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멧돼지마냥 더그아웃을 뛰쳐나오던 태수가 멈칫한다.
휘~ 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승현이 태수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힐끔
승현이 마운드 위로 시선을 던지자 용성이 모자를 살짝 벗으며 외친다.
"실수, 쏘리!"
그 태연한 모습에 심판도 이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둔다.
배트를 바닥으로 가볍게 던진 승현이 보호장구를 벗고 1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괜찮냐?"
1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개승중학교 코치 용민이 다가오는 승현이를 향해 물었다.
"괜찮습니다. 맞은 부분이 엉덩이라서..."
"잘 참았다"
"...예"
용민의 말에 짧게 대답한 승현이 마운드 위로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툭, 툭
승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용민이 1루에서 멀어지자 심판이 큰 소리로 외친다.
"플레이!"
심판의 외침과 동시에 타석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쭈구려 앉아 대기하고 있던 개승중학교 3번 타자, 3루수 정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민아"
더그아웃을 나오며 자신을 부르는 태수의 목소리에 석민이 멈칫한다.
"꼭 쳐라. 우리 팀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니 타격능력을 보여줘"
태수의 말에 피식 미소지은 석민이 이내 걸음을 옮겨 타석에 들어선다.
*******************
'이번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놈이군'
타석에 들어서는 석민을 바라보며 용성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중학생활 3년동안 윤용성은 개승중학교 야구부와도 몇 차례 시합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용성에게 개승중학교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타자를 꼽으라면 용성은 고민도 없이 눈 앞의 정석민을 택할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타격능력만 놓고 보면 개승중학교의 주장인 정태수가 더 뛰어나다.
정태수는 이미 중등부 레벨을 뛰어 넘어 국내 프로구단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차세대 국가대표급 공격형 포수였으니까.
'포수 주제에 4번 타자급 타격 능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
사실 용성은 평소 '포수'라는 포지션을 상당히 무시했다.
선천적인 운동신경이 떨어져 경기내내 쭈구려 앉아 미트나 갖다 대는 무식한 놈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성의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해졌다.
중학교 3년의 야구부 생활동안 또래 포수들은 자신의 공에 배트조차 제대로 갖다대지 못했으니까.
'물론 저 괴물 돼지새끼는 예외지만...'
힐끔
타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더그아웃 근처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정태수를 잠시 쳐다본 용성이 피식 웃었다.
'지금은 이 놈이 더 문제인데...'
다시 타석으로 시선을 돌린 용성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컨택능력과 정확도만으로 따져보면 오히려 저 괴물보다 눈 앞에 이놈이 더 뛰어나다.
투수든 타자든 선수들에게는 상성(喪性)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 상성면에서 봤을 때 타석에 있는 정석민은 윤용성에게 최악이었다.
"플레이!"
용성의 생각이 길어지자 심판이 다시 한 번 마운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일단 한 구 빼본다'
포수의 싸인에 고개를 저은 용성이 바깥 쪽 공을 요구했다.
"후웁~"
짧게 숨을 들이 쉰 용성이 그 큰 체구로 부드럽게 와인드업 한다.
파악!
순간 힘차게 왼쪽 다리를 내딛으며 공을 뿌린다.
휙! 뻐어어어억~
묵직하게 울리는 미트소리와 거의 동시에 심판이 큰 소리로 외친다.
"볼!"
바깥 쪽으로 낮게 제구된 공이 거의 스트라이크 존에 걸쳤다고 생각했는데 볼 판정을 받자 팍하고 인상을 찌푸린 용성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오늘은 좁군"
곧이어 다시 와인드업.
휘익! 뻐어어억~
"볼!"
"이 개새...!"
이번에는 몸 쪽, 정확히 스트라이크 존을 걸쳤다고 생각한 공이 또 다시 볼 판정을 받자 용성이 욕지꺼리를 내뱉으려고 했다.
"뭐라고 했나!?"
