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을 사랑한 남자
제 30 화. 사랑은 마음 가는대로
워크숍이 있기 며칠 전.
기획팀 팀장은 워크숍 예산을 결재 받기 위해 사장실로 올라왔다.
그녀는 지원에게서 파일을 되돌려 받고 몸을 돌려 사장실을 나가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네. 무슨 할 말이라도..?"
"보고 드렸다시피, 이 달에 저희 팀 워크숍 갑니다. 주말에 가는 거라서.. 괜찮으시다면 사장님도 오셨으면 합니다."
지원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기획팀.. 워크숍... 세희 씨도 가겠지.
K 그룹은 모든 팀들의 워크숍을 토요일과 일요일. 1박 2일 동안 다녀오는 대신에 월요일은 무조건 쉬는 날로 정해두었다. 한 번도 직원들의 워크숍에 따라나서지 않은 그였지만.
세희 씨도 보고 조금 쉴 겸해서 가볼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죠."
그는 수첩에 워크숍 일정에 관한 사항들을 간단히 메모해 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워크숍에 간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
그랬는데!
지원이 재희로부터 세희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은 그는 워크숍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제 마음을 인정하면 뭐가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감정 표현에 서툴 뿐만 아니라 사랑 역시 그가 뜻하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이 마음을 그녀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했는데, 사랑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사랑이, 그리고 인생이. 뜻하는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그답지 않게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걸림돌이 사라졌다. 그는 남들처럼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 볼 생각이다. 눈치만 보는 행동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수첩을 뒤져 직원들이 머무를 별장을 확인했다.
강원도.
우연인지. 강원도는 그가 제일 아끼는 장소였다. 세희에게 자신만이 아는 비밀 장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워야 했다. 철저하게,
회사 팀원들과 같이 가는 곳이라서 어느 누구도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숙소에서 빼오려면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직원들을 적당히 놀게 하다 빠른 시간 내에 잠재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술!
기획팀 직원들은 술 잘 먹는 사람들만 뽑아왔는지 회사에서 몇 안 되는 술꾼으로 유명했다. 본인이 꼭 전쟁터에서 적군들을 잠재워 아군들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역사속 인물처럼 느껴졌다.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서렸다.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회사 일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되도록이면 많이 계산해둔다. 철저한 준비 만이 사업가인 그가 살 길이니까. 예상하지 못한 번외 경기가 생기면 꽤 난감하거든.
그는 다음으로, 술 맛을 더 북돋아 줄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도진이 전에 지나가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놀러가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실 때는 게임을 한다던데.
타닥.
인터넷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술 게임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는 딱 몇 가지 정도면 충분했다.
아, 한 가지만 있어도 되려나?
어차피 그가 준비해 갈 술은 값도 값이지만, 도수도 높아서 금방 끝날테니까.
그는 몰랐다.
자신이 판 덫에 본인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
워크숍 전날.
세희는 내일 있을 워크숍에 가기 위해 짐을 싸며 엄마와 통화 중이었다.
"응, 엄마. 내일부터 모레까지. 1박 2일 동안. 강원도에서."
「 짐은 다 쌌어? 」
"안 그래도, 지금 준비해둔 것들 싸고 있어."
「 술 주면 적당히 마셔. 너 술 먹으면 안 되는 거 알지? 」
그러고보니, 세희는 워크숍에서 술을 권유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 앞에서가 아니면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잘못 먹었다가는...
그 생각을 햬 절로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금 떠오른 것을 시은에게 물었다.
"아, 엄마. 아빠한테 우리 집 주소 가르쳐줬어?"
수화기 너머로 시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 아직. 네 아빠가 자기한테는 말 한 마디도 없이 너 독립시켰다고. 언제 너희 집 주소 가르쳐줄 거냐고 툴툴거리는데. 어우~ 말도 마, 얘. 그럴 때는 영락없이 애 같다니까? 내가 남자랑 사는지, 다 큰 아들이랑 사는지 모르겠다. 」
세희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시은을 못 살게 굴었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소개팅이며 미팅이며 절대 안 된다며 고집을 피우던 성환을 못 봐주겠는지. 시은이 연애시절 내세웠던 주특기로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었다.
결과는, 당연히. 세희가 대학생활을 할 동안 소개팅이나 미팅을 한 번도 못해봤다는 것이지만.
성환의 딸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고집은 아무리 연애시절에 그를 쥐락펴락 했던 시은의 애교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희의 부모님은 그녀의 딸을 사이에 두고 칼로 물 배기 겪의 사랑 싸움을 치루고 계시는 중이다.
하여간, 우리 부모님을 누가 말려. 연애시절에도 둘이 좋아 죽었던 부부는 늙어서도 핑크빛 기류 형성에 문제가 없었다.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도 아직은 싫어. 나온 지 얼마됐다고.
「 그러니까, 딸? 」
"응?"
의미심장하게 제 목소리를 부르는 시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 아빠는 내가 최대한 막아볼게. 대신, 넌 얼른 남자부터 만나 봐.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헐. 엄마는 무조건 내 편이라더니.
"엄마!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디 있어?"
「 어머, 그럼 넌 내가 그냥 내보내 준 거 같아? 자유도 좋지만, 연애도 해봐야지. 아빠가 감시도 안 하는데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려고? 그렇다고 집에 아무 생각 없이 남자 들이면 엄마가 언제 너네 집에 가볼지 모른다? 」
***
드디어 D-day.
워크숍 당일.
세희는 팀장이 미리 얘기해 준 대로, 회사 정문으로 갔다. 그곳에서 직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갈 예정이었다.
그녀도 일찍 출발한 편이었는데, 다른 직원들은 벌써 와 있었다.
"세희 씨, 왔어?"
