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도발하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베이스를 한 바퀴 돈 석민이 홈 플레이트를 향해 다가오자 태수가 씨익 미소 지었다.
"살아있네"
짝!
손을 내미는 태수를 보며 그대로 하이파이브한 석민이 말없이 더그아웃으로 돌아간다.
"와아아아아!"
팀원들의 환호를 받는 석민을 보며 피식 웃은 태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여기서 못살리모 주장도 아니지"
낮게 중얼거린 태수가 타격자세를 잡았다.
*********************
"이 개 썅!!!!"
팍!
욕지거리를 내뱉은 용성이 마운드를 걷어 찼다.
'침착... 침착하자...'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용성이 타석을 바라봤다.
'이제 겨우 1점이다. 저 괴물 놈을 루상에 보내더라도 나머지 놈들을 전부 잡으면...'
속으로 중얼거린 용성이 투구 모션을 취한다.
"된다고!!!!!"
기합소리인지 모를 용성의 외침과 함께 공이 미트를 향해 날아간다.
'좋...!'
낮게 제구된 공에 불끈 주먹을 쥐려던 용성이 눈을 크게 뜬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공이 중앙 팬스를 향해 쭉쭉 뻗어 나간다.
배트를 휘두른 자세 그대로 공의 궤적을 쫓던 태수가 피식 웃으며 바닥을 향해 배트를 집어던졌다.
"아~ 백투백홈런(back to back home run)!"
"중앙 팬스를 완전히 넘겨 버렸어요! 과연 저 선수가 중학생이 맞나요!? 엄청난 힘이네요"
"이건 크네요! 연타석 초구홈런이라니! 그 것도 마산중학교의 저 윤용성 선수를 상대로 엄청나네요! 이건 타격이 크겠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함성 소리에 용성이 글러브를 벗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팍!
"시발!!!!!!!!!!!!!"
잔뜩 흥분한 용성이 다음 타자 마저 볼넷으로 내보내자 민식이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한다.
"타임 좀 부탁드립니다"
심판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민식이 빠르게 마운드로 다가간다.
"오지마!"
멈칫
용성의 외침에 민식이 멈칫한다.
"오지마라.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사납게 눈을 번뜩인 용성이 민식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식이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었다.
"이 새끼가 진..."
"겁나냐?"
"뭐?"
"쫄았냐고"
"근데 이 새끼가 뒤질라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용성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니 꿈이 뭐야?"
멈칫
"뭐?"
민식의 물음에 그 자리에 멈춰 선 용성이 반문했다.
"니 꿈. 어렸을 때부터 너는 항상 내게 얘기했었지. 세계 최고의 메이저리거가 될 거라고"
사실 처음부터 용성이 민식을 이렇게 까지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었다.
민식과 용성의 아버지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 막역한 사이였고 그 때문에 민식과 용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야구선수라는 같은 꿈을 꿨던 두 소년은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더 끈끈한 관계가 되었고 나중에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윤용성이 자신의 재능에 대해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용성은 자연스럽게 '투수' 보직을 부여 받았고, 상대적으로 재능이 뒤떨어지던 민식은 '포수' 보직을 부여받았다.
같은 또래 내에서는 누구도 용성의 공을 쉽게 치지 못했고, 그 압도적인 재능을 언론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하기 시작하면서 용성의 자만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용성이 민식이나 다른 또래의 아이들을 무시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
침묵을 지키는 용성을 보며 민식이 말을 잇는다.
"말해봐. 지금 니 꿈. 세계 최고의 메이저리거가 되는거야?"
"..."
자신의 물음에도 입을 꾹 다문채 죽일듯이 노려만 보는 용성을 보며 민식이 쓰게 웃었다.
"어렸을 때 내 꿈은 뭐였는지 알아?"
"...?"
"너처럼 되는 것"
"...!"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나고 당당한 니가 나는 참 부러웠어. 하지만..."
잠시 머리를 긁적인 민식이 말을 잇는다.
"곧 내 재능으로는 절대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너처럼 신체조건이 뛰어난 것도, 재능이 탁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
"혹시 내가 왜 포수가 되었는지 알아?"
"...그야 실력이..."
용성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민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물론 실력이 떨어져서 라는 이유도 있지만, 포수는 내가 지원해서 부여받은 보직이야"
"...!"
