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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나엘
작가 : 레이나비
작품등록일 : 201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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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작성일 : 17-07-02     조회 : 389     추천 : 0     분량 : 5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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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복을 입고 다녔던 10대,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다니는 언니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저렇게 예뻐질 거야. 20대의 나는 연예소설처럼 예쁜 사랑을 할 거야.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살거야. 뭐 흔한 여고생들이 하는 생각들 아닌가? 내가 좀 로맨틱한 문학소녀 이었더랬다. 그렇게 기대했던 나의 20대는 연예소설 같은 사랑은커녕, 짧았던 두 번의 실없는 연애를 하고, 드라마 주인공은커녕 바쁘게 쫓기는 것처럼 사느라 내 인생의 주인공도 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동료들과 신나게 상사를 씹어댈 때,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다닐 때, 아, 이 정도면 평타는 치면서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결혼연령이 낮아지는 추세라더니 내 주변은 왜 이렇게 결혼을 빨리 하는 걸까.

  나이를 먹을수록 다가오는 명절이 점점 두려워진다.

 

  기어이 오늘, 몰려다녔던 친구들 중 마지막 친구가 결혼하고 나 혼자 남겨졌다. 이제 같이 술 마시며 커플은 다 망해버리라며 같이 울어줄 친구가 없어져버렸다.

  아아, 배신자여. 서른까지 결혼 못하면 우리 둘이 평생 같이 살자 할 땐 언제고, 앞자리 숫자 가 바뀌자마자 결혼이라니. 속도위반이란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둘은 꽤 행복해보였다. 사실은 계획적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녀가 던져주는 부케를 받았다. 잘 말려서 태워줘야겠다. 행복해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SNS를 뒤져 요즘 인기 있다는 빵집을 들러 인기 넘버원이라고 적혀있는 빵을 몇 개 골라 담았다.

  아직도 나는 가끔 유치한 생각을 한다. 이렇게 빵집에 들러 빵을 고르다가 갑자기 운명처럼 하나 남음 빵을 동시에 잡는 남자가 나타난다고, 그러다 서로 ‘가져가세요.’라며 양보를 하다가 눈이 맞는다는 그런 인터넷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순진한 상상,

  매우 당연하게도 계산하는 순간까지 그런 일은 없었고, 카드를 긁고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날씨가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근래에 들어 이런 날이 얼마만이지.

 드라이브라도 나가면 딱 좋겠는데, 운전면허증은 있지만 차는 없다. 장롱면허증이 된지 오래다. 앞으로 언제쯤 차를 마련할 수 있을 런지 과연 나조차 의문이고, 이제 와서 운전하는 방법 같은 거 잊은 지 오래다.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잠시 고민하다 지하철을 선택했다.

 아껴야지. 근검절약 ~ 근검절약~.

  월급은 들어오는 데로 나가기 바쁘다. 거기다 이번엔 축의금까지 나갔으니 더 아껴야한다. 문득 인터넷에서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

 

  부모님은 우릴 어떻게 키웠나 몰라, 혼자 벌어 혼자 먹고 살기도 세상살이가 이렇게 버거운데 말이지. 새삼 다시 한 번 존경합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실로 직행했다. 얼굴을 덮고 있는 화장이 답답하다. 거기다 내 게으른 성격상 바로 씻지 않으면 그대로 잘게 분명하다.

 

  얼굴에 크림도 바르기 귀찮아서 대충 스킨만 바르고 마스크 팩을 올린 채 침대위로 그대로 다이빙 했다. 주말이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도 없고, 다시 밖에 나갈 생각 따위 더더욱 없다.

  체력이 모자라다 체력이. 작년까진 안 이랬던 것 같은데, 과연 서른이 주는 정신적 타격이 엄청난 건지 괜히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제 한해 한해가 정말 다르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구나. 곧 하루하루가 다르단 말을 하겠지. 나중엔 일초일초가 다르다고 하지 않을까.

