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드 왕국 그들은 자신의 무예 실력을 최고의 긍지로 삼고 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트럼프 월드의 최고의 힘의 상징이며 단연 트럼프가 내린 최고의 신력을 뽐냈다. 그에 걸맞게 100년에 한 번씩 열리는 트럼프 대전에서의 승리의 왕관은 스페이드 제국의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세기를 지나, 100회를 맞는 트럼프 대전을 앞둔 스페이드 왕국의 분위기는 실로 표현할 수 없는 짙은 어둠에 사로잡혀있었다.
"신관, 엘린이 올해로 스물넷이 맞던가."
조금은 탁한 은회색머리칼을 가진 노령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글하게 잡힌 눈갓주름은 그의 이미지를 조금은 선하게 보여줄지 모르나 그 눈 밑으로는 스페이드 제국 최고의 권위 SPADE.K (스페이드.킹) 표식이 자리잡고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가지는 기호 표식이 아닌 상위 랭커들많이 가질 수 있는 문자 표식. 그중에서도 당연 최고라 여기는 스페이드의 군주가 여기있었다.
"왕녀를 진정 트럼프 대전에 참전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한쪽 면이 날카로운 두 개의 금색 비녀로 고정된 연보랏빛 긴 머리칼, 금장이 둘러진 하얀 예복. 스페이드 제국의 신관인 에스더는 한껏 걱정을 머금은 얼굴로 킹을 바라보았다. 신관을 표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다는것을 킹은 이미 알고있었다.
"만약 그리한다면 데스가 함께하겠지."
"킹, 스페이드 에이스가 함께한다고 해서 왕녀의 목숨이 보장되진 않습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왕녀는 트럼프의 가호를 받지 못해 신력이 없을 뿐더러 세계 모두가 가지고 있는 표식마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왕녀께서 세계에 노출되신다면 지금 이 불안정한 트럼프 월드의 모든 책임을 저희 스페이드 제국이 떠안고 가야하셔야 한다는 것을 잊으신 겁니까!"
다소 높아진 신관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매웠다. 킹은 자신의 오른 눈밑에 자리한 표식을 무심하게 매만지며 실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오늘도 세계에 지반이 크게 요동쳤다고 들었소. 이것이 자연의 횡포인지 정말 세계의 균형이 깨져서 인지는 그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도 없는 것이오. 엘린이 신력도 표식도 없다는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세계에 퍼져있는 사실을 신관도 알터, 그렇다면 세계의 칼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알겠군. "
사뭇 격양된 킹의 목소리는 점점 고조되었다. 그의 기분을 나타내는 연푸른색의 오라가 그의 몸에서 새어나왔다. 신관은 그에게서 새어나오는 신력에 몸을 떨며 응접실 바닥만을 바라보며 목울대를 삼켰다.
"바로 우리 스페이드 제국이오!!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세 제국의 랭커들이 대거 신수를 모으고 있다고 하더군, 나는 이번 대전으로 스페이드 제국의 위엄을 다시 한 번 선보일 것이오. 그들에게는 이 트럼프월드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테지-“
***
쾅-
맞받아쳤을 뿐인데도 발한켠이 밀려 땅이 움푹 파였다. 엘린은 다시한번 검을 고쳐잡았다. 하얀 백색의 피부, 거추장스럽다는 듯 질끈 묶어올린 등을 지나는 금백색의 머리, 작은 얼굴에 박힌 금색의 눈동자는 누가 봐도 그가 귀족집 영애이상의 신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볍고 편하게 움직이게 위해 입은 몸이 드러나는 의복과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긴 검은 다시한번 그녀의 신분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정도 검기에 밀리신다면 트럼프 대전은 체념하시는 게 좋습니다."
군청색의 헝클어진 머리, 스페이드 제국을 표하는 금색단추가 박힌 검은 제복, 검푸른 도포를 두른 넓은 어깨 아래로는 그간 수없이 행해온 수행을 증명하듯 단단한 몸이 자리잡고 있었다.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지만 경계하지도 않는 그 무심한 눈동자는 깊은 심해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였다.
"봐주지 말고, 덤벼"
엘린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남자는 다시 한 번 칼을 높게 들었다. 살짝 걷힌 소매 밑 살결에 손목을 따라 새겨진 문자 표식 스페이드 에이스(SPADE.A) 이름은 데스.로렌트. 스페이드 제국뿐 아니라 대 트럼프 월드에 숨쉬고 있는 그 누군가라면 한번씩은 다 들어볼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오직 신력으로만 봤을때 최고의 랭커라 불리는 각 제국의 ACE 랭커들중 단연 으뜸이라 불리는 스페이드 에이스였다. 제국의 아이들은 장래 그 처럼 강한 기사가 되길 원했고 귀족 영애들은 연회가 열리면 어떻게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한껏 멋 부리기를 반복했다.
엘린의 장검과 데스의 검이 부딪혀 만들어낸 검기가 드넓은 초원을 휩쓸었다. 신력도 표식도 없는 자신을 스페이드의 왕녀라 증명이라도 하고 싶어서였을까 유년 시절부터 갈고닦은 무예실력만큼은 이미 제국의 어지간한 기사들만큼은 가볍게 누를 수 있었다. 데스의 검을 막아낸 엘린의 눈에 작은 웃음이 올라왔다.
"아직 한참이십니다."
쾅
데스의 검을 막아냈다고 자부한지 일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검에서 퍼져나온 신력에 사정없이 튕겨져 나갔다. 세차게 튕겨져 나간 몸뚱이는 3미터가량의 초원을 쓸어버리고서야 멈출수 있었다. 힘없이 날아간 두 장검은 패배를 인정하듯 푹 소리와 함께 땅 속에 나란히 꽂혀버렸다.
