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특히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야, 유진. 비 온다.”
“나도 안다.”
“나중에 우리 엄마 오면 같이 가자.”
판은 정육점을 하는 주디스 부인의 아들로 다소 통통한 체격이 특징인 아이였다. 판의 옆에 서면 유진은 딱 그의 절반정도로 보였다.
“나도 이제 우리엄마 있거든”
“맞다. 너희 엄마 일어났다고 했지”
유진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동안 티는 안냈지만 유진은 엄마의 부재에 대해 나름의 열등감이 있었다. 아빠는 다정하고, 삼촌도 잘해줬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애정을 받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에 다른 아이들을 마중 오는 엄마를 보면 그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그나마 가끔 형이나 아빠가 데리러 오는 날에는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이엘 형이 데리러 오는 게 좋던데”
“둘째 형이 오는 게, 네가 왜 좋냐”
“예쁘잖아. 난 이엘 형보다 예쁜 여자를 본적이 없어.”
유진은 확실히 그 말에 공감했다. 치마를 입고 다니는 이상한 취미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지간한 여자보다 더 잘 어울리니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가끔은 누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엘이 학교에 데리러 오는 날이면 학교 학생들부터 선생님들까지 그 시선이 집중되어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차라리 비 맞고 가겠다고 했었다.
교문 앞으로 오는 엄마들이 하나 둘 나타나 아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유진의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비가 온다. 어쩌면 엄마도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타날 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 왔다. 진짜 너 여기 있을 거야?”
“어, 빨리 가라”
손을 휙휙 내저으며 얼른 가라며 신호했다.
데리러 온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제대로 대화도 못해봤지만, 그래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됐다. 이제 친구와 친구엄마의 우산을 쓰고 돌아가지 않아도, 혼자서 비 맞고 집까지 뛰어가지 않아도, 나를 데리러 와 줄 엄마가 있었다.
대체 엄마랑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형들은 엄청 잘 하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판에게도 ‘너는 엄마랑 보통 무슨 이야길 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맨날 공부하라고 하고, 형이랑 싸우면 형편만 든다고 불평만 늘어놓아서 별 도움은 안됐다. 엄마와의 기억은 하나도 없다. 형들에게 물어보니 좋은 사람 인 것 같았지만 그건 형들과 엄마의 추억이었고, 나와의 것은 아니었다.
유진에게 지금 엄마는 난생처음 가져보는 존재인 것이었다.
오늘도 당근을 몰래 버리려는 걸 들켜서 그녀에게 또 남겼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치만 당근은 맛없는 걸. 토끼나 먹는 걸 왜 먹어야 하는 거야. 아빠도 삼촌도 그동안 아무 말도 안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아이 마저 옆을 떠났을 때, 유진은 혹시나 엄마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할까봐 자리에 서서 서성거렸다.
‘...그냥 갈까.’
비는 전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지 않을 지도 몰라. 엄마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서 몸이 약하니까 못 오는 거야. 어쩌면 낮잠을 자고 있어서 비가 오는 줄 모를 수도 있어.
아니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대는 점점 불안으로 바뀌었다.
내가 싫은 건지도 몰라, 그동안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나를 미워할 수도 있어. 매일 당근도 남기고, 오늘도 그렇게 피해버려서.
하지만 엄마도 나를 보면 항상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걸. 형들이랑은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오늘도 형들만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는 안 해줬잖아.
큰 형은 똑똑하니까, 작은 형은 검을 잘 쓰니까, 나는 아무 것도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 오늘 쪽지시험도 완전 망했는걸. 그치만 아무리 해도 모르겠단 말이야. 대체 그런 건 배워서 어디다 써먹는지 몰라. 그냥 우리말만 읽고 쓸 줄만 알아도 사는 덴 아무 지장 없을 거 같은데.
가만히 물웅덩이 위로 번지는 파문이 몇 번이나 번지는 지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유진의 발이 앞을 향해 나섰다. 얼굴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신발이 파문을 그리던 물웅덩이 위를 밟았다.
‘그래, 이정도 비쯤이야.’
그리고 한 번 더 내딛는 한 걸음. 또 한걸음. 괜찮았다. 그냥 익숙한 날이 다시 반복되는 것 뿐 이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비오는 날 따위 여전히 최악이다.
“유진!”
이즈나엘이 우산을 들고 유진의 앞으로 달려왔다. 방향감각도 없었을 뿐더러 지리를 몰라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른다. 광장에서부터 길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잘못 들었던 것이었다. 인적이 없어서 물어볼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뒤늦게 사람을 만나 학교 가는 길을 물어 급한 마음에 달려오느라 우산 쓴 보람도 없이 옷과 머리가 이미 비에 젖어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유진의 머리 위로 우산을 덮었다. 비는 더 이상 그 아이를 적시지 못했다.
순간 유진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내가 바보라서 그녀가 안 좋아하는 거야. 큰형처럼 공부도 못하고 작은 형처럼 검도 못쓰고. 오늘 시험도 망해버려서.
“왜 온 거에요?”
“그야, 비가 오니까. 우산 안 가져갔잖아.”
이즈나엘이 유진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필요 없어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척 하지 마요! 엄마 따위 없어도 이제까지 잘 지냈는 걸!”
크게 소리치고 그대로 달려갔다.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달렸다.
바닥에 내팽겨 쳐진 우산이 저 혼자 데구르르 굴렀다.
**
바닥을 뒹구는 우산을 들어 접어버렸다.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는 비가 머리를 축축하게 적셔 얼굴에 들러붙었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구나.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유진에게 우산을 전해달라고 맡기고 돌아올걸. 그럼 유진이 비를 맞을 일은 없었을 텐데.
‘필요 없어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척 하지 마요’
‘엄마 따위 없어도 이제까지 잘 지냈는걸.’
그런 척.... 인가.
피부에 닿는 비가 칼에 베이는 것 마냥 아프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내 모습 엄청 못생겼겠지. 치맛단은 흙탕물에 버려 지저분하고, 머리는 산발에, 화장도 안하고 나왔네. 뉴스에서 보니까 애들이 이런 엄마 모습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유진이 걸어간 방향을 한참 보다가 내가 걸어왔던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천천히 가고 싶었다.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뭔가가 목에 걸린 것 같다.
**
‘유진도 그렇고, 형수님도 엄청난 모습이로군요.’
도련님이 나를 보고 한 첫 마디였다. 괜히 멋쩍어서 ‘하하’웃어 보이며 한 쪽 구석에 우산을 세워 두었다. 몸이 무겁다. 다행히 유진은 집으로 들어오긴 했나보다. 만약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게 더 큰일이었을 것이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아 그대로 머리끝까지 잠수해 들어갔다.
아이를 좋아하는 것과 키운다는 건 전혀 다른 거였어. 이즈나엘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진짜 엄마인 당신은 유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을까.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하는 건 위선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버겁다. 왜, 이 세계에 넘어 온 게 나 일까. 나보다 좀 더 이 역할에 맞는 사람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숨이 막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즈음에 물 위로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욕조 밖으로 물이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