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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저물 때
작가 : 새하
작품등록일 : 201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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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과거의 그림자 (1)
작성일 : 17-07-27     조회 : 259     추천 : 0     분량 : 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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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선생님! 환자는 이제 없으니 퇴근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먼저 들어가 봐요. 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어머, 처리 할 일이요? 중요한 건 가봐요? 그럼 전 번저 가볼게요!”

 

 간호사는 신나는 표정으로 진료실 문을 닫았다. 의사 가운을 입은 얀은 싱긋 웃으며 차트를 책상위로 올려놓았다. 턱을 괴더니 보라색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을 열었다.

 

 “중요한 일이긴 하죠. 당신을 상담하는 거니까. 슬슬 나오죠?”

 

 하얀 벽에 있던 책장 그림자에 새오가 슬그머니 나왔다. 얀은 흥미롭다는 듯 생긋 웃으며 의자에 앉는 새오를 살펴보았다.

 

 “흥미로웠나 봐요. 상담 받으러 올 생각을 하고.”

 “……봉인을 해야 하니까.”

 

 새오는 얀의 모습을 훑어봤다. 저번과 달리 앳되고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긴 은발머리를 틀어 올려 단정하게 묶었고 눈매나 오똑한 콧날까지 성인임이 확연히 티가 났다. 게다가 붉은 빛이 도는 립스틱 대신 보라색의 립스틱이 특이하게 발라져있었다.

 

 “그럼 상담을 시작 해볼-.”

 

 푸슉!

 

 책상의 그림자들은 날카롭게 변해 얀을 찔렀다. 그림자를 조종했던 새오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얀은 저번과 같이 투명한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새오는 길죽하게 늘어난 그림자를 원래대로 돌이켰다. 그와 동시에 얀은 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런. 정말 내 본체가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거요?”

 “넌 나에게 봉인 될 존재다.”

 “아, 그런데 왜 당신에게 접근하냐구요?”

 

 여자는 환영주제에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테이블 위 찻잔을 들어 마셨다.

 

 “당신부터 말해 봐요. 원하는 게 뭐죠?”

 “…….”

 “왜 봉인을 하죠?”

 

 그야,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평범한 인간이 아닌 스승과도 살아왔지만, 자신은 이상했다. 특별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깊은 의문. 이제는 집착으로 변질 된 것.

 

 “봉인을 한 다음 무엇을 할 거죠?”

 “그것을 왜 말해야하지?”

 

 새오는 깊은 생각 대신 차가운 대답으로 대화를 잠시 끊었다. 하지만 얀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말하지 않으면 볼 수밖에요.”

 

 얀의 손가락이 새오의 이마에 닿기 직전, 방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그림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새오는 점점 변하는 그림자 세계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얀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츠츳!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림자로 변하던 물건들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눈을 크게 떴다. 대신 얀이 빙긋 웃으며 손을 더 뻗어 새오의 이마를 톡 쳤다.

 

 “그림자 세계를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스승님을 아나?”

 

 얀의 말과 표정은 기억을 읽어서 아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얀은 작은 숨을 뱉었다.

 

 “그자와 나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자는 기억 즉 뇌를 읽습니다. 그래서 읽혀지는 당사자가 생각하지 못하거나 극도로 거부하는 기억이라면 읽지 못하죠. 하지만 전.”

 

 파앗.

 

 책장 근처 벽에 홀로그램을 비친 것처럼 환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부친에게 매 맞고 빨간머리에게 돌을 맞는 새오의 유년 시절이었다. 새오는 급히 의자에 일어나 속으로 치치를 외쳤다. 하지만 책장 뒤에 숨어있던 치치는 붉은 넝쿨같은 것으로 묶여있었다.

 

 “나는 상대의 꿈속에 접속해 무의식 깊은 곳까지 침범합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잊고 있던 것 까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지요.”

 

 얀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화이트에 밝던 진료실이 온통 정육점 안 같은 붉은 빛으로 변했다. 가구는 싹 다 사라졌고 대리석 바닥엔 입자고운 흙과 피안화가 잔뜩 피어났다. 문과 창문 대신 끝없는 대지와 언덕 너머의 불길한 노을만이 보일 뿐이었다.

 

 “당신만 세계를 구축할 줄 알았나요?”

 “…….”

 “어서 오세요. 나의 붉은 나락의 세계에.”

 

 얀이 청초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붉은 빛이 비춰진 보라색 입술은 몹시 불길해보였다. 새오는 어서 벗어나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를 증명하듯 얀이 서서히 다가와 새오의 피맺힌 입술을 스윽 닦아내더니.

 

 휙!

 

 어느새 생긴 언덕 아래 낭떠러지로 새오를 밀어버렸다.

 

 “이젠 나락 속으로 들어가실 때가 됐습니다. 잘 다녀오시지요.”

 

 새오는 붉은 노을을 등진 얀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풍덩!

 

 이런 곳에 물이? 아무리 허상이어도 이런 감촉을 구현한다니? 절벽에서 끝없이 떨어지던 새오는 호수 같은 거대한 웅덩이에 빠졌다. 기껏 해 봐야 허상이니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새오는 팔과 다리가 저린 것을 자각했다. 손가락을 까닥였지만, 그림자는커녕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서서히 잠식당하는 제 몸이 느껴질 뿐이었다.