 

  조용한 방안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별 쓸데없는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서른이 된 나는 10대가 상상했던 20대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상상했던 서른의 모습은 아니었다. 스물은 예쁜 어른인 줄 알았다. 서른은 멋진 어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난 예쁜 어른도, 멋진 어른도 되지 못했다.

  내 서른은 약간의 우울과 두통과도 같았다.

 

 내 마흔은 어떨까. 그래도 결혼은 하지 않았을까. 맞선이든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든 뭐든. 애는 잘 모르겠다. 노산은 힘들다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으음, 사실 서른과 달리 마흔은 쉽게 상상이 안 간다. TV 프로그램 마냥 미리보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심정으로는 유료결재를 해서라도 볼 텐데.

 

 방구석에 놓아둔 거울에 졸린 얼굴의 내 모습을 보았다.

 아, 지금 자면 안 되는데, 10분 뒤에 마스크 팩 떼야 하는데,

 모르겠다. 내 잠버릇이 좋은 것도 아니니 얼마 못 버티고 스스로 떨어지겠지.

 눈을 감아 버렸다.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

 

 “이즈나엘”

 

  아, 머리야. 다시금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온다. 저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마스크 팩도 떼지 못하고 잠든 내가 깼을 땐, 내 방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그것도 내 모습이 아닌 다른 여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출연자격을 갖출 만큼 어이없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나이 서른에 차원이동이라니.

 

  이것은 언젠가 보았던 영화처럼 깨도, 깨도 깨지 않는 꿈이었다. 그저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이 지금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증명 하고 있을 뿐. 나는 그동안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따지고 말해보자면 그 차원이동이라는 판타지 설정의 주인공들은 보통 젊고 정의감 넘치는 10대나 패기 넘치는 20대에나 가능한 거 아니었던가. 왜 나일까. 난 이제 빈말로도 젊다고 불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말이다. 이건 나이부터가 후보탈락이었다.

  이런 자극적인 일에는 이제 우황청심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셀레스트레아 국 프릴리온 대신전 중환자보호실.

 

  내가 머무는 곳의 이름을 다시 상기시켜도 낯설기만 하다.

 차라리 깨어난 곳이 모 정신병동의 중환자 보호실 이었다면 기분은 나빠도 그쪽이 더 현실감 있다.

 

 “나는 이즈나엘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을 내게 알려줘.”

 

 아, 젠장.

 속으로 낮게 욕 짓거리를 읊었다. 매번 그와 나의 대화는 이게 문제였다. 대체 왜 내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거지, 모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대체 그 여자애는 어떻게 자기 이름을 찾았더라.

 

  이 현실을 마냥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억울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속편하게 인정하게 되면 서른을 채 전부 보내기도 전에, 마흔을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다 애가 셋인 유부녀로.

 

  이건 내 쪽에서 충분히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일이다. 차라리 어려진다거나, 다시 태어났으면 인생을 새로 쓸 수라도 있지 10년을 그대로 스킵 해 버리다니 서른도 억울한데 마흔이라니. 나이도 더 들고, 수명 마저 줄어든 거 아닌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 신이라면 그 멱살이라도 잡아 내 열 살을 돌려달라고 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한테 나이가 얼마나 소중한 건데! 마냥 착하고 순진하게 살아왔다고 말은 못하지만 그래도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악질적인 일을 한 건 아니다.

 

  한 가지 더 웃긴 건 이 몸의 주인도 사실은 서른에 쓰러져 10년 동안 의식불명의 상태로 신전에서 보호 중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몸에 들어온 내게 10년의 공백이 있듯, 진짜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도 나와 같은 공백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전혀 접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몸의 주인과의 공통점 비슷한 걸 찾았다. 그렇다고 상품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당신 아내 인 척하고 당신을 잡아먹으러 온 거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는 팔짱을 끼고 삐뚜름하게 물었다.

 

 “나를 잡으러 온 게 당신이라면 기꺼이 당신에게 먹히도록 하지.”

 

  대화가 도무지 이루어지질 않는다. 하긴 내 질문도 정상적인 건 아니었지.

