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감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여고생들 사이에 끼여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진감이 고개를 돌렸다.
"태수야!"
순간 눈을 크게 뜬 진감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 행님 오셨는데 빨리 안튀오나! 건방진 자슥이 어디 가씨나들 사이에 파묻히가지고..."
"이거 누가 봐도 질투하는 각?"
옆에 있던 시훈이 중얼거림에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언제온거야!?"
미안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숙이던 진감이 태수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며 외쳤다.
"그 전에 자리부터 옮기는게 어때?"
이윽고 태수 앞에 도착한 진감이 손을 내밀어 맞잡으려고 하자 옆에 있던 승현이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여고생들이 주춤주춤 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한 태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저 가씨나들부터 떼어 놓자"
말을 마친 태수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한다.
"멧돼지가 따로 없네"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 시훈이 뒤따라 달려갔고, 진감과 승현도 씨익 웃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진감이 오빠!"
"진감이 오빠! 나도 데려가!"
흥분한 여고생들이 꽥꽥 고함치며 뒤따라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운동선수들인 진감의 일행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약 5분 정도를 쉬지 않고 달렸을까?
넓은 공터에 도착한 태수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제 안오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리는 태수를 보며 시훈이 힐긋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안 오는 것 같음"
순간 고개를 돌린 태수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박진감이! 반갑다!"
태수의 외침에 진감이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는다.
"한국에는 언제 온거야?"
"아래께... 아니 좀 됬다. 그보다 1라운드 지명 축하한다이. KBO 전체 1라운드 신인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태수를 보며 옆에 있던 시훈이 중얼거린다.
"뭐... 만년 꼴찌 팀에 지명받은 거긴 하지만..."
"야! 넌 이 좋은 때 꼭 그렇게 찬물을 끼얹어야 겠냐!? 진감이가 20년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누가 알아?"
"뭐? 대전 이글스가 우승? 풉! 차라리 순종 2년에 마지막으로 우승한 시카고 컵스가 우승한다는 말을 믿고 말지"
"이 답도 없는 분위기 브레이커 새끼..."
또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승현과 시훈을 보며 쓰게 웃은 진감이 태수를 바라본다.
"오히려 내가 영광인데? 예비 메이저리거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진감의 말에 태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고? 니 알고 있었나?"
진감의 말에 승현과 시훈도 고개를 돌린다.
"응. 요즘 인터넷 많이 발달했잖아. 니 소식은 계속 검색해보고 있었지. 코리안 킹....콩으로 유명하던데?"
뒷말은 작게 중얼거리는 진감을 보며 태수가 인상을 팍하고 찡그렸다.
"모시모시, 승현상. 방금 제가 들은게 실화냐는?"
"분명히 코리안 킹! 콩! 이라고 했지"
"푸흡! 푸하하하하하하! 코리안 킹도 아니고 코리안 킹콩! 아메리칸 형님들의 안목에 이 하찮은 인간, 감탄했소이다!"
"닥쳐라 손시훈..."
씹어내뱉듯 중얼거리는 태수의 말에도 한참을 끅끅거리던 시훈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 모습을 죽일듯이 노려보던 태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쥐방울이랑 다투느니 무시하고 말지"
말을 마친 태수가 진감을 바라본다.
"박진감이"
"어?"
"내는 니가 바로 올 줄 알았다"
"...?"
자신의 말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진감을 보며 태수가 말을 잇는다.
"메이저 리그"
"...!"
순간 태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안 왔노?"
잠시 머뭇거리던 진감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물론 나도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빠직
순간 어깨에 둘러 멘 스포츠 가방을 거칠게 바닥에 내려 놓은 태수가 진감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본다.
"박진감이"
"어...어...?"
순식간에 뒤바뀐 태수의 분위기에 당황한 진감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찌이이이이이익
바닥에 내려놓은 스포츠 가방의 지퍼를 내린 태수가 그 안에서 물건들을 꺼내 놓기 시작한다.
태수가 꺼내놓는 물건들을 멍하게 바라보던 진감이 눈을 크게 떴다.
미트, 야구공, 좌투수용 글러브, 그리고...
"스피드건?"
"점마 저거 스피드건은 와 들고 댕기노?"
승현의 중얼거림을 들은 시훈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태수야...?"
"긴말 할 것 없고"
진감의 부름에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 태수가 좌투수용 글러브와 공을 진감의 앞으로 던졌다.
"던져봐라. 있는 힘껏"
"...!"
"니 말대로 진짜 실력이 안되는지 함 보자"
"..."