용성의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심판이 마스크를 벗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채 중얼거린 용성이 잠시 모자를 고쳐 쓰며 깊게 심호흡했다.
"스읍~후우...."
흥분을 진정시킨 용성이 다시 투구(投球) 준비를 한다.
'어디 이 것도 볼이라고 지껄여봐라'
속으로 중얼거린 용성이 힘차게 와인드업 한다.
"으랴아아아아!"
이전과 달리 기합성을 내지르며 용성이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를 향해 힘차게 뻗어나갔다.
까아아아아아앙!
운동장을 경쾌하게 울리는 타격소리, 그리고...
배트에 맞은 공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용성이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반사적으로 글러브를 내민 채 몸을 움츠렸다.
퍼어억~
가죽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심판이 외친다.
"아웃!"
얼떨결에 날아오는 공을 글러브로 잡아 투수 직선타 아웃시킨 용성이 타석을 바라본다.
"아깝다"
석민의 입모양을 용케 알아들은 용성의 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올라왔다.
비록 중학레벨이지만 정태수와 더불어 국내 최고의 유망주로 손 꼽히는 놈의 타격능력이라면 충분히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낼 수 있다.
생각을 마친 용성이 손에 낀 글러브를 팍하고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이 개새끼가...!"
"타임! 자네 뭔가!?"
용성의 돌발적인 행동에 심판이 경기를 일시중지 시켰다.
"아~ 아닙니다. 저 친구가 더위를 먹었나 보네요. 하하하, 제가 잘 달래겠습니다. 잠시만요"
마산중학교 포수 김민식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운드를 향해 달려갔다.
"용성아, 진정해. 릴렉스, 이럴수록 더 침착해야지. 여기서 흥분하면 결국 저 놈들의 작전에 말려드는 것 밖에 안돼"
민식의 말에 용성이 낮게 으르렁 거린다.
"개새끼야, 리드 똑바로 안해?"
"...어?"
"니가 리드를 똑바로 안하니까 저 새끼들이 미쳐 날뛰는 것 아냐, 어?"
"...미안"
민식의 사과에 용성이 주먹을 앞으로 뻗는다.
퍽
"윽"
갑작스럽게 용성의 주먹에 가슴을 가격당한 민식이 신음을 흘렸다.
"포수면 포수답게 미트라도 잘 갖다대라고, 버러지새끼야. 그 정도도 못하겠으면 그냥 야구 때려치우던가"
말을 마친 용성이 바닥에 떨어진 글러브를 주워 들었다.
"뭐해? 빨리 안꺼져?"
"아...알았어"
이윽고 홈 플레이트로 돌아온 민식이 포수마스크를 뒤집어쓰자 심판이 큰 소리로 외친다.
"...플레이!"
*******************
"저 새끼 열 좀 받았나 본데?"
마운드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태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석민에게 말했다.
"..."
"너 솔직히 말해봐. 저 새끼 진짜 맞출 생각이었지?"
"..."
자신의 말에 묵묵부답(默默不答)으로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석민의 뒷 모습을 보며 태수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다.
"재미없는 새끼. 그래도... 간지는 좀 아네"
이내 타석에 들어선 태수가 눈을 빛낸다.
"우리 에이스님의 소중한 리밴지 매치인데... 이 기회에 점수를 좀 뽑아줘야 겠지?"
말을 마친 태수가 타격자세를 취한다.
거구(巨軀)에 어울리지 않는 역동적인 자세.
으드득 이를 간 용성이 힘차게 와인드업 한다.
힘차게 바닥을 박차는 다리, 그리고...
쉬이이이익!
이전보다 힘이 더 많이 실린 듯 용성의 손을 떠난 공이 포수의 미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온다.
그 순간 눈을 번쩍인 태수가 한 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리며 힘차게 스윙한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금까지와 비교가 되지 않는 강한 타격음과 함께 태수의 배트에 맞은 공이 높이, 높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