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할 땐 하는 사람이거든!!”
죽기 살기로 지축을 밟으며 내달리니 킨이 활시위를 채 놓기 전에 그녀의 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제 목도를 킨에게 휘두르기만 하면 끝이다.
“어라?”
하지만 사라졌다. 목도가 지나간 자리엔 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얘 어디로 갔어?”
좌우에도, 뒤에도 없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사방을 둘러봐도 안 보인다.
“이쪽입니다.”
그때 좀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사라진 킨이 홀연히 목소리만 들려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줬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머리 위에 들리는 킨의 목소리는 이렇게 소름을 돋게 할 줄이야….
“…세상에.”
각막으로 들어온 킨의 자태가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비춰졌다.
물속을 유영하듯 허공에 뛰어오른 노을빛에 물들여진 킨의 흰색 털이 불그스름하게 빛났고 손에 쥐어진 활도 그녀처럼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오직 그녀의 손가락에 쥐어진 흑색의 화살만이 찬란한 빛깔을 유지하고 있을 뿐.
킨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만약 지금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을 수만 있다면 한 폭의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그녀의 손에서 빛나는 화살의 끝이 내게로 향해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팅.
활시위가 유난히 맑은 소리를 내며 화살을 토해냈다. 중력과 활시위의 탄력을 동시에 받은 화살은 엄청난 가속이 붙은 채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그것마저도 전신에 쏠린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킨의 모습에 매료돼 홀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도 화살은 내게로 날아온다는 거였다.
퍽!
“이런 미ㅊ@!#%^^!#@$%!@#%^#!!~!()#”
“괜찮으십니까?”
화살에 맞고 바닥에 엎어진 내게 공중에서 사뿐히 내려온 킨이 대련 이후 처음 건넨 말이다. 싸웠을 때 풍겼던 살벌한 기운은 사라지고 차분한 듯 무덤덤하게 건네는 걱정이 서린 말 한마디에 간신히 고개만 돌려 저만치 떨어져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곳곳이 서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역시는 역시였다.
“사람한테 인정사정없이 화살을 꽂은 사람 입에서 나온 말치곤 굉장히 심플하네.”
“대련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드레이크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드레이크님을 강하게 하는 건 곧 주인님의 전력이 된다는 것이라고.”
“하하.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승부욕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화살에 맞을 일은 없었으려나…. 다시금 킨에게 있어 안젤라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다음부턴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아야지. 두 번 꺼냈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어때 킨. 머리가 좀 맑아지는 거 같긴 해?”
완벽하게 공략당한 터라 만족감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잠시 활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킨이 날 바라봤다.
“일순간이었지만,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사실 더 이상의 대련은 사절이라서 말….”
…어라? 어째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어째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 것 같은데….”
“고통도 없으시지 않나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분명 등에 화살을 맞은 것 같은데 지금은 안 아파. 처음엔 진짜 아팠는데?”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그 화살 지금 척추에 꽂혀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온몸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은데?”
“제 화살엔 신경마비를 일으키는 마법이 캐스팅돼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기…. 그러면 위험한 거 아니야? 나 지금 정말로 온몸이 굳어가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감각이 안 느껴지는 것일 뿐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당장 양손에 올린 엄지 내려. 부러뜨린다…?”
그래. 엄지손가락을 들어주는 것. 내가 가르쳐준 감정표현이다. 참 잘 써먹긴 하네. 다음엔 바닥에 엎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한텐 쓰지 말라고 가르쳐줘야겠다.
“응? 뭐야? 너희들 뭐하고 있어?”
안젤라? 연구 중엔 웬만하면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던 사람이 밖으로 나오다니. 킨이 가져온 영혼의 연구가 벌써 끝난 건가?
“드레이크님과 대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련?”
킨의 발언에 안젤라가 나와 킨을 몇 차례 번갈아보더니 이내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날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어이없어 하는 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네가 킨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안 그래도 방금 아주 진절머리가 나게 깨달았거든요? 지금 제 꼴을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그래, 잘 보여. 마당 한복판에 등에는 화살이 꽂힌 채로 패자의 쓴맛을 느끼며 엎어져 있는 게 말이야. 훗, 패자의 말로란 게 바로 이런 건가? 참 비참하네.”
가소로워하는 표정으로 키득거리는 꼴을 보니 내 모습이 상당히 고소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몸이 전혀 안 움직여주는 건 물론이고 어차피 내가 그녀를 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쳤다간, 또 그 데스볼이 몸을 강타할 테니까. 몸이 타들어가는 건 한 번이면 족해.
