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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저물 때
작가 : 새하
작품등록일 : 201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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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태와 색욕의 그림자 (5)
작성일 : 17-07-27     조회 : 309     추천 : 0     분량 : 4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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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잡것! 또 내 남편을 꼬셨어!’

 ‘아서라. 그러니까 이름도 없이 저리 혼자 살지.’

 

 동네 아낙내들이 수근거리며 아사녀를 흘겨봤다. 아사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괄시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로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은 어느새 없어지고 기생집에서 일 했을 때의 예명, 아사녀만 남아있었다. 아비와 단 둘이 살았을 땐 아비는 자신을 이년, 저년이라 불렀지 이름으로 불려 지지 않았다. 이웃 주민들은.

 

 ‘저년 어디서 나왔데?’

 

 하면

 

 ‘그 왜, 술 퍼마시는 건널목 홀 애비 자식 년이잖아.’

 

 하고 자신을 소개하느라 바빴다. 아사녀는 아까 지었던 독기 어린 표정 대신 비참함만 품은 채 언덕을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자 밤안개가 끼었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희미하게 작은 신전이 보였다. 아사녀는 겁도 없이 급히 뛰어가 문을 열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아사녀는 해맑게 웃으며 신전에 앉아있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창문 바람에 흐트러지는 제 검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자 남자의 수려한 이목구비와 미모가 드러났다. 긴 속눈썹에 살짝 가려진 황금색 눈동자엔 미소를 머금은 아사녀가 비쳤다. 아사녀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손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이게 뭐야?’

 ‘생일선물을 달라 하지 않았나.’

 ‘아, 그거…….’

 

 씁쓸하게 웃으며 방석 위에 앉은 아사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장난으로 한 거야.’

 ‘왜.’

 ‘……난 생일 같은 거 언제인지 모르니까.’

 ‘오늘로 하지.’

 ‘뭐?’

 ‘…….’

 ‘진심이야?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옷에다 이런 낡아빠진 곳에서 생일을 보내라는 거야?’

 ‘신전 주인으로써 민망한 말이군.’

 

 말과는 달리 남자는 피식 웃으며 아사녀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아사녀는 종이를 겉으로 살펴보며 입을 빼죽 내밀었다.

 

 ‘이게 뭔데?’

 ‘…….’

 ‘또 말 안 하지.’

 

 아사녀가 종이를 집어 펼치자 크게 적힌 두 글자가 보였다. 글을 완벽하게 알지 못했던 아사녀는 어설프게 읽으며 발음해냈다. 그걸 보던 남자는 나지막히 말을 뱉었다.

 

 ‘네 이름이다.’

 ‘……내 이름…….’

 ‘한 번 소리 내어 크게 읽어봐라.’

 

 

 “새오.”

 “…….”

 “악몽 꿨어?”

 

 낯익은 목소리에 새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와이셔츠 단추를 몇 개 푸른 채 제 옆에 누워있는 시엔이 보였다. 여전히 여유넘치는 표정이었지만, 희미하게 피로가 겹쳐 있었다. 평소 제게 달라붙을 때 입던 슬립이 아니라 와이셔츠 차림인 걸 보면 일을 하고 바로 온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 꿈?”

 “…….”

 “요즘 꿈 많이 꾸는 것 같아서 손 잡아주고 있었어.”

 

 시엔은 꼭 잡은 새오의 손을 자랑하듯 살살 흔들었다. 칭찬을 바라는 듯 실실 웃으며 새오와 눈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오는 대답 대신 지금 대략 몇 시인지 알기 위해 창문가를 흘깃거렸다.

 

 “지금은 오후 5시야.”

 “…….”

 “나는 저녁 식사 핑계로 빠져나왔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중얼거리듯 물어보던 시엔은 몸을 일으켰다. 평소대로 새오의 저녁을 챙기기 위해 가사도우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 뒷모습에 새오는 허공을 쳐다봤다. 기억을 보는 것처럼 짙어지는 꿈들. 그 속에 나오는 봉인 할 동물들과 신화의 이야기. 그리고 아사녀와 새오. 새오는 고개를 돌려 시엔을 바라봤다.

