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드높기 짝이 없었다. 푸른 하늘에 솜뭉치를 무심한 듯 툭하니 던진 것 마냥 구름은 정처 없이 흐르고 흘러 그 모습마저 흐드러졌다. 아직 채 겉옷을 준비하지 않은 행인들은 불어오는 찬 가을바람에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거리를 활보하였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들어가는 한 건물 앞에 유난히 덜덜 떨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중간고사 뒤 처음 맞는 주말에, 이 화창한 날에 푸림이는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준혁이가 네 친구냐? 어디 언니 친구한테 푸림이래?”
“왜? 혜림이 바라기 푸우, 푸림이.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
준혁은 혜림을 바라보며 마냥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가 보이자 준혁은 몸을 잔뜩 웅크리며 혜림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혜주는 실실 웃는 준혁이 못마땅한 지 잔뜩 눈을 흘기며 그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맞는 준혁보다 오히려 때리는 혜주가 더 아팠는지 그녀는 손목을 털며 여전히 준혁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언니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 대한민국 상위 1%만 간다는 한국 대학교 가면 뭐하냐고. 요리가 좋으면 그냥 취미로 하면 되잖아. 아니면 휴학이라는 방법도 있고. 어쩜, 엄마 아빠 몰래 떡 하니 자퇴....... 그 대학을 혼자 갔니? 언니 공부한다고 나 찍소리도 못하고 3년 내내 까치발 들고 다녔고, 엄마는 또 어땠어. 귀한 따님 공부하신다고 새벽밥부터 시작해서 야간 간식까지 한 번 거르지도 않고 언니 코앞까지 대령해. 아버지는 언니 과외비 번다고 끙끙대셔. 우리 집 등골브레이커였다고. 그럼 집에다가 ‘나 자퇴 했어’라고 폭격을 할 거면 최소한 모두가 수긍해야할 만한 일이어야 하지 않니? 요리가 뭐야 요리가.”
“혜주야, 그냥 요리가 아니야. 궁중요리지. 조선 시대......”
혜주가 준혁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자 그는 말을 멈추고 이내 혜림의 눈치를 보았다.
“지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괜히 나한테 덮어씌우고, 지랄.”
내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고 있던 혜림이 내뱉은 첫말에 혜주도, 준혁도 아차 싶은 지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두었다. 혜림이 자신의 손으로 등을 가리키자 준혁은 잽싸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아이고, 진심 둘이 결혼해라. 어쩜 그렇게 척하면 척이냐! 시험 마치면 음식 먹으려고 기다리면서 아부까지, 쯧쯧.”
혜림이 눈을 부릅뜨며 입술을 씰룩거리자 혜주는 입을 쭈욱 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혁은 혜림의 등을 쓰다듬으며 두 눈을 꿈뻑 꿈뻑, 혜주에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혜림아, 처제가 허락을 한 것 같으니 우리 진짜 결혼할까? 4년째 눈치보고 따려는 자격증, 까짓거 내가 내조하면서 팍팍 밀어준다.”
“고자 부랄 터지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 내가 너무 잘해줬지?”
푸흡
혜주가 마시던 음료수를 뿜고 말았다. 휑한 거리로 뿜어진 음료수는 때 아닌 미니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시간 계산 잘 하고. 넌 완벽하니까 그거만 잘하면 이번엔 꼭 붙을 거야.”
“붙어도 문제, 떨어져도 문제. 언니야, 시간 늦겠다.”
내내 깐족깐족, 혜림의 비위를 뒤틀리게 하던 혜주였지만 시계를 보며 가장 초조했던 것 역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