 아내바라기인 이 남자를 대체 무슨 수로 납득시켜야 좋을까. 그것도 지금 내가 그가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내가 깨어난 이후로 매일 나를 ‘이즈나엘’이라 부르며 찾아오는 에일이란 남자는 이 몸 주인의 남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얼마나 절절한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이런 말 하면 실례지만 저런 눈으로 날 바라볼 때는 거대한 골드리트리버라도 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뭔가 내가 이즈나엘이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못할 짓 하는 기분이랄까.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거기다 심각하게 내 취향의 남자. 순도 높은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밝은 톤의 금발에 숲의 싱그러움을 연상시키는 옅은 녹안. 뚜렷한 이목구비와 넓은 어깨, 큰 키. 차원이동 보다 더한 판타지가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연인 보듯 날 본다는 거다. 저런 심장이 간지러워져 오는 시선.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다. 물론 이 사람이 보는 건 내가 아니라 자신의 부인을 보는 거겠지만. 내가 살다 살다 사십대 아저씨한테 설레다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그렇지만 정말 동안인 걸. 내가 아는 사십대 남자가 본다면 반칙이라며 레드카드를 날릴 정도의 모습이다.

 

  나에겐 지금의 내 상태를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뭔가가 엄청나게 필요했다.

 이 여자의 모습을 한 내가 사실은 진짜 이즈나엘이었다던가 혹은 내 전생이 이즈나엘 이었다던가 하는 그런 이유.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 모습을 이렇게나 절절하게 바라보는 그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위의 이유로 내가 나를 속여 넘기기에는 내 이름을 제외하고 남은 기억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려 21세기 문명에서 살아온 나는 여기 있는 내내 핸드폰이 그리워 죽겠으니까. SNS에 업데이트하고 싶다.

 

 #판타지월드 #열 살 더 먹음 #엄청난 중년미남과 함께 #유부녀가 되었다

 

  솔직히 그가 날 저런 눈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기억상실’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이용하여 진즉에 판타지라이프를 즐길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하지만 내게 당신 부인을 강요하진 말아주세요. 제가 아직 그 자리가 낯설어서 말이죠. 그렇다면 저도 이즈나엘이란 이름으로 당신 곁에 있을게요.”

 

 ‘부인’이라는 자리를 피하는 것은 그와 내게 두는 거리다.

 내게, 그에게, 이 몸의 주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언젠가 이 몸의 주인이 나를 찾아와 돌려 달라 말한다면 나는 두 말없이 내어 주어야만 한다. 본의는 아니지만 일종의 나는 세입자라고 할까. 영혼의 어려운 개념은 잘 모르지만 내가 그녀의 몸에 이유모를 원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그녀도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몸을 찾아 돌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만 이 세계를 즐겨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조금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딱 그 때까지만. 그녀가 돌아오는 날 까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당장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여기서 잠시 동안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반드시 지금 당장’ 돌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만약 이쪽이 꿈이고 누군가 진짜 내 몸을 흔들어 깨운다면 나는 또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악몽이었다. 그 쪽이 원래 살던 동네니까 ‘절대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누가 방법을 제시해 온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인생에는 세 번의 터닝 포인트가 온다고 누가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을 내 인생 첫 ‘터닝 포인트’라고 여겨도 좋지 않은가.

 

 “알았어. 이즈나엘.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거래성립이다. 아무튼 이즈나엘 이 여자는 복도 많은 여자다. 마흔이라고 보기엔 엄청난 동안에 끝장나게 미인인데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슈퍼 잘생긴 남편이 있다니. 무슨 이윤지 몰라도 쓰러졌을 때 엄청나게 억울하지 않았을까.

  이봐요. 이즈나엘 씨. 지금 어디를 방황하고 있는지 몰라도 얼른 돌아와요. 이대로라면 당신 남편 너무 위험하게 내 취향이라 나도 반할지도 모르니까. 나 나쁜 여자 만들지 말고 서둘러 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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