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연, 그 이상의 인연 <1>
2010년 1월 10일, 송정수는 근무지를 서울로 신청하고, 그해 4월 1일에 서울 강동경찰서로 발령받았다.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도망을 치다시피 올라 온 정수는 강동경찰서와 가까운 성내동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광주광역시 서구경찰서에서 근무를 하다가 돌연 먼 타지로 전근을 신청한 것이었다. 그것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이던 두 딸을 버리지 않으려고 스스로 고생의 길을 자처한 꼴이었다.
정수의 아내는 보험설계사였다. 남편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던 아내는 보험회사에 나간 지 3년이 지나고부터 살림은 뒷전이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보험계약을 핑계로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가 하면 심지어 회사에서 직원들과 여행을 간다면서 외박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1박2일로 경찰간부교육이 있어서 지방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출장을 갔다가 다음날 온다고 나갔는데 갑자기 출장이 취소가 되어버렸다.
그 바람에 퇴근 후 저녁에 집으로 들어갔으나 아내는 아침부터 나가버리고 어린 두 딸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정수는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어디냐고 묻자 아내는 집이라고 시치미를 뚝 땠다. 집에서 전화를 하던 정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아내는 그날도 외박을 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공공연하게 바람을 피웠다. 정수는 그런 아내를 계속 마주한다면 총으로 머리를 쏘아 버릴 것 같아서 스스로 전근을 희망한 것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두 딸이라도 지켜질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생활이 즐거울 수 없었다. 밤이면 찾아오는 적막감과 외로움, 아내에 대한 분노가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럴수록 술을 마시는 시간이 많아졌고,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서 술집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도 알게 되었고, 온라인 카페에서 우는 여자를 알게 된 것이었다. 온라인 카페 ‘시크릿’의 카페지기가 바로 그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이 ‘나 오미 나리’였다. 물론 본명은 아니었다. 통상 카페에서는 닉네임을 사용했고 정수 역시 ‘달무리’로 불렸다. ‘나 오미 나리’는 ‘나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리를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2월 3일이었다. 시크릿에서 단체로 1박2일 야유회를 간다고 해서 여행지 사전답사팀에 정수가 합류한 것이 만남의 발단이었다. 사전답사팀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양평의 펜션을 둘러보고는 그녀는 바로 계약을 했다. 그 날이 그녀를 처음 보는 날이었다. 정수는 나리를 만난다는 것이 너무도 설레었다. 그것은 밤마다 공허와 적막감과 사투를 벌이는 남자에게는 새로운 탈출구였다.
정수는 나리를 만나기 일주일 전부터 그녀와 SNS로 대화를 했다. 온라인 카페의 앨범에서 얼굴을 보았지만 도저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만나기도 전부터 사랑을 느낀 정수였다. 큰 키의 그녀는 아무나 범접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만을 바라보는 카페의 회원들이 2,000명이 넘었고, 그녀와 술 한 잔을 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가끔 공식적인 모임을 통해서 만나더라도 냉랭한 만남뿐이었다. 그녀는 남자들의 접근을 애초부터 차단했다. 그런 도도한 여자를 만나게 된 정수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껴졌다.
그것은 고독한 남자가 느끼는 위험한 감정이었다. 고독 때문에 감정 제어가 될 수 없었다. 두 딸 때문에 아내와 이혼을 할 수도 없어서 스스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밤마다 외로움의 연속이었던 그에게 나리의 만남이 해방구처럼 느껴졌다. 혼자 하숙집에 누워있으면 아내의 불륜 현장이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때 나리는 혼자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하여 편의점을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녀는 평범하게 편의점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유수의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녀는 정수에게 꿈같은 여자였다.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남자와 경영학 석사학위를 가진 여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첫 만남 이후로 서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리는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있었지만 이혼을 한 후 혼자 살았다. 나리는 이별을 하는 사랑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잘 믿는 편이었다. 사랑은 믿지 않지만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사람은 잘 믿었다. 모순이었지만 나리는 그런 여자였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잘 믿었다. 믿었다가 배신을 당해도 새로운 사람 사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혼은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만든 계기였다. 둘 중 누구의 잘못이든 이혼이라는 결과는 사랑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믿던 여자였다. 그러나 밤마다 엄습하던 고독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에도 그녀 역시 밤마다 고독과 몸서리치게 싸우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유유상종이었다. 함부로 마음을 열지 않던 나리는 정수에게는 한 없이 무너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펜션을 계약한 후 정수는 일행들을 대접한다며 펜션 인근의 횟집으로 데리고 갔다. 명목상의 카페 식구였지만 정수에게는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횟집에서 술을 마신 일행들은 의정부로 넘어갔다. 의정부에 새로 개업한 술집이 있다고 하여 옮겼으나 정수는 사실 가기가 싫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경험이 있고, 주인과 한 번 잠자리를 한 후라서 다시 가기가 꺼려졌지만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일행들과 동행했다. 정수의 서울생활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여자와의 섹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행들이 가게에서 술을 마실 때 주인이 들어왔지만 주인은 정수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나리의 옆에 정수가 앉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술집주인은 이미 나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다. 나리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여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두 여자가 뒤늦게 동석을 했다. 두 여자는 그 자리에서 나리를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온라인에서는 서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금방 오래된 자매처럼 친해졌다. 그러나 술값을 낸 여자가 주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먼저 일어나버렸다. 그녀의 집은 의정부였다.
