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내시는 목소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이미 단 꿈에 빠진 것 마냥 새근새근 숨소리가 가늘었다.
이렇게 잠든 모습만 본다면 세자도 참 안쓰러운 자리였다.
신 내시는 동궁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 내시 나이 열다섯, 내시의 수업을 마치고 각 궁에 배치된 지 벌써 세 해가 지났을 때 즈음이었다. 이젠 업무도 능숙하게 처리하고 그의 맡은 바 수행은 모두 수석으로 마치는 등, 제법 내시의 테가 나기 시작하였다. 담장너머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가보았을 때, 그곳에서 만난 아기, 강보에 돌돌 쌓여 있었지만, 기껏해야 얼굴만 동그마니 강보 밖으로 나와 있었지만 그 광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그 아기를 보고 신 내시는 뜬금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기는 세상의 모든 빛을 집어 삼킨 듯한 화려함으로 빛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자의 얼굴에서 방긋방긋 웃음꽃이 피었을 때, 신 내시는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신 내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의 미소를 따라 대문을 건넜다. 그곳에 내명부들만 모여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아이는 신 내시를 보자바자 방글방글 웃었고, 신 내시가 강보를 슬며시 내려 볼을 살짝 건들자 어린 세자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까르르 웃었다.
때마침 전하가 어린 세자를 만나려 동궁전에 들렀다.
“이런 무례한! 네 감히 그 분이 뉘신 줄 알고 용안에 손을 대느냐!”
대전 내시가 양 손을 소맷부리에 감춘 채 전하의 뒤에서 크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안절부절, 신 내시의 행동에 몸 둘 바를 몰라 작지만 엄중하게 그를 나무랐다.
“너는 저 꽃 같은 여인네들 중, 뉘를 뫼시고 있느냐.”
“저, 전하....... 쇤네는.......”
임금의 위엄이라는 것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냥 딱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신 내시는 자신의 소속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너는 이번에 승정원에 배치된 내시가 아니더냐?”
효빈이 잔망스럽게 먼저 아는 척을 하였다. 궐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여인이 바로 효빈이었다. 전하의 두 번째 빈, 내명부의 서열 세 번째이지만 실지로 가장 권력행사가 강한 그녀가 신 내시를 기억하다니. 안 그래도 머릿속이 멍해 전하의 하문에도 대꾸하지 못했거늘, 그것만으로도 경을 칠 노릇인데 이번엔 뜻밖의 효빈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이런 천인공로 할!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하문하심에 묵묵부답이더냐!”
결국 대전 내시의 화가 폭발 하였다. 신 내시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여기가 어딘지, 지금 어떠한 상황인건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승정원 내시가 이곳엔 어쩐 일이냐.”
코가 땅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고 있던 신 내시 곁으로 전하가 다가섰다. 바짝 긴장해 있는 신 내시의 곁에 전하가 다가서자, 그는 목석이 된 것 마냥 또 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그 때였다. 강보에 싸여 있던 세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모 상궁에게서 중전이 세자를 건네받았지만 세자의 울음은 더 커질 뿐이었다. 세자가 계속 울어 중전은 당황스럽고 또 민망한 모양이었다.
“괜찮소. 목청이 큰 것을 보니 조선을 우렁차게 호령할 성군이 될 모양입니다. 과인이 안아봅시다.”
중전은 쑥스러운, 하지만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자를 임금의 팔에 안겨주었다.
“내가 애비이니라. 이제 울지 말거라.”
전하가 서툰 솜씨로 세자를 달래보았지만 세자의 울음은 훨씬 더 커졌다. 전하가 멋쩍은 웃음으로 세자의 울음을 막아보려 했지만 울음은 멈추질 않았다.
“허허, 그 녀석 참. 중전이 달래 보시구려.”
전하가 중전에게 세자를 건네주려던 순간이었다. 효빈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지더니 은근 슬쩍, 곁에 있던 엄 숙의를 팔꿈치로 쓰윽 밀었다. 어떻게 해서든 전하와 눈빛을 마주치려고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리던 숙의는 중심을 잃고 그만 중전 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전하에게서 세자를 건네받던 중전의 자태가 흐트러지면서 세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모두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끔 감았을 때였다. 난데없이 세자가 울음을 멈추고 심지어는 깔깔깔 소리를 내어 웃기까지 하였다. 신 내시가 떨어지는 세자를 재빨리 안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상황은 오히려 세자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어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럽니까! 하마터면 세자저하께 큰 변고가 생길 뻔 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