 

 “너를 만난 후론.”

 “…….”

 “기묘한 꿈을 꿔.”

 

 처음 솔직하게 말하는 그러나 별 일 아니라는 듯 무표정의 새오였다. 시엔은 그런 새오를 유심히 살펴보며 청초한 입을 열었다.

 

 “그래? 누가 나오는데? 꿈에.”

 “봉인할 동물들. 여자와 남자.”

 “그래? 무슨 내용인데?”

 “이름 꿈이었어.”

 

 새오는 평소처럼 시엔의 시선을 귀찮다는 듯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눈과 눈을 맞췄다.

 

 “너 그때 왜 나에게 이름을 주었지?”

 “그야 네가 이름이 없었으니까.”

 “…….”

 “그래서 내가 아끼는 이름을 준 것 뿐이야.”

 

 시엔은 아주 간단하다는 듯 간결하게 말했다. 새오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시엔이 건네는 컵을 받아 차를 들이켰다. 이 향은……. 차를 한참 머금고 있던 새오는 얼른 컵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이 차 좋아?”

 “…….”

 “어떻게 내가 향수 바꾼 건 모르고 이 재스민 차 향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어?”

 

 감동도 잠시 또 시엔이 얄미운 투정이 시작되자 새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초야를 이룬 풋풋한 신랑처럼 요부 같은 신부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년이 그렇게 좋다는 거야? 그년이 그렇게 잘해?”

 

 제발 닥치라는 말을 삼킨 채 새오는 급히 룸 밖에 있는 다른 욕실을 사용하기 위해 문 손잡이를 잡았다. 룸 안에 있는 욕실을 사용하면 시엔이 열쇠가 마침 주머니에 있었다고 껄덕 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벌컥!

 

 “어머, 일어났어요?”

 “너 왜 여기에…….”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바구니를 들고 서있는 랑이었다. 그것도 가사도우미 복장을 입고 있었다. 랑은 히죽 웃으며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린 배지를 보여주었다.

 

 “나 여기 취직됐어요.”

 “…….”

 “36개월 할부금 갚아야 하니까요.”

 

 찔리는 발언에 새오는 급히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랑은 어머, 하며 급히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야 해요!”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랑이 내민 바구니엔 바디 워시와 샤워코롱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새오가 얼떨결에 바구니를 받자 랑이 고개를 내밀어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좋아졌네요? 확실히 여기 생활이 좋긴 좋나봐요?”

 “…….”

 “나는 피곤해 죽겠던데. 에휴. 어쩌다 남자들과 눈이 마주쳐서 다 나한테 반하는 바람에……. 어머, 어디가요?”

 

 랑이 제 뺨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뱉을 때 새오는 다시 욕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 말을 안들어주고 사라져버리는 뒷모습을 보던 랑은 허리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젠 말도 조금씩 하네?”

 

 예전에는 남이 말하든 말든 들어주지도 않고 대답도 감탄도 없었는데. 얼마만에 다시 만나니 확 변해있었다. 꿍얼거리며 생각하던 랑은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복도 끝에 샤워실로 가요!”

 

 랑의 안내를 들은 새오는 대답 대신 복도 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구니에 흔들리는 내용물을 살펴봤는데, 포장을 뜯지 않은 바디 워시와 샴푸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상할 게 없었다. 전부 아네모네와 재스민 향 두 종류만 아니었어도. 이 새끼 진짜……. 새오는 끓어오는 빡침을 참다가 복도의 큰 쓰레기통에 바디워시와 샴푸 몇 개를 버렸다.

 

 

 끼익-.

 

 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제 룸으로 들어온 새오는 큰 식탁에 음식이 차려진 것이 보였다. 콘지와 스프 종류의 에피타이저와 해산물 종류의 디쉬까지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 의자엔 시엔은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고프지?”