"판단은 내가 한다. 니가 미국에서 통할 놈인지 안 통할 놈인지"
말을 마친 태수가 미트를 손에 끼더니 그 자리에서 약 20발자국을 걸어 진감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마운드 사이의 거리가 18.44미터니까 얼추 맞을기다. 던지봐라"
"태수야 나는..."
"마 박진감이!"
태수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진감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알고 있던 니는 평소에는 히바리가 없다가도 야구만 하믄 눈에서 불꽃이 번쩍번쩍 튀던 놈이었다. 근데 지금 이게 뭐고?"
"..."
"평생 괴롭히던 놈이 눈 앞에서 무지막지한 공을 던져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공 한 번 치볼기라고 타석에 바짝 붙던 놈이 쫄보새끼가 다됬네, 씨팔!"
"..."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진감을 보며 태수가 말을 잇는다.
"와 말이 없노? 그게 아니모... 예전의 그 왕따 본능이 다시 되살아난기가?"
"야! 정태수! 말이 심하잖아!"
태수의 말에 진감의 옆에 있던 시훈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박진감이, 니는 도전조차 안해보고 포기한 겁쟁이새끼다"
"저 새끼가 진짜!"
덥썩
뛰쳐 나가려는 시훈을 붙잡은 승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새끼 저거 계속 씨부리게 놔둘기가!?"
"잠깐 기다려봐"
승현의 말에 으득 이를 간 시훈이 태수에게 시선을 돌린다.
"진감이"
"응..."
이전과 달리 조용하게 부르는 태수를 보며 진감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가 지명받은 대전 이글스 출신의 유명한 메이저 리거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
"..."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진감을 보며 태수가 묻는다.
"니는 직구보다 변화구에서 홈런이 더 많이 나오는 이유가 뭔지 아나?"
"...아무래도 변화구가 회전이 더 많이 걸리니까..."
진감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태수가 말을 이었다.
"그래, 치기는 어렵지만 일단 치기만 한다면 더 많은 회전이 담긴 변화구가 더 많은 힘을 받고, 더 멀리 날아가기 때문이다"
"..."
"그 선수는 인생에서 남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변화구를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축하한다고, 당신에게 홈런을 칠 수 있는 멋진 기회가 주어졌다고"
"...!"
자신의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진감을 바라보며 태수가 말을 잇는다.
"이제 피하지 마라. 아직 니한테 홈런칠 수 있는 기회, 많이 남아 있다"
말을 마친 태수가 큰 목소리로 시훈을 부른다.
"쥐방울!"
"어...?"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와서 스피드 건 잡아라! 새끼가 행님 말이 너무 멋져서 넋이 나갔나"
빠직
"어휴 저 돼지새끼를 잠시라도 멋지다고 생각한 내가 븅딱이지. 간다! 가!"
빠르게 다가온 시훈이 스피드건을 쥐고 조작하자 태수가 씨익 웃으며 진감을 바라본다.
"한 구, 있는 힘껏 던져라. 마음에 안들면... 계속 던지게 할거다"
태수의 말을 들은 진감도 마주 웃으며 글러브 안에 들어있던 공을 왼손으로 힘주어 잡았다.
"다쳐도 책임안질거야"
"하! 다쳐!? 이 내가 박진감이 따위한테?"
태수의 말을 들은 진감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던진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진감이 외치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나!"
태수의 대답과 동시에 진감의 양 손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는다.
왼 발을 디딤발삼아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오른발을 차올린 진감이 그대로 마운드를 힘껏 박찼다.
"후웁!"
이를 악문 진감이 왼 손에 쥔 공을 그대로 뿌렸고, 진감의 손을 떠난 공이 태수의 미트를 향해 그대로 빨려 들어간다.
뻐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마치 가죽이 터지는 듯한 미트소리와 함께 손바닥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태수가 시훈을 바라본다.
"몇 나왔노?"
태수의 물음에 스피드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훈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거 고장났나? 왜 숫자가 안 떠?"
툭툭 기계를 두드리는 시훈을 바라보던 태수의 몸이 일순간 움찔한다.
'최소 100마일...'
속으로 중얼거린 태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빠른 속도로 진감에게 다가간다.
"박진감이"
코 앞에 도착한 태수의 부름에 진감이 태수의 두 눈을 바라본다.
"응!"
진감의 힘찬 대답에 태수가 그대로 진감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한다.
"웰컴 투 예비 메이저리거다, 이 새끼야!"
KBO 7시즌 통산 방어율 1.87, 선발 최저 방어율로 국내리그 역사를 새롭게 쓴 박진감의 첫 걸음은 이 작은 공터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