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어억~
경쾌한 미트소리와 함께 마운드에서 쏘아진 경식구가 글러브에 우악스럽게 꽂혀 들었다.
'구속은 120km 정도지만... 저 정도로 지저분한 무브먼트라면...'
개승중학교 감독 박성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운드 위를 바라봤다.
"스읍~후우~"
모자를 깊게 눌러 쓴 키 178cm 가량의 소년이 마운드 위에서 짧게 심호흡한다.
개승중학교 유니폼 뒷면에 선명하게 찍힌 1이라는 숫자가 이 소년이 개승중학교의 에이스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스윽
마운드 위의 소년이 땀을 닦기 위해 모자를 고쳐쓰는 그 때 마침내 소년의 얼굴이 살포시 드러났다.
"꺄아아아아악! 진감아!"
"진감이 오빠! 꺄아아아악! 나 죽어! 오늘 그냥 나 죽여 줘!"
"죽여줘? 그래 이년아, 죽어라 죽어! 꺄아아아악, 진감이 오빠! 사랑해!"
순간 운동장 한 구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여학생들의 목소리에 박성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개승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기 때문에 간혹 야구부 연습이 있는 날이면 저렇게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응원을 하곤 했다.
"에잉, 쯧쯧쯧. 가씨나들 저거, 저거. 집에서 즈 아부지들은 저라고 있는거 알까 모르긋네"
박성곤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개승중학교 코치 김용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김용민은 비록 프로선수로서의 커리어는 별 볼일 없었지만 일찌감치 모교를 위해 코치의 길로 들어서 올해로 코치 경력이 10년을 훌쩍 넘은 베테랑이었다.
"안 그렇습니까, 감독님? 저도 저만한 딸내미가 있는데 혹시나 저러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감이 오빠, 나 죽어. 그냥 날 죽여줘, 제발. 너무 멋져! 꺄아아아아악"
그 때 용민의 바로 옆 운동장 화단에서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용민이 짐짓 한 쪽 귀를 틀어 막았다.
"아, 참말로 귀청 떨어져나가긋네!"
짜증을 내며 소리가 울려 퍼진 방향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용민이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너...너..."
어떤 노땅이 재수없게 찬물을 끼얹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린 여학생도 자신을 바라보며 손가락질 하는 남자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150cm 작은 키에 새하얀 피부, 단발머리가 유독 잘 어울려 귀염성이 묻어나는 얼굴, 오른쪽 가슴에는 '김세연'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달고 있는 여학생이 더듬, 더듬 입을 열었다.
"아...아빠..."
"오냐, 이년아. 내 오늘 니를 죽이주께. 오늘 고마 내 손에 죽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오는 다가오는 용민을 발견한 세연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한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서라 이년아! 내 오늘 진짜 니 다리뭉댕이 하나 뽀사뿐다"
"동네 사람들! 여기 멧돼지같은 아부지가 하나 밖에 없는 이쁜 딸내미 다리를 뽀사려고 하네. 꺄아아아악"
"지랄 똥을 싸고 있네. 아 안서!?"
그렇게 한참을 딸과의 추격전을 벌이던 용민이 잠시 후 헉헉 거리며 박성곤에게 다가왔다.
"자네 딸은 언제봐도 기운이 넘쳐서 보기 좋구먼"
숨을 몰아쉬던 용민이 성곤의 말에 팍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후우~ 너무 넘쳐서 문제지요. 에잉, 쯧.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푸념하는 용민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성곤이 픽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딸은 기운이 저리 넘치는데... 아비되는 사람은 기운이 너무 없군. 자네 운동 좀 해야겠어?"
"예?"
"그래도 한 때 운동했다는 사람이 여중생 하나 못 잡아서야... 애들이 비웃겠네"
성곤의 말이 끝나자 마침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몇몇 학생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한다.
"마! 운동 안하나!? 빠져가지고, 오데 감독님이랑 코치님 말씀하시는데 킥킥대고 있노, 오늘 한때까리 할래?"
"아닙니다!"
후다다다닥
큰 소리로 외친 학생들이 부리나케 사라지자 용민이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이 짓도 참 힘드..."
뻐어어어억~
그 때 이전보다 더 큰 미트소리가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치 젓가락처럼 뒤를 잇는 여학생들의 고함소리를 한 귀로 흘린 용민이 마운드 위로 시선을 돌렸다.
"감독님"
"...?"
"대체 진감이를 어떻게 야구부에 입단시킨 겁니까?"
용민의 말에 성곤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1년이 훌쩍 지난 일을 떠올렸다.