 

 

 ‘쉿! 말하면 안 된단다.’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설마 싶은 새오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자갈이나 물고기만 있어야할 물속에서 작고 좁은 집안 풍경이 홀로그램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저 곳은 분명……. 새오는 자세히 보기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피곤에 절어있는 중년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가 집안에 앉아있었다. 여자는 아이의 입을 꼭 막고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엄마 앞에서만 말해야해. 알겠지?’

 

 아이는 고개를 얼른 끄덕이다가 스케치북을 꺼냈다. 크레파스로 물음표를 크게 그렸지만, 여자는 얼른 스케치북을 덮었다.

 

 ‘이유는 나중에 알려줄게. 어른 되면. 응?’

 

 아이가 제 어미의 절실한 표정에 크레파스를 슬쩍 내려놨다. 여자는 잘했다는 듯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때 컨테이너 박스 문을 세게 열며 비틀거리는 남자가 들어왔다.

 

 ‘젠장, 오늘도 왕창 잃었으니…….’

 ‘당신 오늘도 했어요? 그러다 쫓겨나면 어쩌려고-.’

 

 찰싹!

 

 남자가 여자의 말이 거슬렸는지 세게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여자는 익숙했는지 제 뺨을 만지며 한숨을 뱉었다. 이내 아이의 등을 떠밀며 속삭였다.

 

 ‘아가씨가 아까 심심하다고 했는데, 아가씨랑 놀아드리고 오렴. 응?’

 

 나는 그 애 싫어요……. 아이는 말을 삼킨 채 어미에게 등을 떠밀려 나가야만 했다. 남자는 아이를 매섭게 째려보다가 아이가 문을 닫고 나가자 욕을 뱉었다.

 

 ‘저 기분 나쁜 년!’

 ‘여보!’

 ‘내가 틀린 말 했어?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말이 돼?’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소주병을 거칠게 바닥에 던졌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정해질 때 까지 계속 새오라고만 말했단 말이지. 게다가 그림자도 없고 계속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도 뱉고……. 요즘도 그러나?’

 ‘제가 주의 줬어요. 그거 혹시 외국어 아닐까요?’

 ‘외국도 안 가본 년이! 아무튼 저거 때문에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도 없는데…….’

 

 남자가 씩씩거리며 창문 밖을 쳐다봤다. 창문 밖엔 자신들이 모시고 사는 대기업 회장 식구들이 사는 거대한 저택과 그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제 딸년 그리고 저택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 받는 회장의 손녀딸이 있었다. 손녀딸은 빨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야, 병신!’

 

 아이는 빨간 머리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심통이 났는지 스케치북을 발로 밟기 시작했다.

 

 ‘왜 대답을 안 해!’

 ‘…….’

 ‘이상하다?’

 

 그래도 짧게 대답은 했는데, 갑자기 말을 안 하는 아이를 본 빨간 머리가 땅바닥에 앉았다.

 

 ‘야, 너 왜 말을 안 해?’

 ‘…….’

 ‘유모가 말하지 말래?’

 

 유모는 제 어미를 부르는 말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 머리는 턱을 괴더니 한숨을 뱉었다.

 

 ‘니가 말해서 그나마 숨통이 튀였는데. 에이씨. 유모는 왜 말하지 말라는 거야?’

 

 아이는 대답대신 크레파스를 스케치북 위에서 움직였다. 스케치북엔 빨간 머리의 가정교사가 그려져 있었다. 빨간 머리는 그걸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도망쳤어. 재미도 없고. 엄마는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

 ‘야, 너 이제 말 못하니까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빨간 머리는 어느 때와 달리 어두운 표정이었다.

 

 ‘우리 엄마 젊은 아저씨랑 노느라 나랑 안 노는 거다?’

 ‘…….’

 ‘어제도 아빠 없을 때 그 아저씨랑 침대에서 놀더라.’

 ‘…….’

 ‘너는 좋겠다. 유모가 너랑 놀아주잖아.’

 

 빨간 머리가 우울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유모가 없으면 외톨인데. 하고 중얼거리던 빨간 머리는 입을 빼죽 내밀더니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나도 비밀 말했으니까 너도 말해!’

 ‘…….’

 ‘빨리이!’

 

 아이는 쭈뼛거리다가 빨간 머리의 성화에 다시 크레파스를 스케치북 위에 올려놨다. 잠시 후 스케치북엔 아이와 아이의 그림자가 그려졌는데, 그림자 위엔 빨간색으로 엑스가 그어져있었다. 빨간 머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데?’

 ‘아가씨!’

 

 빨간 머리가 익숙한 호칭에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봤다. 가정교사와 유모였다. 빨간 머리는 제 머리를 긁으며 변명을 투덜거렸다.

 

 ‘아니, 잠깐 쉬려고 나온 것뿐이야.’

 ‘이것만 끝내면 놀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빨간 머리는 금세 가정교사에게 손이 잡혔다. 하지만 거칠게 뿌리치더니 아이의 엄마, 유모의 손을 꼭 잡았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대신 유모 손잡고 갈래.’

 

 빨간 머리가 입을 빼죽 내밀며 아이답게 말하자 가정교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유모에게 같이 가자는 눈빛을 보냈고 아이의 엄마, 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 머리는 유모의 손을 잡고 가다가 뒤를 슬쩍 볼아 보곤 얄밉게 혀를 내밀었다. 보고 있던 아이는 다시 고개를 숙여 우울하게 스케치북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 이따간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하며.

 

 하지만 그 기대가 물거품이 돼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이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어미의 시체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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