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번 곡도 좋다. 하람이 이번 신곡으로 딱이다. 고맙다. 친구야.”
지음과 둘도 없는 친구인 우경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맞은편에 앉은 지음에게 말했다.
“뭘, 나도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지음이 빨대를 잡은 긴 손가락으로 얼음이 든 아메리카노를 휘저으며 답했다.
“근데, 어쩐 일로 네가 직접 나왔네. 정비서는 휴가 갔어?”
평소 곡 작업 때문에 바쁜 지음을 대신하여 완성한 곡을 전달하는 것은 지음의 전담비서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우경의 질문에 지음이 답지않게 뜸을 들였다.
“...그만뒀어.”
“왜?”
우경이 음료를 마시려다말고 물었다.
“음... 글쎄.”
지음이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뜸을 들이자 우경이 안봐도 뻔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뻔하지. 너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고 쪽팔려서 그만뒀겠지. 아니야?”
“...”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깐 맞네. 그래도 두 달이면 오래 갔지. 그런데, 정비서는 진짜 너한테 관심없어보였는데. 결국엔 또 일이 그렇게 됐구만. 그러니깐 너무 친절하게 대하지말고 거리를 두라고.”
우경의 말에 아메리카노가 든 컵을 만지작거리던 지음이 입을 열었다.
“나 별로 친절하게 안대했는데...”
“네가 그 외모로 웃어주는거 자체가 잘못이라고 임마! 계속 네가 웃어주면서 잘해주니깐 여자들이 착각하는거잖아. 여자들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이야!”
우경의 말에 지음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본 우경이 대책을 말해주었다.
“아님 여자친구 있다고 말하라니깐.”
“근데, 그건 거짓말이잖아. 그래도 거짓말은 하면 안되지.”
“하아~ 네 맘대로 해라.”
우경이 체념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부터 네가 다 하는거야?”
“아, 오늘만 내가 나온거야. 아침에 허집사 아저씨한테 말했더니 알아보겠다고 하시더라.”
“그러지말고 이제 그냥 메일로 보내. 매번 이렇게 만나서 곡 전달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
지음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싫어, 같은 실수 반복하기 싫단말이야.”
2년 전, 지음은 신인 작곡ㆍ작사가 치고는 이례적으로 좋은 기회를 잡았다. 지음이 만든 곡을 우연히 들은 톱 여가수가 지음에게 앨범 전곡을 맡긴 것이다. 톱 여가수는 2년 만에 컴백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있었다. 그런데, 그 컴백앨범을 완전 초짜인 지음이 책임지게 된 것이다. 지음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5개월간 심혈을 기울여 곡을 완성했다. 문제는 다음에 발생했다. 곡을 완성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비몽사몽하던 지음이 메일주소의 철자 하나를 틀리게 적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고 만 것이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지음이 만든 전곡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계약은 파기됐고, 5개월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그 일을 계기로 지음은 본의 아니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지음은 전담비서를 고용하여 고집스럽게 만나서 곡을 전달하고 있다.
“으이그, 넌 보면 이상한데서 고집스럽더라. 너 계속 그렇게 고집 부리다가는 피곤해서 아무도 너랑 일 안한다. 나면 모를까.”
우경의 말에 지음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네가 나랑 같이 일...”
“미쳤냐?”
지음은 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부터 하는 친구를 노려보았다.
“아직 말 다 안했거든. 그리고, 왜 싫어! 만날 때마다 나한테 상사 욕하잖아. 친구인 너랑 일하면 나도 좋고, 너도 좋지않냐?”
“상사 욕은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하는 거거든. 나 힘들지만 이 일 재미있으니깐. 다른 사람 알아봐라.”
“쳇, 알았어. 근데, 너 안 들어가봐도 되냐? 아깐 바쁘다며.”
“아, 맞다. 곡 받았으니깐 빨리 녹음하러가야지.”
우경이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반해 여전히 앉아있는 지음을 보고 우경이 물었다.
“너는 안가?”
“난 이거 다 마시고 가려고.”
지음이 아메리카노가 반 정도 남은 컵을 흔들어 보였다. 지음이 컵을 흔들 때마다 얼음들이 부딪혀 소리가 났다.
“그럼, 마시고 가. 먼저 간다.”