 

 새오는 대답대신 시엔 뒤에 서있는 천숑을 쳐다봤다. 천숑은 눈을 감고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저 뜻은 저녁 식사 후 시엔이 다시 일을 하러 가야한다는 신호였다. 이제는 척하면 척이었다. 하지만 시엔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식사 후에 나 일 안 할 건데?”

 “그럼 결산서는 전부 어쩌시려구요?”

 “하하, 그건 네 눈물로 도장이라도 찍던가.”

 

 천숑이 글썽거리며 고개를 젓자 시엔이 비수를 날렸다. 그 틈을 탄 새오는 기회다 싶어 창문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때 창문 옆 하얀 벽에 빔 프로젝트가 쏘아졌다. 하얀 벽엔 웃고 있는 소녀와 긴 머리의 여대생이 좁은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새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훑어보았다.

 

 “저게 누굴 것 같아?”

 

 사슴이나 다른 동물과 관련된 자들인가 싶어서 새오는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암만 봐도 크게 특별난 것이 없었다. 시엔은 피식 웃으며 와인잔을 흔들었다.

 

 “지 쉐프의 아이들이야.”

 “…….”

 “올해 첫째는 대학생이고 막둥이는 유치원에 들어가지.”

 “…….”

 “불쌍한 지 셰프. 결국 아이들 등록금도 못 내고 실직 되는 구나.”

 

 식탁 근처에 고개를 숙이고 대기하던 가사도우미들은 훌쩍 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짠 것처럼 눈물을 닦는 각도 까지 완벽했다. 새오는 결국 한숨을 뱉으며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래도 무난한 식단이었다. 예전에는 불도장이나 보양식 용 사천요리가 많아서 입에 영 맞지 않았으니까.

 

 “오구, 잘 먹네.”

 “……작작 해.”

 

 당장 식탁을 엎고 있었으나 아직도 빔 프로젝트가 꺼지지 않았었다. 도미 살이 들어간 콘지 대신 새우가 들어간 완탕을 먹자 다 먹은 밑 그릇을 치우기 위해 가사도우미들이 접근 했다.

 

 “어머, 비싼 건 안 드시고?”

 

 익숙한 목소리에 새오가 고개를 드니 그릇을 나르는 랑이 보였다. 랑은 태연하게 시엔이 와인을 마시는 틈을 타 도미찜과 콘지를 가리켰다.

 

 “이럴 때 아니면 저런 건 우리 같은 사람은 먹기 힘들다구요.”

 “…….”

 “뭐해요. 입에 쑤셔넣어요.”

 

 랑은 답답하다는 듯 시엔 근처의 가사도우미들처럼 도미 요리를 밑 그릇에 잔뜩 덜어 새오의 바로 앞에 갔다 두었다. 새오는 억지로 포크질을 하며 옥돔 살점을 씹었다. 물론 씹을 것도 없이 입에서 사라졌지만. 새오는 이렇게 된 거 천천히 음식을 먹어 시간을 끈 다음 시엔이 일을 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여겼다. 유일한 동맹군인 천숑을 쳐다보았는데, 천숑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자신의 쪽을 쳐다보다가 눈을 가렸다.

 

 “앗, 아앗…….”

 

 정확히는 자신의 뒤를 보고 있었다. 새오가 고개를 돌리자 그릇을 나르며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는 랑이 보였다. 천숑은 다시 신음소리를 뱉으며 후다닥 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시엔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머금었다.

 

 “사랑이란 건 참 무서워.”

 “…….”

 “눈이 마주쳤다고 한 눈에 반할 수도 있으니까.”

 

 사실이었어? 새오가 그릇을 가지고 룸 밖으로 나가는 랑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식사와 생활이 계속 될 것 같다는 느낌……. 새오는 새우 살을 씹으며 어떻게 밖으로 나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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