미영이 그녀를 먼저 발견하고 다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늦었나봐요. 다들 저보다 먼저 나와계시고..."
그런 그들의 뒤에서 팀장이 세희의 어깨에 턱하고 손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아니야. 세희 씨도 알잖아. 우리 팀 식구들 부지런한 거."
팀장이 그녀를 쳐다본 뒤 주변에 있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세희 씨 왔으니까 이제 우리, 버스로 갈까요?"
버스에 오르려는 세희를 팀장이 붙잡았다.
"세희 씨, 어디 앉을 거예요?"
"네? 아무데나 앉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세희가 버스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당연한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팀장을 내려다보자, 팀장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렸다.
"아니죠. 세희 씨는 재희 씨 옆에 앉아야죠."
- 세희 도착 30분 전.
직원들이 세희보다 먼저 온 이유가 있었다. 팀내 여자 직원 몇몇이 재희와 세희를 이어주고 싶은 마음에 버스 좌석 배치 문제로 팀원들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세희 씨는 재희 씨 옆에 앉히는게 좋겠죠?"
"두 말하면 잔소리지! 아직 둘이 진도 나간게 없는 것 같던데. 이번 기회에 좀 더 자주 붙어있으면 뭔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직원들은 서로 수긍하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서는 저 멀리 있는 팀장에게 다가가 그녀를 꼬드겼다.
"팀장니이임~ 팀장님이 좀 도와주셔야 할 게 있는데..."
"?"
팀내 애교 담당 여자 선배가 팀장의 귀에 대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이리하여, 세희는 버스 안에서 재희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들이 세희를 아끼고 재희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지나치면 도리어 독이 되는 법.
머지 않은 미래에 그들의 배려는 또 다른 형태로 빛을 보게 된다.
***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
재희는 생각에 빠져 있느라 창가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뭐라 말을 거는 세희를 신경쓰지 못했다. 강지원.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감정 표현이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앞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보기 위해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었다.
그때 그는 지원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지원의 눈빛에 여러가지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었다. 안도, 경계, 의문 등등...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 모든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사업가 강지원은 사랑에 있어서 한없이 서툴렀다. 세희를 좋아하는 것은 알겠는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건지.
아무래도, 당분간은 세희를 위한 악역을 제가 맡아야 할 듯 싶다.
그가 생각을 마무리 짓기 시작할 때.
그의 시야에 세희의 손이 아래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혹시 내가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대답이 없던 재희를 뾰루퉁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세희를 보며 재희는 생각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아닌데? 내가 너한테 비밀이라면서 안 가르쳐주는 거 봤어?"
세희야, 미안. 이번만큼은 비밀로 하게 해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때 다 얘기해줄게.
세희가 그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를 얄밉지 않게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오빠가 대답을 안 해서 예쁜 구름 지나갔잖아. 보라고 그렇게 불렀는데..."
"아, 미안. 사진도 못 찍었어?"
"아니?! 오빠 보여주려고 찍어뒀지!"
뿌듯해하며 그에게 핸드폰을 내미는 그녀를 눈에 담은 그는 사진으로 찍힌 새하얀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잘 찍었다며 한 마디 해준 뒤, 창가에 비치는 풍경을 보려다가...
창을 뚫을 기세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재희는 그 시선을 다시 한 번 마주한 뒤, 세희의 머리에 척하고 손을 올렸다.
"세희야."
"응?"
"넌 행복해져야 돼."
그의 말에, 세희가 '뭐야 갑자기'라며 실없이 푸스스 웃어준다.
그도 그녀를 따라 살짝 웃어주었다.
아까보다 창 밖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
지원은 직원들을 잠재울 술을 트렁크에 싣고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그는 한참을 달리다 차선을 바꾸었다.
지원의 차 옆으로 중형버스 한 대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버스로 끌리듯이 옮겨갔다.
"?"
지원은 재희가 세희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뭐라 하는 것을 보았다.
운전 중인데다, 고속도로를 주행 중이라 계속 그쪽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상등을 잠시 켜고 속도를 조금 낮춘뒤, 버스를 흘깃거리며 몇 번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세희와 재희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지원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을 잠식하려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재희와 웃고 떠드는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는 비상등을 해제하고 속도를 높여 가까운 휴게소로 향했다.
***
윙-
팀장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는 진동이 울렸다.
[제일 가까운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그녀는 강 사장의 문자를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인 그가 그녀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워크숍에 간다는 것까지는 이해를 했다.
하지만, 왜?
휴게소에 들린지 얼마 안 된 직원들을 왜 갑자기 막아세우시려는 걸까.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부하직원의 입장이니, 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여러분, 휴게소에서 한 번 더 쉬었다 가요."
***
세희는 재희와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휴게소에 들려 굳은 근육들을 풀어준 지 얼마되지 않았건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의아했다.
그런 그들의 뒤에서 팀장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점심시간인데 제가 충분한 시간도 안 드리고 무작정 출발했죠? 미안해요. 앞으로 1시간 동안은 자유시간 겸 점심시간입니다!"
강 사장의 지시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기 위한 팀장 나름의 핑계였다.
그녀는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왜?"
"오빠는 밥 사먹을 거야?"
"응."
세희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에이~ 뭐하러. 그러지 말고 저기 벤치에 가서 나랑 같이 먹어. 내가 도시락 싸왔거든."
"오~ 오랜만에 네가 싸준 밥을 먹어볼 기회가 생겼네? 좋아. 그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내가 마실 물이랑 간식거리 사올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재희는 빠르게 뛰다시피해서 휴게소 안에 위치한 매점으로 갔다.
세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벤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배가 밥이 고파 요동을 친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에서.
탁-
"?"
'!!!!!!'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낚아챈 뒤, 차로 데리고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