엘린은 밀려오는 패배감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려버렸다. 데스가 전력을 다해 자신과 싸워주지 않는다는 것은 늘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조금밖에 방출되지 않은 신력에도 나가떨어지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원망. 자신은 왜 신력을 받지 못한것인가. 제국 백성들 조차 가진 저 흔한 스페이드 표식마저 받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고도 원망스러웠다.
"본궁으로 모시겠습니다."
데스는 까만 도포 사이로 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는 거죠. 데스"
엘린은 데스 의 손을 밀어내곤 혼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투로 엉망이된 머리를 풀어헤쳤다. 질끈 묶여있던 끈이 떨어져나가자 윤기 넘치는 금백색의 머리가 어깨를 지나 허리께까지 타고 흘러내렸다. 허공에 놓인 갈길잃은 자신의 손을 아무말없이 거둔 데스는 무심하게 엘린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을 줄이나 알았다는 듯이 엘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제쳐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아름다운 금빛 여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데스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엘린의 뒷모습이 저만치 멀어질 때쯤에서야 데스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심을 다해 상대한다면 제가 어찌 당신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검푸른 기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
스페이드,다이아,하트,크로버 네 개의 제국의로 형성된 트럼프 월드는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이 태어난 제국의 표식이 몸에 새겨진다. 보통의 백성들은 눈 밑에 새겨지는게 당연한 것이지만 2부터 10가지의 넘버 랭커들과 J(잭),Q(퀸),K(킹) 그리고 A(에이스) 고상위랭커들은 가지고 있는 계급과 신력의 흐름에 따라 몸어딘가에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계급을 가진 랭커들과 그의 일가족들은 각 제국의 귀족으로 칭해졌고 킹과 퀸을 제외한 랭커들은 각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로 통했다.
그리고 어느 날 넓은 성안을 가득매우는 여자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세계의 이변이 시작되었다. 스페이드제국의 첫 왕녀가 태어나는 경사스런 날 이였으나 그것이 곧 스페이드 제국의 큰 오점이 되어버릴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랭커의 표식은 커녕 자신의 태생을 증명하는 제국의 표식마저 지니지 않은 기이한 몸으로 태어났을 뿐더러, 트럼프의 가호또한 받지못해 왕가에 전해지는 신력조차 지니지 않은 왕녀. 그것이 바로 엘린 패러크. 자신이였다.
엘린은 혼잡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따뜻한 물속으로 몸을 깊숙이 담구었다. 미끈하게 반짝이는 대리석 욕조안으로 찰랑하고 물결이 흔들렸다. 물에 젖지 않기 위해 들어올린 금발의 머리 아래 목선을 따라 그 언젠가 다친 작은 흉터 자국이 선홍색 빛을 내보였다.
엘린은 희고 길게 뻗은 자신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턱 끝으로 차오른 물에 들어와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노을빛이 오늘따라 조금 따가웠던 엘린은 눈을 감고 낮의 대련을 떠올렸다. 데스에게 차갑게 말을 던지고 오긴 했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을 자신 또한 알고있었다. 데스가 진심을 다해서 자신을 상대하는 날은 자신이 죽게되는 날이란것을 말이다.
"으,"
상념에 잠긴 엘린의 눈 사이로 번쩍이는 빛이 스며 들어왔다.
"뭐지, 이건"
엘린이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투명했던 물색이 우주를 담은 것 같은 오모한 선분홍색의 반짝이는 물이 되어 출렁이고 있었다. 신력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신력이 아닌 그 무엇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엘린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
그 순간 알수 없는 강한 힘이 엘린의 발목을 움켜쥐고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단발의 비명과 함께 엘린은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분명 자신과 비슷한 성인 두세 명 정도가 들어갈만한 크기의 욕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은 끝을 알수 없는 무형의 형태와 같았다. 물 속이 분명함에도 숨을 쉴 수 있었고 나신의 몸으로도 아무것도 느낄수 없는 공간이였다. 엘린이 놓았던 정신을 다잡을 무렵 엘린의 앞으로 까만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사람이었다. 까만 흑색의 머리칼 아래로 자리한 하얀 얼굴에는 그 어느 제국을 표하는 표식도 없었다. 더군다나 낯선 이방인의 옷차림 허리께는 상처를 입은 것인지 혈흔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엘린은 조금 더 그 자를 가까이 보기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평민이라면 눈밑의 표식이 있어야 하지만 있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스페이드 제국의 랭커를 자신이 모를리 만무 했다. 그렇다면 첩자?
그렇게 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린은 반사적 경계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무렵 미동도 없던 남자의 눈이 번쩍이며 엘린의 금색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 흑색의 눈동자가 초점을 다잡기 시작하자 잠잠하던 물살이 휘몰아치며 엘린은 떠밀리듯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엘린은 물에 젖어 뒤엉킨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리석 난간을 잡고 숨을 토해냈다.
"푸하, 하 , 흡,"
시원한 공기를 마주하자마자 밀려오듯 올라오는 구역질에 물을 토해내던 엘린은 맞은편, 자신과 같이 난간을 힘없이 붙잡은 채 간신히 물을 뱉어내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물속에서 본 바로 그 남자였다. 엘린은 자신이 나신인 것도 잊은 채 검을 찾기 위해 몸을 번쩍 일으켰다.
남자의 부상으로 인해 새빨간 선혈이 물과 함께 섞여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잃어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훤히 드러난 하얗고 풍만한 엘린의 젖가슴을 바라보며.
"여기가 바로 천국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