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뛰어온 백금발의 남자가 제 팔로 그림자를 튕겨내듯 밀어 버렸다. 그걸 본 새오가 멈칫한 사이 백금발의 남자가 소녀, 얀에게 다가갔다.
“얀, 괜찮나요?”
백금발의 남자가 그림자를 쳐내고 쓰러진 소녀, 얀을 안아 들었다. 소녀,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가빠르게 내쉬었다. 백금발의 남자는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소녀, 얀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까 시엔님과 같이 있던 화가분이시군요.”
“…….”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 아이, 얀은 제가 후원하는 아이입니다. 함부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아이? 몇 천 년 묵은 사슴이?”
새오가 웃기지 말라는 듯 비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그림자들이 바닥에 푸슉, 하고 꺼지더니 원래의 형태들로 돌아갔다. 새오가 그림자를 조종하는 것에 실패하자 백금발에 남자는 쿡쿡 하고 작게 웃었다.
“그림자도 없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보단 이 아이가 정상이겠지?”
“그래도 승천 못한 이무기 보단 낫겠지.”
백금발의 남자의 눈에 빨간 빛이 맴돌더니 검은 선이 생겼다. 완벽한 뱀의 눈으로 변한 남자는 발을 쾅, 하고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다시 움직이려던 새오의 그림자들이 묶인 듯 가만이 멈추게 됐다.
“그래. 어쩌면 그렇겠지. 그런데 난 항상 궁금했단 말이지.”
“…….”
“어느 날 갑자기 봉인이 풀렸어. 봉인을 푼 놈은 다시 봉인하거나 우리를 제어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런데 갑자기 놈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못난 너를 시켰지.”
백금발의 남자가 빨간 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새오에게 걸어왔다. 새오는 다시 그림자들을 움직을 생각에 손가락을 까닥였지만 그림자들은 별 반응 없이 가만히 멈춰있었다. 새오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뱀은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놈은 그림자를 움직이는 기교 빼고 별 볼일 없는 계집애가 정말 우리를 봉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
“아니면 숨겨진 힘이 있는데, 놈은 그걸 아는 건가?”
턱!
백금발의 남자가 새오의 목을 한손으로 잡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못 움직이니 육탄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새오는 제 두 손으로 백금발 남자의 팔과 팔목을 잡고 세게 눌렀다. 하지만 거대한 힘이었다.
“커헉…….”
억센 힘에 자꾸 눈이 감겼다. 새오는 상체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곤 제 다리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급소 한 방을 쳐내면 목조름에서 풀어날 수 있기에. 하지만 뱀은 속내를 알았나본지 더 강하게 목을 졸랐다.
“너 정체가 뭐지?”
“정체? 내 신랑.”
낯익은 목소리에 눈을 뜨자 백금발 남자의 뒤쪽에서 시엔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반갑다는 듯.
퍼억!
시엔은 흔들던 손으로 순식간에 새오를 조르는 팔을 부러트리고 멀리 밀쳐냈다. 백금발의 남자는 순식간에 벽에 박혔고 안겨 있던 소녀, 얀은 바닥에 거침없이 굴렀다.
“어서 도망가야해요!”
바닥에 구른 것 빼고 큰 타격이 없었던 얀이 빠르게 일어나 백금발의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여태껏 평온한 표정을 지었던 것과 달리 백금발의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치아를 드러냈다. 증오가 서려있는 눈빛까지.
“저 자를 아직 이길 수 없어요! 도망가야해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얀은 어물쩡거리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벽에 기대 쉼호흡을 하던 새오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뱉어 냈다.
“탄위를 잡아!”
우웅!
“커헉!”
그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숨 쉬는 것이 겨우일 만큼 온 몸에 사슬이 묶은 것처럼 헉헉거렸다. 백금발의 남자, 탄위와 얀이 부들거리며 신음을 뱉어냈다. 오직 시엔만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백금발의 남자, 탄위와 얀의 주변에 그림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얀은 가까스로 제 입술을 깨물었다.
콰득!
입에서 피가 흐르자 얀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새오가 주저앉은 바닥 쪽엔 나무덩굴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덩굴에 달려있는 꽃들이 이상한 향을 피워냈다. 새오는 입과 코를 막으며 컥컥거리자마자 시엔이 새오에게 급히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얀과 백금발의 남자, 탄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 숨 쉬어 보자. 자기?”
“커헉!”
“단순한 호흡 마비에요. 좀 있으면 돌아 올 거니 걱정 말아요.”
백금발의 남자, 탄위를 넝쿨로 공중에 든 얀은 희미해져갔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될 거예요. 새오.”
말 한마디를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그걸 보고 있던 새오는 놓칠 수 없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시엔은 거의 껴안듯 새오의 몸을 잡아두고 있었다.
“놔! 아직 쫓아갈 수 커헉…….”
새오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머리를 시엔의 가슴에 폭 안기듯 박았다. 시엔은 아예 바닥에 앉아 제 다리 위에 새오를 앉혔다. 자신을 보게 한 다음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가슴을 토닥였다.
“숨을 크게 내쉬고 가라 앉혀보자.”
“허억……. 헉!”
“이런. 그 년의 장난이 심했나보군.”
평소 새오에게 뱉던, 탄위에게 위엄 있게 내뱉은 음성도 아니었다. 차가운 분노가 억눌려진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를 듣자 역효과였는지 더 거칠게 숨을 뱉던 새오를 보던 시엔은 입으로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후웁…….”
그대로 새오에게 입을 맞춰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새오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입 옆과 코를 꽉 누르고 있었다. 숨을 받는 새오는 어미에게 먹이를 받는 새처럼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푸하…….”
