금함도 잠시 오른팔이 내 의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뭐...뭐야! ”
내 의지대로 전혀 통제가 안된다. 오른팔은 천천히 올라와 어느 덧 앞을 향해 쭉 뻗어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오른손을 펼쳤다. 여전히 내 마음대로 통제가 안된다. 나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오른팔을 봤다.
“ 어...어?! ”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그 순간, 눈앞의 공간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 뭐...뭐야 이건. ”
동공이 미친 듯이 확장되고 이 상황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일뿐 눈이 멀 듯 아찔한 섬광이 내 시력을 앗아갔고 점차 희미했던 시력이 되돌아왔을 때는 병원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 꿈...꿈이였나? 후... ”
안도의 한숨인지 아쉬운 심호흡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튼 한숨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왔다. 참! 오른손목!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른손목을 확인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온 몸을 휘저었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오른손목 쪽으로 눈을 천천히 향했다.
‘ 100. ’
100이라는 숫자가 내 동공을 가득채웠다.
“ 다녀왔습니다. ”
굳게 닫힌 문을 열면서 목소리를 힘차게 내뱉었다. 저 멀리 부엌 쪽에서 엄마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
“ 그렇지 뭐. ”
신발을 주섬주섬 벗고 발을 안으로 들였다. 딱딱한 마루바닥이 발바닥 전체를 감쌌지만 난 이 마루바닥이 세상에서 제일 푹신하다. 마음이 놓이는 이 느낌 정말 행복했다.
“ 뭐 좀 먹을래? ”
“ 아니, 괜찮아 엄마. ”
이윽고 나는 방으로 곧장 직행했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뉘이지 않고 의자 속으로 몸을 빠뜨렸다. 가라앉는 듯한 이 기분 오늘 하루도 꽤나 피곤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피곤한 이유는 명확하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공간을 넘나 들 수 있다. 물론 매우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손목에 적힌 92라는 숫자는 아마 유추하건데 내가 이 능력을 발현 수 있는 제한 횟수 인 것 같다. 솔직히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항상 호기심에 꿈에서 봤던 그 자세를 취하기만 하고 그 다음 행동으로 이어 가지는 않았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면 꿈에서 본 대로 뻗은 오른손 앞 공간이 물결치듯 요동쳤지만 뭘 해야 될지 몰랐다.
100에서 99로 숫자가 내려간 계기는 내가 대학교를 복학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 아... 화...화장실. ”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유추하건데 본능이 아니었을까 싶다. 때마침 위치도 골목길 후미진 곳. 나는 눈앞이 흐릿흐릿해져 갔다.
“ 으... ”
오른손을 앞으로 펼치니 공간이 잔잔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나는 반쯤 눈이 풀린 상태로 그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 순간, 온 몸이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내가 한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한가닥의 정신을 붙잡고 집중하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지금 내가 방 침대 위에 보란 듯이 누워 있었다.
“ 뭐...뭐야 이거? 으아아아! ”
배에서 튀어 나오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다 필요없고 우선은 화장실이 1순위였다. 나는 식은 땀방울을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죽기 살기로 화장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때 이후로 간간히 능력을 쓰며 내가 알아낸 사실이 몇 가지가 있다.
1. 손목에 적힌 숫자는 내가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제한 횟수다.
2. 내가 가본 적이 있는 곳에 한정해서 갈 수 있다. 전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공간을 이동하기 전에 몸을 반쯤 넣어 이동할 장소를 5초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 이상은 몸이 튕겨져 나와 불가능하다. 아마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는 횟수가 감소되지 않는다.
4. 아마 그 교통사고 이후 이 능력을 얻게 된 것 같다.
이상 4가지 정도가 내가 알아낸 사실들이다.
“ 야! ”
“ 아이씨 깜짝이야!! ”
나는 심장을 감싸 쥐며 뒤를 돌아봤다. 설마 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내 뒤에 떡하니 서있는 사람은 연화였다. 나는 짧은 한숨을 픽하고 내쉬었다.
“ 또 왜~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화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씨익 하고 웃었다. 얘는 불안하게 왜 이런다냐... 내가 장담하겠는데 분명 같이 뭐 먹으러 가자는 신호다. 자... 하나, 둘, 셋.
“ 야! 편의점 가자. ”
하하하하! 맞췄다. 시험을 이렇게 맞추면 A+ 인데. 고달프다 참. 내가 황당한 웃음을 지어보이자 연화가 한쪽 눈썹을 올리면서 나와 눈을 맞췄다.
“ 이거 부탁 아니야. 반강제야. ”
“ 예...예. ”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엉덩이가 무거운지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좋겠는데 한 내 몸무게의 100배 정도로만? 나는 거의 끌려가듯이 연화를 따라 편의점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