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감아! 진감아! 슬슬 일어나야지!"
익숙한 목소리에 진감은 흐리멍텅한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으윽..."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진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쭉 혼자 살고 있는 진감이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벌컥!
그 때 방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박진감! 다친 건 알겠지만 슬슬 일어나야지. 한국인이 밥을 먹어야 회복도 빠른거야. 점심도 한참 지났다?"
"...!"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을 확인한 진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진감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한평생을 노력하고도 만년 2군으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
자신이 야구 유망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주던 사람.
그리고... 진감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
"아...아빠"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진감을 보며 진감의 아버지, 박종범이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죽은 사람이 돌아온 줄 알겠다? 뭘 그렇게 놀래?"
순간 정곡을 찌르는 종범의 말에 진감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러니까 이거... 꿈?"
"얘가 대낮부터 무슨 소리야? 안 일어날거야?"
입을 다문채 자신을 멍하게 바라보는 진감을 보며 종범이 말을 잇는다.
"너 머리부상 심했던 것 아는데 벌써 3달이나 쉬었잖아? 야구 계속할 생각이면 슬슬 규칙적인 생활도 좀 하고! 고등학교 안 갈거야?"
멍한 표정으로 종범을 바라보던 진감이 말 속의 두 단어를 듣고 멈칫한다.
"머리부상? 고등학교?"
진감의 기억 속에 머리부상을 당했던 것 경험은 딱 1번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라니...
진감이 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진감이 오른손을 뻗어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움켜 잡았다.
초창기 한참 스마트 폰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진감은 가정형편 상 언감생심(焉敢生心)으로 관심조차 갖지 않고 5년 째 오래된 폴더 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휴대폰 폴더를 들어올린 진감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꿈, 꿈이 분명하다.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날짜는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2007/9/23>
중학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이 끝나고 다시 3개월이 지난 뒤.
머리부상으로 한참 치료에 전념하던 가을, 전국에 있는 고등야구부 관계자들이 뺀질나게 자신을 찾아오던 때였다.
"얘가 진짜 왜 이럴꼬? 피곤하면 밥이라도 더 먹고 자!"
"아빠"
"...응?"
와락!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진감이 종범을 세차게 끌어 안았다.
"야... 야...!"
"꿈이라도 좋아"
"...?"
"사랑해요, 아빠"
낯 부끄러워 평생을 내뱉지 못했던 네 글자.
이 말을 하지 못해 평생을 후회했던 그 말을 내뱉으며 진감이 더욱 힘주어 종범을 끌어 안았다.
진감의 말에 피식 웃은 종범이 진감의 등을 토닥였다.
"머씨마 놈이 그러니까 좀 부끄럽다 야. 이럴 땐 참 딸 하나 안 낳은게 후회되네"
어색하게 말하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종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진감을 떼어 낸 종범이 방을 나서며 말한다.
"점심 차려 놨으니까 먹고 나가. 오늘 정준호 감독님이랑 약속있지? 아빠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니까 가서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말고"
진감이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말을 마친 종범이 방 밖으로 나갔다.
"정준호 감독이라고...?"
혼자 남은 진감이 으득 이를 갈았다.
****************
방 안에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내 든 진감이 현재 상황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 아빠, 마지막 기억, 과거로 돌아온 이유.
생각나는대로 끄적이던 진감이 현재 상황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2007년... 그러니까 중학야구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한참 부상회복에 집중하고 있을 때..."
혼자 중얼거린 진감이 폴더 폰을 열어 액정을 확인한다.
< 9월 23일 14시, 용무고등학교 정준호 감독님과 약속 >
오늘의 일정을 확인한 진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무렵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 둔 자신에게 전국에 있는 고등야구부 관계자들이 찾아오던 때였다.
당시 진감은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용무고등학교를 선택했었다.
고향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친숙했고 야구로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
무엇보다 메이저리거 출신인 정준호 감독의 라이징 패스트볼을 평소 흠모하던 진감에게 용무고등학교라는 선택은 최선이자 최고였다.
이런 진감의 결정이 나중에 고질적인 어깨 부상의 시발점이 되었다.
최근 5년동안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한 정준호 감독에게 우승을 위한 히든카드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중등부 최고의 투수 유망주로 평가받는 진감을 자신의 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문제는 진감이 용무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였다.
정준호 감독은 진감이 확실한 에이스로 성장하기를 원했고, 팀 전체를 위한 개인의 노력과 희생이 중요하다는 이유 아래 보다 확실한 결정구를 배우기를 원했다.
그렇게 진감이 정준호에게 배우기 시작한 구종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야구공을 끼듯이 잡아 던지는 구종, 포크 볼(fork ball)이었다.
다 컸다고 생각한 진감의 키는 고등학생 무렵 약 10cm는 더 커 190cm에 육박했다.
한참 성장기인 진감에게 포크 볼은 팔꿈치에 많은 무리를 줬고,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지자 다른 결정구를 익히기 위해 여러가지 변화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어깨 통증은 1년만에 찾아왔고, 진감은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스위치 투수로 공을 던지고자 하였지만 정준호는 단칼에 거절했다.
성장기, 직구에 비해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변화구를 남발한 진감에게 어깨 부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오늘이 용무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게 되는 날.
반드시 거절해야겠다고 다짐한 진감이 '아빠'라고 적은 부분에서 멈칫한다.
"아버지..."
진감의 기억 속에 종범은 19살이 되는 해 여름, 돌아가신다.
사인(死因)은 추락사.
혹시나 대학 야구부에 진학할지 모를 자신을 위해 뜨거운 여름, 이른 아침부터 인력 사무소에 나가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는 건물 5층에서 추락하였다.
그 기억을 떠올린 진감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며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꼭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현관문을 나서며 진감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런데 왜 과거로 돌아오게 된 거지?'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던 진감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 때 분명히 태수랑 밥을 먹고..."
더블A로 강등 통보를 받은 날, 태수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그 즉시 식당을 나와 이른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차하는 버스를 확인한 진감이 그대로 올라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교통사고?"
이제는 확실히 기억났다.
술에 취해 뒷걸음질 치다가 달려오는 트럭에 그대로 치여 나가 떨어졌다.
그 정도 충격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죽기는 커녕 오히려 과거로 돌아왔다.
"...왜지?"
중얼거리던 진감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목적지가 세 정거장 건너 커피숍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빨리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진감이 약 50미터 앞에 보이는 커피숍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딸랑
커피숍 출입문을 열자 문에 달려있던 종이 소리를 내며 진감의 귀에 박혀든다.
"여기!"
그 순간 번쩍 손을 들며 큰 소리로 외치는 남자를 발견한 진감이 그 쪽을 향해 걸어간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 우락부락한 체격, 호탕해보이는 인상.
조금 더 젊어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진감의 기억 속에 있는 정준호 감독이 맞다.
"조금 빨리 왔네?"
정준호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예, 조금"
진감이 정준호의 손을 맞잡았다.
"아, 일단 앉지"
자신의 말에 자리에 앉는 진감을 보며 정준호가 말을 잇는다.
"그래, 생각은 해봤나?"
"..."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용무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야구강호야. 최근에는 확실한 에이스가 없어서 우승은 못했지만... 니가 우리 학교에 온다면 우승도 가능하지"
"..."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진감을 보며 준호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메이저리거 출신, 원한다면 내 노하우도 충분히 알려줄 수 있어. 니가 야구를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감독님"
순간 자신을 부르는 진감의 목소리에 준호가 눈을 빛낸다.
"응? 그래, 말해봐"
잠시 머뭇거리던 진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