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같이 어디 좀 가실래요?"
“그래. 뭐, 근데 어디 갈 거야?”
당연히 집에 가는 줄 알았지만...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걸까?
“오늘은 조금 더 걸으려고요”
“걸어? 이미 넌 충분히 많이 걷고 있는데?”
버스에서 하차하고도 한참을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지선의 집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밖을 나가지 않는 지선이 밖을 돌아다닌다니 의외였다.
“아니 그냥 살을 좀 빼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살? 왜? 조금 빼야 되긴 하겠지만 갑자기?”
“아니 그게 이제 아저씨가 같이 있으니까...”
그건... 아니었다. 난 지선이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옆에 있었다.
“나 원래 너 옆에 항상 있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전에는 몰랐고, 이제는 제가 알잖아요.”
“참내! 이해가 안 되네?”
“아저씨가 이런 소녀의 마음을 아실까!”
“소녀?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이렇게 수줍어하는 지선을 본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혹시 아저씨 얼굴 모르죠?”
“그렇지? 난 거울을 못 보니깐”
“아저씨 되게 잘 생겼어요. 연예인 같아”
“그래?”
내가 볼 수도 없었고, 어차피 우리 일이 잘생기건 못생기건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또 잘생겼다고 하니 내심 기분은 좋아졌다.
“오늘부터 버닝!”
“그래 예뻐질 수도 있겠네.”
“그럼 지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대답은 두 개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되는 거였지만... 내 대답에 따라 생길 여러 가지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물... 론 지금도 예쁘지만! 조금 더 예뻐질 수 있다는 거지”
“그렇죠?”
내 대답을 듣고는 지선은 해맑게 웃으며 보폭은 크게 팔은 힘껏 씩씩하게 흔들며 걸었다. 둥글둥글 한 게 그렇게 걸으니 무척 귀여워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나도 똑같이 걸어 주었다.
가로수가 길게 쭉 이어진 길은 아직 겨울을 떠나보내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 속에서 분홍빛 벚꽃이 피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봄을 맞이하려는 그런 2016년 3월의 봄 길이었다.
-1년 후-
그녀는 말도 안 되게 달라졌다. 둥글둥글하고 넓적한 얼굴은 어디 가고 계란형 얼굴이 드러났다.
안경을 통해 보여 작아 보였지만, 원래 커다랬던 눈은 안경을 벗고 랜즈를 끼기 시작하니 더 맑고 커졌다. 짧았던 단발머리는 많이 길어져 묶을 수 있을 정도로 자랐다.
조금 열린 창가에 들어오는 햇빛에 그녀는 반짝반짝 빛났다. 일 년 전 그녀가 나를 보았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일어나! 오늘 개학 첫날인데!”
“알았어요!”
쌔근쌔근 자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는 무결석 무지각을 위해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잠자고 있는 걸 깨워서 짜증이 났는지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일어나?”
“후... 진짜 엄마보다 더한다니깐”
그녀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남겨진 나는 이불을 정리하고 시간표를 보고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책을 가방에 넣어줬다.
지선과 대화를 시작하고 4개월쯤 지나서 알게 된 건데, 지선과 관련한 모든 물건을 만지고 옮길 수 가 있었다. 그 뒤로 난 계속 지선의 아침을 정리해 주고 있다.
“아저씨 그거 챙겼어요?”
“그거? 그게 뭐야?”
지선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길어진 머리카락을 탈탈 털면서 물었다.
“아이 진짜 그거 있잖아요. 그거 오늘 시간표 바뀌어서 생물책 말고 물리책 챙겨야 되요”
처음에 내가 정리를 했을 때 지선은 무척 신나했다. 그리고 고마움도 항상 표현해 줬다. 그런데 이제는 고마움은커녕 오히려 나에게 화를 냈다. ‘망할 것...’ 이게 엄마의 마음이란 건가. 싶었다.
“챙겼어!”
“욜~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밥 먹고 올게요.”
지선이 밥 먹으러 간 사이 난 어제 그녀가 피곤하다며 마구 벗어놓은 교복을 탁탁 펴서 예쁘게 걸었다.
얼마 후 지선은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와서 나를 쫓아내곤 내가 걸어 놓은 교복을 주섬주섬 입었다. 우리는 항상 교복을 다 입고 신호를 보내면 다시 들어가는 식이었다.
“교복 줄여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되게 바보 같아.”
“그래요? 줄여야 하나?”
지선의 신호에 방으로 다시 들어와서 보니 교복이 많이 커진 듯 보였다.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녀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가 그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커져가는 교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듯 했다.