안젤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잘난 체할 생각인지 팔짱까지 껴가며 우쭐거렸다.
“뭐, 나 같은 경우엔 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비참함 따윈 모르겠지만.”
“아 예…. 그러시겠죠.”
이럴 땐 한 귀로 흘려듣는 게 상책이다. 스트레스는 정신건강에 해로우니까. 이럴 땐 노련하게 넘어갈 줄 아는 센스가 필요한 법. 적반하장으로 언성을 높이는 건 하류 중에 하류가 하는 짓이다.
“그것보다 연구실에 들어가신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나오셨네요? 킨이 가져온 영혼 연구는 끝나신 건가요?”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말 해줘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거면서.”
“쌀쌀맞으시긴. 또 막혔나 싶어서 그랬죠.”
“말하는 싸가지 보소?”
“또 밟으려고 그러신다! 저도 나름 인격체인데 최소한의 배려는…. 꽥! 비비지 마요!”
“인격체는 얼어죽을. 최소한 상식 있게 생활하면 말이라도 안 하지. 자꾸 매를 버니까 밟지.”
…정말 오늘만 계급장 떼고 이판사판으로 싸워볼까?
“내 연구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마. 귀한 샘플이라 신중해지려는 것뿐이니까.”
이씨. 결국 다 말해줄 거면서 신경질적으로 구는지. 참 이해하기 힘든 사람일세.
“킨. 미안하지만 이 철딱서니 없는 멍청이한테서 화살 좀 뽑아줄래? 상태 좀 확인해봐야겠어.”
“네, 주인님.”
“살살해, 살살.”
“신경마비 때문에 고통스러우시진 않으실 겁니다.”
안젤라의 명령에 킨이 쪼르르 달려와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내 등에 꽂힌 화살을 잡더니 마치 당근을 뽑듯 뽑았다. 화살을 꽤 무식하게 뽑아낸 것 같은데 그리 아프진 않았다. 아무래도 킨이 화살촉에 걸어둔 신경마비 마법이 좋게 작용한 것 같다.
“한동안은 거동하시기 불편하실 겁니다. 해독이나 몸에서 중화작용을 한다하더라도 후유증이 남아있다 보니.”
“얼마나 가는데?”
“정확힌 모르겠지만, 후유증이 완전히 해소되는 시간은 화살이 뽑힌 직후 대략 1시간 이상으로 사료됩니다.”
“1시간 이상?”
이 땅바닥에서 1시간동안 꼼짝없이 엎어져 있어야한다는 불운한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이제 슬슬 날도 저물고 찬바람도 불어서 슬슬 춥기도 하고.
“얼마나 움직이기 힘든 건데?”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사지가 마비 되서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이 둔해져 통증을 전혀 못 느끼게 되는 것뿐이죠.”
“킨. 그거 꽤 심각한 거거든?”
“참, 가끔 뇌 쪽으로 전달돼서 사고에 마비를 일으키긴 하지만 그럴 확률은 미비하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십쇼.”
“그게 제일 심각한 거야!”
표정연기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킨에겐 다른 무엇보다 심각하다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제대로 확립해주는 게 우선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감정이고 나발이고 남들 다 심각해하고 있는데 혼자서 괜찮다고 하니. 아예 공감능력이 없는 거 아니야?
“귀청 떨어질 것 같으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 내가 금방 치료해줄 테니까 저녁식사나 제때 준비해놔. 후유증이고 자시고 결국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변명하지 말라고.”
“예, 예.”
잔소리를 마빡 터지게 듣게 될 때의 팁, 그냥 대충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답이다. 물론 그녀는 내 태도가 영 못마땅한 것 같았지만, 구태여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내가 그녀의 잔소리에 익숙해진 것처럼, 그녀 또한 내 빈정거림에 익숙해진 것이겠지.
안젤라는 엎어져있는 내가 다가오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화살를 뽑아낸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던 안젤라는 조용히 기립해있던 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킨. 미안한데 내 연구실에 가서 여유분으로 남아있는 젤 좀 가져다줄래? 난 그동안 해독마법이랑 마비된 것 좀 풀어놓고 있을게.”
“네. 알겠습니다.”
킨은 안젤라의 부탁에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한달음에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봐도 참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군대에 있었을 때가 떠오르는 빠릿빠릿한 움직임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