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왕국에 여자 소드마스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이름난 여기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토록 자신의 이름을 단단히 각인시킨 여기사는 드물었다. 아니 아라베스가 처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 이 시점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유리는 어느새 주변에 묘한 침묵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나 괜찮았어요?"
자신의 앞에서 들려온 명랑한 목소리에 유리가 흠칫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썰물 빠지듯 양쪽으로 갈라진 학생들 사이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아름다운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전장의 여신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림 같은 자태였다. 더군다나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그가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콤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유리의 얼굴에 확연하게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런 그의 표정에 아라베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유리."
그의 당황한 표정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수들 마저 웅성거리지 시작하자 유리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 여자는.
"...힐가르드 경."
유리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엄격한 목소리에 아라베스가 보일듯 말듯 입술을 삐죽였다.
"다음 일정이 아카데미 내부 견학이었던가요?"
"그렇습니다만..."
그녀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한 시어도어 총장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라베스가 싱긋 웃어보이고는 허리춤에 꽂아놓은 예장용 검의 폼멜을 톡 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리 칼라스 경이 아카데미 내부 구경을 시켜주었으면 해요. 아까 중앙홀로 오는 길에도 무척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셨거든요."
친절하게 안내? 그녀의 다소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대답에 유리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는 그저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그녀를 불러서 중앙홀로가는 방향을 안내했을 뿐인데. 그 정도가 친절로 느껴졌다면 저 호의와 애정으로 가득차보이는 학생들의 태도는 무어라 따로 불러야 할까? 그는 입을 열어 아라베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 했다.
".....잠..."
"그렇게 해주겠나, 칼라스? 어차피 자네나 오르토에게 부탁하려던 일이니."
유리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시어도어 총장이었다. 그가 쐐기를 박듯 유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경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유리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시어도어 총장이 아라베스를 향해 걱정말라는 듯 미소지었다.
그는 왕국 내 인기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눈앞의 아가씨가 아카데미에서 좋은 기억들만 가져가주기를 바랐다. 이는 그녀가 힐가르드 후작가의 귀한 따님이자 현 황제의 여동생을 모친으로 두고있는 대귀족인 덕분이기도 했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던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학내의 중요한 행사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인상을 모두에게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먼저 두 손을 든 것은 유리였다. 그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까라면 까야지 일개 조교수인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는 대체 자신의 무엇이 이 화려한 여기사의 마음을 끌었을까 생각하며 묵묵히 앞서 걸었다. 어차피 잠깐의 호기심일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이상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둘 이유도 없고. 그는 아까의 노교수와 같이 아라베스 리마 힐가르드의 실력을 의심하고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덮어두고 칭송할 생각 또한 없다.
그녀는 기사가 된 그 순간부터 왕실 제 2기사단의 단장으로 내정되어 있었고, 전통적으로 검신(劍神), 검제(劍製)로 이름 높았던 리다라움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만큼 빛나는 재능을 지녔을 거라 예상 됐었고, 예상은 사실로 드러났다. 실제로 리다라움 왕가의 피를 이어 받은 이들 중에는 검사로 이름 높은 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로 그녀의 부친인 힐가르드 후작 역시 대륙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는 실력자 중 하나였다. 호랑이 새끼가 호랑이인 것이 어떻게 마냥 놀랄 일이 겠는가. 하지만 백만장자의 상속자와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를 같은 선상에서 볼 것인가는 다른 문제였다. 그가 그녀에게 관심있는 것은 그녀가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호랑이로 성장할 수 있느냐 정도일 것이다. 모두가 칭송해 마지 않는 그녀의 외모는 애초에 유리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내가 당신의 시간을 많이 빼앗았나요? 표정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데."
"제게 원하는게 있으십니까?"
뒷짐을 진 채 애교섞인 말투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하는 아라베스에게 유리가 불쑥 물었다. 다소 차가운 말투에 아라베스가 흐음 소리를 내며 유리의 옆 얼굴을 관찰하듯 훑었다.
"한 눈에 반했다면 믿을래요?"
"...믿어야 합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한 목소리로 유리의 푸른 눈동자가 아라베스의 자색 눈동자를 마주봤다. 눈 한번 마주치기 힘든 남자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라베스가 빤히 유리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시선이 높았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 보는 유리의 얼굴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변덕에 놀라고 있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그를 떠보던 것이 말을 섞으면 섞을 수록 왜인지 모르게 그가 마음에 들었다. 일견 차갑고 무뚝뚝해보이면서도 은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그랬고, 무심한 얼굴로 성실하게 구는 점도 유쾌했다. 실제로 그는 아라베스가 그에게 취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는 주제에 성실하게 그녀를 안내하고 있다.
지금껏 그녀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사람들의 대게 반응은 두가지로 나뉘었다. 그녀의 외모나 실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 혹은 어리지만 권력을 지닌 애송이에 대한 경멸과 시기. 하지만 드물게도 유리에게서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라베스에게는 그게 좀 희한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질색할 말이었던가요, 그게?"
"질색까진 안했지만...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은 일단 안 믿는 주의라서요."
"어머, 첫눈에 반한다는게 상식과 이성으로 해결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뭐... 그럼 그렇다고 칩시다."
대충 대답하는 유리에게 아라베스가 다시 생긋 웃어보였다. 유리가 그녀의 미소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다소 무성의한 태도에 아라베스의 입가가 조금 씰룩였다. 그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은 좀 상한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자신의 미소가 이렇게까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거의 처음이었다. 그 깐깐하고 엄격한 발루아 노공 마저도 그녀의 미소에는 반응을 하지 않았던가. 아라베스가 한쪽 눈썹을 씰룩이고는 팔짱을 꼈다.
"혹시 남자 좋아해요?"
그 말에 다시 유리의 시선이 아라베스를 힐끗 향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가 코웃음을 치는게 보였다. 아라베스의 눈이 샐쭉하게 가늘어지는 것을 본 유리가 약간 허탈해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당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보이지 않는 남자는 모두 남색가가 되는겁니까?"
"경험적 추론에서 나온 말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시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라베스가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며 맞받아쳤다. 유리가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어차피 저와 힐가르드 경은 오늘 이후 다시 뵐일이 없을테니 세상엔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이 있다는 사실만 아시고 불쾌한 일은 잊어버리시길."
그의 말에 아라베스가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남자의 말투와 태도에 오기가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대답을 고민하는 동안 팽팽하던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두 사람은 애초 목적했던 견학은 하는 둥 마는 둥 구경하는 사람치고는 빠른 속도로 건물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들이 아카데미의 사관 생활관을 돌아 나가는 순간 쐐액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 챙!
머리가 무슨 일인지 인지도 하기 전에 고개가 휙 물체를 따라 돌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한 유리가 급히 아라베스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유리의 눈이 커졌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