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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강당이 아마 이만했을까? 맨 앞자리, 하필이면 이 넓은 시험장에서 맨 앞자리가 뭐람. 진행 위원이 착용한 마이크는 저 뒷자리에 자리한 사람들을 배려한 것 일 테지. 앞사람을 위한 배려는 없는 거야? 머리가 멍멍할 만큼 우렁찬 진행 위원은 대체 몇 번을 주의 사항을 주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미 혜림의 머릿속엔 그 다음 멘트가 무엇인지 뻔히 다 아는 데 말이다.
‘이번엔 꼭 좀 합격하자!’
어차피 매번 요리를 사사해 주시던 스승님이 심사위원에 위촉되어 오시지만 이렇게 맨 앞자리, 그것도 심사위원들의 지정석 코앞에 자리가 배치되어버리면 부담스럽잖아.
혜림은 내내 자신의 자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배치 한 것도 아니고 수험번호대로 배치된 것이니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혜림은 앞에 놓인 뒤집개와 칼, 그리고 거품기 등, 조리기구들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스승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부지런 모드 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리대는 한 모둠에 여섯 개씩, 조리대 하나당 네 명이 조를 이루고, 그런 모둠이 대략 40개는 있는 결로 보아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통궁중요리 국가자격증을 따겠다고 모인 것이다. 아무리 청년실업이 최고치에 달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정도로 전통궁중 요리에 관심이 있을 줄, 참 5년째 보는 혜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년 최고치를 갱신하고 또 갱신하는 것을 일일이 세보지 않아도, 엎드려 수학 공식에 맞춰 퍼센트를 계산하지 않아도 빤히 보이는 수치였다. 물론 합격 인원을 정해놓고 뽑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만 잘 한다면 뭐 가능성이 절대 없는 말이긴 하지만 900명이 넘는 이 이원들이 모두 합격을 할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은 가정일 뿐이고. 심사위원들 모인 뒤에 걸려있는 커다란 시계의 초침 소리가 혜림의 심장 소리랑 같은 리듬을 타는 듯 했다. 혜림은 호흡을 고르고 또 골랐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야 한다.
혜림의 주문은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더욱 크게 심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천명이 가까운 사람들이 움직이는 공간이라고 치고는 정말이지 숨 막힐 만큼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벌써 지단을 붙이려는지 달궈진 팬에 촤아아 하고 들리는 마찰음, 기름의 냄새, 타인의 것은 쳐다볼 여유도 없이 모두들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분명히 이번에는 붙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느낌이라는 게 있으니까. 매번 긴장을 하지 않던 혜림이 유난히 긴장을 하는 것도 그랬고, 지난 밤 꿈도 정말 좋았다.
스승님의 넌 대체 전통궁중요리사가 되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해 보았느냐는 질문에 혜림은 자신이 4년 동안 국가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처음으로 반성해 보았다. 스승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 외에 따로 요리를 연구해볼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혜림은 그 날부터 준혁을 불러 한정식 집 탐방을 시작하였다. 어떤 음식이든 2인, 4인상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준혁은 혜림과 함께 동행하는 데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했고 사진기에 음식이 하나 둘씩, 담길 때마다 혜림은 자신만의 요리 레시피를 늘려나가는 것 같아서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분명히 언젠가 가본 적이 있는 곳일 게다. 고풍스럽기로 따지자면 최고, 복원을 해서 한정식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조선의 궁을 옮겨 놓은 듯한 정자. 대체 얼마를 벌면 이런 한정식 집을 갖겠느냐고 꼭 질문을 해야 알까.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 한가운데 호수까지. 정말 완벽한 장소였다. 이런 곳이라면 보조도 좋으니 당장이라도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
그런 장소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을 온 게 틀림없다. 그러니 이렇게 낯선 듯 하면서도 익숙한 곳일 테지. 정자 위로 혜림은 천천히 걸어 올라섰다. 준혁은 차를 주차하느라 늦는 모양인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도착한 정자에는 생각보다 소박한 상이 차려져있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살짝 실망을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잘 갖춰진 장국상차림일 것이다. 정자 끝에 걸터 앉아 아무리 기다려도 준혁은 오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기 보다는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 눈앞의 소박한 상이 궁금해서 더는 준혁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즘 너무 잘해줬어.
혜림은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준혁을 기다리는 대신 정자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혼자라도 확인해보리라. 몇 시더라.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계는커녕 손에는 핸드폰도 쥐어져있지 않았다. 혜림은 정자를 향해 남은 세 개의 계단을 오르기로 했다. 하지만 계단 위로 발을 올리면 발은 제자리로 내려오고 다시 발을 올리면 계단은 제자리.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고 싶었지만 계단은 에스컬레이터마냥 내내 제자리걸음이었다. 몇 시였더라. 혜림은 좁혀지지 않는 정자 위의 상차림에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발은 더 빨리 움직였지만 발이 빨리 움직이는 것만큼 계단도 딱 그만큼 제자리, 제자리, 또 제자리였다. 몇 시였더라. 몇 시였지? 시간을 확인 해야 할 것 같은데?
결국 그렇게 혜림은 깨어났다. 꿈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꿈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다행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정자 위의 그 상차림을 봤어야 할 것 같았는데.......
“언니도 참, 시간 확인 잘 하라는 꿈의 계시잖어. 좋은 꿈이구만 뭘. 궁궐이 보이고 정자가 보이고 그럼 막막막 좋은 꿈 아닌가?”
혜주의 말대로 그 꿈은 시간만 잘 확인하면 궁궐의 음식상을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예지몽이 분명했다. 4번 시험보면서 이런 꿈을 단 한 번도 꾼 적이 없던 혜림은 혜주의 말에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내심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었다.
혜림은 지단을 썰다말고 힐끔, 심사위원 자리를 보았다. 스승님은 장 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계신지 모습을 뵐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시간의 흐름이면 이번에는 제대로 전을 부쳐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첫 번째 제시 음식이 ‘전’이었다. 전은 혜림이 가장 단정하게, 가장 예쁘게, 그리고 음식의 기본인 맛까지 가장 자신 있게 부쳐낼 수 있는 요리였다.
이 정도 시간 흐름이면 완벽해. 계란 옷도 잘 입혀지고 있고, 생선 전유어 할 포도 적당한 두께로 잘 떠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어. 팬의 온도도 온도계로 재어보지 않아도 정확할 테지.
혜림은 팬에 기름을 두르고 손목스냅을 이용해 팬의 곳곳에 기름이 묻어나도록 팬을 둥글게 둥글렸다.
완벽해. 온도도 완벽하고 기름칠도 완벽해!
혜림은 잘 달궈진 팬 위에 계란 옷이 뚝뚝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집개로 받쳐 전을 내려놓았다.
‘치이이이이’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어어!
혜림은 생각보다 더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만큼 연기가 날 만큼의 문제도 아니었다. 뱅그르르 어지럼증이 느껴지는 것이 혜림은 잠시 중심을 잃고 말았다. 혜림은 정신을 차려보려 애를 썼지만 이미 뿌옇게 흐려진 시야는 쉽게 맑아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번 시험도 죽 쒔구나...... 빌어먹을....... 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