새오가 미약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시엔이 슬쩍 입을 땠다. 침을 삼킬 수 없어 살짝 흘린 채로 복장이 다 흐트러져있었다. 거친 숨을 뱉으며 빨개진 목덜미와 귀. 들썩거리는 작은 가슴과 가는 배. 시엔이 입맛을 다시며 새오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쓸어내렸다.
“웃…….”
“쉬이……. 괜찮아.”
시엔은 새오의 휜 허리와 동글동글한 엉덩이를 쓸어 내려오다가 이번엔 경직된 허벅지를 제 큰 손으로 주물러 풀어주었다. 허벅지 바깥쪽과 근육쪽을 시원하게 주무르다가 무언가 자극하듯 꾹꾹 안쪽 살을 눌러댔다. 다른 손으로는 팔 안쪽과 가슴 바로 밑을 살살 쓰다듬어 댔다. 기묘한 감각에 새오는 하지 말라는 듯 다리를 움직였지만 미약한 반항일 뿐이었다. 시엔은 눈을 접어 웃으며 다시 허리를 끌어안았다. 새오의 붉어진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추며 천천히 속삭였다.
“뜨거워.”
“그만…….”
“왜 이리 뜨거워졌어? 인공호흡 해주기 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쪽.
시엔이 생리적으로 눈물이 맺힌 새오의 한쪽 눈에 입을 맞췄다. 새오는 제 얼굴이 붉어진 것도 모르고 시엔을 밀쳐냈다. 시엔이 밀려나는 척 하다가 새오의 정장 재킷을 잡았다. 새오를 끌어당기기 위함이었으나, 정장 재킷 안 와이셔츠에 번진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자기…….”
“안 꺼져?”
“이게 뭐야?”
시엔이 새오의 몸통을 잡고 제 눈앞까지 끌어당겼다. 억센 힘에 새오는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번엔 당해주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시엔의 표정에 새오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머금었다.
“이 립스틱 자국 뭐냐고.”
“뭐?”
새오가 고개를 숙여 제 가슴팍을 바라봤다. 아까 꼬맹이, 사슴이 제게 안기면서 생긴 자국인 모양이었다.
“아까 그 애가 안겨서 생-.”
“안겼다고?”
말에 힘을 주어 말하던 시엔이 삐친 표정을 머금으며 새오를 올려다봤다.
“정말 바람났었구나?”
“안 닥-.”
“하하, 이러다 딴 살림도 차리겠어. 자기. 응?”
새오는 다시 골이 아파지는 느낌에 머리를 짚으며 시엔을 뿌리쳤다. 그 상태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자 그 앞을 일어선 시엔이 막았다. 시엔은 급히 새오의 어깨에 코를 묻더니 킁킁거렸다.
“재스민 향? 이제 향수까지 묻혀와?”
제발 좀……. 짜증이나 지랄하고 싶었지만, 제 심리 상태와 다르게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새오는 이 언밸런스를 실시간으로 느끼는 것이 정말 싫었다. 게다가 입술을 빼죽 내밀며 삐친 걸 티내는 사내놈, 시엔은 더더욱 익숙하지 않았다. 새오는 몇 주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저 지랄를 멈추려면 한 번 쯤은 제 원하는 대로 해줘야한다는 것을.
“뭐 어쩌라고.”
“키스해줘.”
휙!
새오는 대답대신 시엔의 넥타이를 당겨 입을 맞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입술을 박은거지만. 무드도 없고 박력만 넘친 키스의 시작이었다. 자기가 해달라고 해놓고 눈이 동그래진 시엔은 뜬 눈으로 새오를 내려다봤다. 반면 눈을 감고 입술만 박은 새오는 시엔을 밀쳐냈다.
“이제 됐-.”
“하하……. 어떤 쓰레기들은 제 부인 순결을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뭐?”
시엔은 대답 대신 새오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그 상태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살짝 입술을 깨물어 입을 벌리게 만든 뒤 혀를 은밀하고 재빠르게 넣는 것부터 반항하는 새오의 허리를 애로틱하게 끌어당기는 것 까지. 온 몸을 탐하겠다는 마음 속 깊은 욕망처럼 새오의 혀를 아낌없이 농락했다.
“읍…….”
새오는 난생처음 해보는 키스에 녹아들고 있었다. 부드럽게 섞여가는 호흡과 리듬. 얽힌 혀처럼 묶여지는 듯한 몸. 점점 힘이 빠지면서 몸도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쯤.
“푸하!”
숨을 쉬기 위해 새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새오는 제 윗입술을 닦아주는 시엔을 째려봤다. 하지만 시엔은 새침하게 쏘아 붙였다.
“뭘 봐. 쓰레기 처음 봐?”
“뭐?”
평소에 잘만 지껄이던 시엔은 흥흥 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자세히 보니 귀가 새빨개져있었다. 미친 놈, 다른 여자들과 섹스는 기본으로 해본 놈이……. 처음 한 키스의 여파보다 시엔의 반응이 더 신경 쓰였던 새오는 제 입술을 쓸었다. 이런 느낌이었군. 생각 보다 나쁘진…… 않았다. 멍하게 서있던 새오는 어느새 멀어진 첫 키스 상대를 쫓아가기 위해 걸었다.
와직.
발에 무언가가 밟히자 고개를 숙였다.
[퀸 메리 병원 정신과 상담의 메이 얀]
아까 얀이 남기고 간 명함이었다. 익숙한 이름 이었다. 게다가 이 병원은 지하였지만, 멧돼지가 사용했던 곳이기도 했다. 새오가 명함을 줍자 허공에 희미한 잔상이 그려졌다. 얀의 형체였다.
‘언제든 당신을 기다릴게요.’
신기루 같은 환영은 금새 사라져버렸다. 새오는 명함을 한참 쳐다보다가 주머니에 넣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