********************
"혹시... 야구 해 볼 생각 없니?"
성곤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진감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반대하실거에요"
"아버지?"
자신을 바라보며 반문하는 성곤의 눈빛을 진감이 애써 외면했다.
그 모습에 씨익 미소지은 성곤이 말을 잇는다.
"그 말은... 아버지만 허락한다면 야구를 할 생각이 있다는 것이겠지?"
"예?"
"너는 야구를 하고 싶지만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야구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아버지만 허락한다면 야구를 할 생각이 있다. 아니니?"
인자한 미소로 물어오는 성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진감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예"
"가자"
"예? 어딜?"
곧바로 이어지는 성곤의 말에 진감이 당황한다.
"지금 바로 가자, 너희 집으로"
"예!?"
놀라 펄쩍 뛰는 진감의 어깨를 두 손으로 힘주어 잡은 성곤이 진감의 두 눈을 마주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벌써 2학년인 너에게 지금 당장 야구를 시작해도 여기 있는 아이들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늦은 편이란다"
"..."
"남자가 뜻을 품고 일을 시작했다면... 최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최고..."
성곤의 말에 진감이 따라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니 행동, 니 선택 하나하나가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
"마크 프라이어가 될지, 랜디 존슨이 될지... 아니면 여느 또래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대로 평범하게 졸업을 하게 될지. 선택은 너의 몫이다"
당시 박성곤의 말을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코치,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했다.
마크 프라이어가 그 재능을 미처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선수생활을 은퇴한 비운의 천재였다면, 랜디 존슨은 그 재능을 활짝 만개해 결국 명예의 전당에 까지 오른 축복받은 천재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두 선수 모두 한 시대를 뒤흔든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진감은 이윽고 결심을 한 듯 박성곤을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고, 진감의 아버지 박종범을 만나게 된다.
덜컥, 끼이이이익
낡은 쇳소리를 내는 현관문 소리를 들은 종범이 밝은 미소로 진감을 맞이했다.
"아들, 아빠가 오늘 아들 좋아하는 치킨 사들고 일찍 왔..."
기름종이에 돌돌싸여 먹음직스러운 치킨 냄새를 풍기는 검은 봉지를 휘, 휘 들어보이던 종범이 곧이어 진감을 뒤따라 들어오는 성곤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감...감독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성곤이 이내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종범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자...자네..."
잠시 눈을 비비던 성곤이 다시 눈 앞의 사람을 바라보고는 이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 아들이었나?"
성곤의 말에 종범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허... 마크 프라이어가 여기도 있었군"
그 모습에 성곤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감독님이 저희 집에 찾아오셨다는 것은... 진감이 때문이겠지요?"
종범의 말에 성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자네 아들은 야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야구를 위한 신체를 타고났지."
성곤의 말에 종범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진감이가 야구를 하는데 최적의 신체를 타고 났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불혹을 넘을 때 까지 야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저 때문에 어린 제 아들이 제법 많이 고생을 했거든요"
"..."
"마치 손목의 뼈가 없는 듯한 유연성, 작은 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 14살의 나이로 사과를 우그러뜨리는 악력까지... 진감이는 마치 야구를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았죠"
"그런데 왜..."
"왜 야구를 시키지 않았냐구요? 그 이유는... 감독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종범의 말에 성곤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비운의 천재는 그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한 때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중등 혹사 야구로 그 재능을 미처 피워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저는... 진감이를 저처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더더욱..."
종범의 말을 모두 들은 성곤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
"...감독님!"
성곤의 행동에 종범이 경악했고, 이를 지켜보던 진감이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미안하네, 모두 내 탓이네"
"왜 이러십니까, 감독님. 감독님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다고..."
종범이 빠르게 자세를 낮추며 어쩔 줄 몰라했다.
"자네가 한참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나이... 자랑같지만 그 때의 나도 우리나라 야구계에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힘과 능력이 있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얘깁니까, 일어나십..."
뚝, 뚝
성곤의 주름 가득한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하자 종범이 입을 다물었다.
"감독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감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를 믿어줄 수 없겠는가?"
성곤의 물음에 종범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무려 1시간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종범이 입을 열었다.
********************
"감독님...?"
혼자 한참을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성곤의 모습을 발견한 용민이 작은 목소리로 성곤을 불렀다.
멈칫
용민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성곤이 운동장 한 쪽 구석을 손가락질 했다.
"저거... 자네 딸 아닌가?"
살금, 살금 학교를 나서는 세연을 발견한 용민이 눈을 부라린다.
"야 이년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후다다다다닥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지는 용민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성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젊음이란... 좋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