민식의 말에 용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왜..."
대부분의 중학 야구부 소년들은 '포수' 라는 보직을 기피한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투수' 라는 보직을 꿈꾸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포수가 힘들고 재미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그 때문에 용성은 민식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 최고가 될 니 공을 직접 받고 싶었으니까"
"...!"
"멋있잖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메이저리그 투수를 내가 직접 리드한다는 거"
말을 마친 민식이 씨익 웃었다.
"최고가 될 투수가 고작 이런 곳에서 주저 앉아 있을거야?"
"자네! 타임시간이 너무 길다!"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심판의 목소리에 민식이 몸을 돌렸다.
"해보자고. 미래의 메이저리거"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민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용성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세계 최고의... 메이저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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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랴!"
"우쌰!"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나머지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용성을 보며 태수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저 새끼가 갑자기 약을 빨았나. 임마 박진감이, 심판 나으리 좀 모셔와봐. 저 새끼 도핑 테스트 함 해보자"
태수의 말에 풋하고 웃음을 터뜨린 진감이 마운드를 바라본다.
"저래야 윤용성이지"
"뭐라? 니가 저누마한테 덜 괴롭힘 당했나보네? 평이 후하다?"
태수의 말에 진감이 어깨를 으쓱한다.
"인성은 몰라도 그 실력만큼은 단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해왔지"
"헐..."
"그리고..."
진감이 말 끝을 흐리며 마운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너무 쉽게 이기면 재미없잖아?"
"올... 박진감이! 패기보소!"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린 태수가 포수 마스크를 뒤집어 썼다.
"이번 회는 우리도 세 타자 연속 삼진이다! KKK! 알제!?"
태수의 외침에 진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을 향해 뻗었다.
"개폼 잡고 앉았네"
피식 웃은 태수가 제자리에 쭈구려 앉자 심판이 큰 소리로 외친다.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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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마산중학교의 4회 말 공격에서 진감이 보란듯이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 세웠고 경기는 두 투수의 역투로 5회 말까지 2점 차를 유지한 채 계속 흘러갔다.
"우랴!!!!"
"스윙 스트라잌! 삼진!"
"으랴!!!!"
"스윙 스트라잌! 삼진!"
용성이 기합성과 함께 삼진으로 이닝을 종료시키면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에서 진감도 기합성을 내지르며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운다.
그야말로 완벽한 투수전 양상.
"징한 새끼들..."
개승중학교의 유격수, 시훈이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6회 초 개승중학교의 공격, 선두 타자로 9번, 박진감이 타자용 헬멧을 고쳐 쓰며 타석에 들어섰다.
'점수는 2점차... 지금까지 잘 막아왔지만 이 점수차는 아직 불안해'
배트를 가볍게 휘두르며 진감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2점차와 3점차는 하늘과 땅 차이. 여기서 내가 딱 한 번만 출루하면...'
순간 눈을 번쩍 뜬 진감이 배트를 힘주어 말아 쥐었다.
'공은 충분히 눈에 익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친다!'
타격 자세를 취하는 진감을 보며 용성이 힘차게 와인드업한다.
그리고...
뻐어어어어억!
"스투~~~~~~~~라잌!"
경쾌한 미트소리와 동시에 공이 바깥쪽으로 낮게 파고 들었고 심판이 큰 소리로 외쳤다.
'100개 가까이 던졌으면서 이런 구위라니...'
현재 배팅 실력으로는 저 정도로 낮게 빠지는 공을 건드릴 수 조차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진감이 타석 안 쪽으로 바짝 붙었다.
힐끔
진감의 위치를 확인한 민식이 용성에게 싸인을 보낸다.
'겁 한 번 주자. 안 쪽으로 높게'
민식의 싸인에 고개를 끄덕인 용성이 부드럽게 와인드업한다.
높게 차 올라가는 다리, 전방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팔.
쉬이이이이익!
용성의 손을 떠난 공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민식의 미트가 위치한 곳을 향해 정확히 날아든다.
그 순간...
퍼어어어어억!
미트소리가 아닌 무언가 가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진감이 그대로 쓰러진다.
털썩.
"박진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비명과도 같은 태수의 목소리가 더그아웃을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