한 여자만 빠지고 일행들은 술집을 나와 부근 호프집으로 옮겨 술을 마시다가 다시 4차로 천호동으로 옮겼다. 일행들을 다 태우고 운전을 한 정수였다. 관할지역으로 넘어 온다는 것에 안심하고 취중에 운전을 한 것이었지만 평소의 정수라면 생각지도 못할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 천호동 술집도 정수가 아는 술집이었다. ‘뜨락’이라는 술집도 이미 3개월 전에 몇 번 다녀간 뒤였다. 뜨락의 주인은 나리와 같이 들어오는 일행들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더구나 그녀의 옆에 정수가 앉았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했다. 나리는 뜨락의 주인과도 이미 아는 사이였다. 가게가 문 닫을 때까지 위스키를 마시고는 다들 술에 취해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 많은 술값을 그녀가 계산했다. 일행들이 모두 돌아가고 두 사람만 가게 앞에 남았다. 뜨락과 정수의 하숙집은 불과 2킬로미터 이내였지만 정수는 딴청을 피웠다.
“나리님! 여기 모텔 어디에 있어요? 나 술 취했는데 모텔 앞에만 데려다 줘요.”
무슨 이유였을까? 그녀는 조용히 잠만 자야한다는 조건을 걸고 자신이 사는 집으로 정수를 데려갔다. 도도한 그녀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정수에게 관대했다. 그녀는 굽은다리역에 살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곳과 정수가 사는 성내동은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정수는 뜨락에 차를 세워두고는 그녀를 따라서 택시에 올랐다. 밤길이지만 정수가 근무하는 관할구역이기에 가는 길이 눈에 익었다. 그녀는 주택가에 택시를 세웠다.
“쉿, 발소리 죽여요. 다들 혼자 사는 줄 아는데...”
나리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올라서면서 낮은 목소리로 정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살고 있어요. 흉보면 안돼요?”
그녀는 주택 2층에 살고 있었다. 방 두개에 작은 거실과 욕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집으로 들어간 정수는 세수와 발만 씻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와 한 약속 때문인지, 아니면 술에 취한 때문인지, 두 사람의 첫날밤은 손만 잡고 그냥 자버렸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임에도 아침 일찍 나리의 집에서 나간 정수는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리님! 뭐해요? 점심은 먹었어요?”
“아직 안했어요.”
“그럼 나오세요. 맛있는 것 사줄게요.”
“지금 의정부 애림언니가 오셨는데 어쩌죠?”
어제 펜션을 알아본다며 양평에서 만난 나애림은 집이 의정부였다. 2차로 의정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는 계산을 하고 먼저 나간 여자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애림은 나리의 집으로 찾아왔다. 주말만 되면 두 사람은 늘 붙어있을 만큼 자매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녀는 누구든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외로워서 찾아와도, 힘겨워서 찾아와도, 찾아오는 사람을 막는 경우는 없었다. 나리보다 세 살이 많은 나애림을 친언니 이상으로 대하 듯했다. 성까지 나 씨 성을 가졌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돈독했다.
“그럼 같이 나오세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강동구청 맞은편 골목에 보면 청해횟집이라고 있어요. 지금 그곳으로 오세요.”
“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아니 세 사람은 다시 만났다. 두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세 사람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 끝이 났다. 술이 모두 취할 때쯤 나애림은 대리기사를 불러서 의정부로 돌아갔고, 나리는 일요일이라 해도 수금과 상품발주를 위하여 늦은 시간이라도 편의점으로 꼭 가야했다. 나리는 자신이 해야 할 일 때문에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있었다. 그날도 정수는 술에 취했다. 정수의 차를 운전한 나리는 아홉시가 다 되어서 편의점에 도착했고, 수금과 발주가 끝날 때까지 정수는 차 안에서 졸고 있었다. 그날 밤도 나리는 자신의 집으로 정수를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