“자! 가볼까!”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지선은 한층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버스를 타러 향했다. 그녀의 학교생활은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그 계기가 살이 빠져서 그런 건지 싶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날 만나고 얼마 뒤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다가오는 소희에게 소리를 치며 짜증을 냈다. 당황한 소희는 그 뒤로 지선에게 말도 걸지 않게 되었고, 학교에는 소문이 퍼져 지선에게 말을 걸고 다가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행복해 보이네.”
“그럼요 아저씨 덕이에요!”
아니.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지선에게 힘든 학교를 보내게 한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두 개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으니 무조건적인 내 유혹에만 유혹 당해왔었고, 결국 그런 결과를 만든 것이었다.
“근데 아저씨는 천사잖아요?”
“응 왜?”
“저번에 아저씨가 얘기 한 거는 악마는 질투, 분노, 경쟁으로 유혹하고 천사는 용서와 윤리로 유혹하는 거라고 했는데 아저씨는 그 둘 다 하는 게 좀 이상해서요.”
지선과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바뀐 것이 또 있었다. 생각으로는 전해지지 않던 내 유혹들이 말로는 강하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소희에게 소리를 친 것도 순전히 내 분노에서 시작 되었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이해가 안가긴 해”
우리 둘이 이런 의문에 빠져있을 쯤 우리는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도 역시 그전 까지 징그럽게 달라붙던 소희는 보이지 않았다.
“순씨?”
저 말은 오늘 하루... 아니 앞으로의 나와 지선에 삶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말이었다. 나를 부른 곳을 보니 두 명의 남자가 서있었는데 빨간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악마로 보이는 남자와 묘하게 빛을 내며 존재감을 들어내는 천사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선아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
“네? 항상 저랑 붙어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냐 가끔 떨어질 때가 있긴 해 그게 지금이야”
“뭐야 알았어요. 멀리 가는 거 아니죠?”
“응 학교 근처에 계속 있을 거야”
지선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를 보내주고는 학교로 들어갔다.
이제 이들과의 대화가 남았다. 이 불안함... 지선과 처음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서 밤새했던 불안감만큼... 아니 더 큰 불안감이 내 주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네?”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들의 부름에 답했다.
“지금부터 양 쪽 세계의 합의 사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역시나 그 불안감은 맞았다. 그들은 내가 인간과 대화를 하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늘과 지옥의 대표가 만나 긴급회의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서로의 합의점을 찾던 중 한 천사가 합의점을 제시 했고 두 세계는 그것에 동의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동의한 내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용은 이랬다. 우선 룰을 어긴 나를 하늘로 소환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담당하던 인간의 생이 끝날 때까지 보는 것. 여기까지는 다른 중죄에 벌과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선에게는 나머지를 책임질 악마가 없다는 것.
“하지만 지선에게는 저 말고는 없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내 대답이 예상했던 답변인지 이번엔 악마가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이 인간에게는 새로운 천사와 악마가 붙을 것입니다.”
예상에서 빗나간 그의 대답에 난 순간 멍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었다.
“하지만 한 인간에게 배정받는 악마와 천사는 한 명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지.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야.”
“아버지가 세상을 창조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니 우리도 처음으로 하는 일로 이 일을 마무리해야겠죠?”
천사와 악마는 준비한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딱딱 맞게 내 물음에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천사 둘이 보였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예. 지금 당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나와 있는 것이고요”
“적어도 인사할 시간은 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떠난다면 난 지선과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이 확실했다. 적어도 인사는 하고 싶었다.
“지선이가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인간이 알아서 이겨낼 거야.”
“네... 그렇기 때문에 천사와 악마 둘 다 새로 파견 되는 것입니다.”
악마와 천사는 다시 한 번 준비한 대사를 말하든 맞춰서 말했다.
“그렇지만!”
“순 씨는 지금 죄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당신을 벌하러 온 것이고요.”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갈 수 밖에 없어.”
내 반응이 그들의 화를 돋게 했는지 나를 한 없이 작게 느껴지게 하는 기로 나를 압박해 왔다.
나는 그렇게 지선과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끌려가게 되었다.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걸...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지선은 나에게 있어서 담당하는 인간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 한 번만 더 얘기를 나누고 싶다. 더 보고 싶다. 그 생각이 내 몸을 학교 안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내 행동에 짜증을 느끼던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막았고 언제 왔는지 그 들의 뒤에 있던 천사 둘이 날 붙잡더니 그곳으로부터 떠나버렸다.
난 그렇게 그녀와 헤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