지음이 대답대신 커다란 손을 흔들었다. 지음은 카페의 창문으로 뛰어가는 우경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우경은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자 서둘러 길을 건너고는 건너편의 여학생들의 무리를 헤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경은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아이돌 기획사에 취업하여 현재 경력 2년차의 가장 바쁜 막내직원이다.
‘중학교 때는 되게 까불거리던 녀석이었는데.’
진지하게 일하는 친구의 모습은 지음을 매번 놀라게했다.
아메리카노를 모두 마신 지음이 가방을 챙기고, 우경이 마시던 컵과 자신의 컵을 트레이에 올려 직원에게 반납하고 카페를 나와 신호를 기다렸다. 지음의 차가 주차된 주차장은 길을 건너야했다.
‘벌써 2시간이나 지났네. 빨리 들어가서 곡 작업 해야하는데... 서둘러야겠다.’
지음이 만든 곡은 인기가 많아 곡을 얻으려 줄 선 기획사들이 수두룩했다. 왜냐하면, 지음의 곡을 받은 가수들은 항상 대박이 났기 때문이다. 지음의 곡은 한 번 음원사이트에 올라가면 줄곧 1위에서 머무르며 내려올 줄을 몰랐다. 지음은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행보가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음의 집안은 대대로 유명한 미술가 집안이다. 아빠와 엄마 모두 유명한 화가였고, 형과 동생도 화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는 중이다. 오직 지음만이 미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지음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둘 다 예체능이니깐 말이다.
물론, 지음도 어릴 때, 그림을 그렸었다. 하지만, 지음은 늘 형인 해음과 동생인 도음에게 묻혔다.
“와~ 실력이 굉장하네요. 부모님을 능가할 것 같은데요.”
“이 실력이 10살짜리 실력이라고요? 정말 대단해요.”
“진짜 굉장하지않나요? 천재에요. 천재.”
“이런 것이 재능이군요. 정말 멋져요.”
사람들은 항상 입을 모아 해음과 도음의 그림실력을 칭찬했다.
“음... 좋네요...하하.”
반면에, 지음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반응이었다. 그들의 그런 반응에 지음은 민망하여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음이 정말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부모님의 유명세에 비해, 형과 동생의 실력에 비해, 부족한 실력이었을 뿐이다. 그렇다. 지음에게 있어 미술은 어정쩡한 재능이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주목받는 것은 형과 동생이었고, 지음 본인도 그것이 익숙했기에 상관없었다. 지음은 그저 ‘그래도 이정도 실력이면 내 밥벌이는 하겠지’하며 중학생때까지만 해도 흥미도 없는 미술을 계속 했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는 지음을 보고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지음을 스쳐지나가다 다시 뒤돌아보는 여자들도 꽤 된다.
그렇다. 지음은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29살이라는 나이에 꽤 이름난 작곡ㆍ작사가로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거기다 다정하고 친절하기까지하여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다만, 지음에게도 고충이 있다면 사기캐릭터인 덕분에 지음이 고용했던 비서들이 전부 지음에게 고백했다 차이고는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고용했던 비서들이 전부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일이 익숙해지면 그만두는 비서들 때문에 지음은 곡 작업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갑작스럽게 그만둔 정비서 때문에 지음은 예정에도 없이 곡 작업을 중단하고 곡을 전달하기 위해 나와야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담당하는 하집사 아저씨에게 비서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며 가능하다면 남자를 우선해서 고용해달라고 말하였다.
‘빨리 구해져서 곡 작업에만 집중하고 싶다.’
지음은 알 수 없었다. 본인은 특별히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비서들이 고백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친구인 우경은 항상 지음의 잘못이라고 말하여 지음은 정말 ‘자신에게 마성의 매력이 있는 것일까’라고 잠깐 생각도 했지만, 인기가 많은 형과 동생을 생각하며 이내 자신의 자뻑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거짓말인게 싫으면 진짜 여자친구를 만들면 되지않냐는 우경의 충고에 지음은 항상 말없이 웃기만했다. 지음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 정확하게 말하면 첫사랑을 잊지 못하여 더 이상 다른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신호가 바뀌고, 지음이 길을 건너며 우경이 들어간 커다란 건물의 이름을 나지막히 소리내어 읽었다.
“이루다 기획사...”
우경이 다니는 기획사 이름을 보거나 들을 때 마다 지음은 첫사랑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