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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금꽃
작가 : 권가야
작품등록일 : 20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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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금꽃 01
작성일 : 17-07-11     조회 : 469     추천 : 0     분량 : 6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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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황금 꽃. 그것은 나의 반짝이는 금안으로부터 만들어진 두 번째 이름이었다. 사세니아 룬 로즈티아라는 첫 번째 이름보다 더 값지고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황금이라는 호칭은 대게 황족에게만 내려지는 호칭이었고 내가 그 호칭을 얻은 것은 황족이 되기 이전이었으니까. 내 노력을 대변해주는 명예롭기 그지없는 이름이니까.

 

 어머니 같이 인자한 정치와 아버지 같은 강인한 군사력으로 총 13개의 공국을 관리하던 대제국 카스릴로타니아. 그 위대한 명성은 겨우 한 두세기를 이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 수 년 전부터 서서히 공국들이 제국의 통제를 벗어난 행동들을 취하더니 급기야 제국과의 동맹을 끊으려하는 공국들도 서서히 늘어만 갔다. 추락한 강국, 이빨 빠진 드래곤. 그것이 우리 카스릴로타니아 제국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어버렸다.

 

 많은 대신들이 추락한 군사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았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게 공국들의 반발에 제 21대 황제가 골치를 앓고 있을 무렵 로즈티아 가문에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로즈티아가문은 남성향이 강한 가문으로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 중 여성은 손에 꼽았다.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는 조건에 소드 마스터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 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던 가문의 여성들은 일찌감치 가주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수업에서 들었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께서 내심 실망하셨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제국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겨우 마주한 후사가 바로 나, 여성이었기 때문에.

 

 "황후 폐하 만세! 제국의 황금 꽃에게 여신의 축복을!"

 

 "황제폐하 만세! 제국의 태양이시여!"

 

 하지만 그것은 이미 수년전의 일에 불과했다.

 

 제국의 송곳니라 불리는 로즈티아 가문의 가주이자 이 제국의 황후. 제국 제일의 기사단 ‘발키리’의 최연소 단장, 그 모든 것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공국에게 나는 무서운 황후였고 제국에게는 여신의 기적이자 인자하고 강인한 어머니. 그것이 나였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고 명예롭기만 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지난 25년의 세월동안 나를 막아 세운 고난과 역경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온갖 이유로 타박 받고 멸시받기도 했으며 나를 죽이러 온 자들에게 끔찍한 저주도 받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걸은 길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덕분에.

 

 "세느"

 

 나를 불러 세우는 밤하늘 같이 짙고 깊은 푸른 눈동자. 내가 사랑한 사람. 내 세계의 전부가 된 사람. 제국의 제 22대 황제 바엘루크 션 카스릴로.

 

 "나와 영원을 함께 해주겠어?"

 

 그래, 그때까지는 그랬다. 피와 땀으로 이뤄낸 나의 힘이, 나의 사랑이 나의 자리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세느."

 

 그런데....

 

 "사랑해"

 

 그런데 왜....

 

 "죽어줘"

 

 내가 죽어야만 하는 거지? 내가 어째서 그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거지?

 

 ".. .... ..."

 

 피가 역류하는 입술을 달싹여가며 그의 이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가 사랑해준 아름답다 속삭여준 나의 목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의 손에 쥐어진 롱소드가 내 목을 꿰뚫고 있으니까.

 

 행복을 나누며 황홀함을 느껴야할 황궁에서의 첫날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가 되었어야했을 그 밤은 배신과 나의 피가 전부였다.

 

 그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손은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칼을 쥔 손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무참히 내 목을 뚫어버렸으니까.

 

 ".. ..... ..... .."

 

 말을 하고 싶었다. 원망의 소리든 저주의 소리든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믿고 싶다고, 사랑한다는 어리석은 말이든. 그에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외침은 칼에 베어나가 그저 가쁜 숨소리가 되었다.

 

 짙고 깊은 푸른 눈만이 보인다. 아니 이제는 보이지 않아.

 

 나는 죽었다. 죽고야 말았다. 그 누구보다 제국을 위해 살아온 내가. 그 어린 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온 내가 이렇게 죽었다. 비참했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저 슬펐고 나 자신이 가엾고 불쌍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의 전부에게 배반당한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속이 갑갑하고 뜨거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하하. 이미 죽었구나.'

 

 나의 주변은 온통 나의 피로 점철되어있었다. 새빨간 색이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죽인 반역자들의 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건 분명 벌이겠죠.'

 

 벌이라고 벌일 것이라고 나를 다독이려해도 억울함도 분함도 가시지 않았다. 제국을 위해 검을 뽑아 든 것이 나의 죄라면, 나의 삶은 죄악 그 자체였단 말인가?

 

 '아니야 나는...!!!'

 

 아아. 바엘 당신은 왜 나를 죽였나요.

 

 '나는 그저 그의 곁에 서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하고 싶지 않아.

 

 '그 대가가 당신의 배신이라면...!!'

 

 나는 그저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을 뿐인데.

 

 '나는 당신과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을 텐데...'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위해....

 

 땅속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절망이 나를 덮쳐왔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왜 죽은 나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자아가 남아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을 만큼 절망에 갇혀있었다.

 

 나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하고 그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나의 삶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에 힘이 다해 지쳐갈 때 쯤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빨간색과 차가운 냉기. 하지만 어딘가 따스했다. 나는 추운 냉기에 몸을 떨며 따스한 빛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마침내 멀리 떨어진 작은 빛 한줄기를 발견했다.

 

 '내가 아직 죽은 게 아니라면 저 빛에 닿으면 살 수 있는 걸까? 여기에 남아 있으면 결국엔 이 감각도 자아도 사라지려나... 그에게 배신당한 내가 저곳에 간들 의미가 있을까. 아니, 기껏 해봐야 나를 죽인 그를 죽이고 나 역시 참수를 당하겠지...'

 

 부정적인 생각만이 들었다. 눈물을 마를 만큼 흘려보낸 뒤 그저 허무감만이 남은 듯 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까지 무너지는구나 싶었다.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내가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다니. 나를 아는 사람 모두가 비웃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눈이 번뜩였다. 가슴팍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당신에게 이유라도.. 아니, 이유 따윈 듣고 싶지 않아.'

 

 머릿속에서 한사람이 천천히 그렸다. 내가 사랑한 사람. 태양을 갈아 넣은 듯한 눈부신 백금발과 웃을 때 처지는 깊고 짙은 푸른 눈을 가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 여신의 이름 앞에 사랑을 맹세한 내가 사랑한 사람. 이제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

 

 '적어도 당신 뺨 한대라도 후려치지 못하면 눈을 못 감을 것 같으니까.'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어 작은 빛을 향해 걸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통증을 느껴도 끝까지 걸어 나갔다. 이까짓 거 기사단에 있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나아갔다. 빛은 너무나 작고 하찮아서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었지만 바엘루크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빛으로 이끌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얄궂은 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듯했다. 나는 닿지 않는 빛에 지쳐 주저 앉아 버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선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바엘 당신을...'

 

 온몸을 덮쳐오는 통증으로 인해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고 나는 더 필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외침을 세상에서 가장 처량하게 외치고 있었다.

 

 '사랑했던 만큼이나...'

 

 "증오할게."

 

 눈이 띄었다. 아니 애초에 그 새빨간 세계에서도 눈은 뜨고 있었지만, 이건 마치 꿈에서 깨어난 감각과 같았다. 높아 보이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내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생각에만 머물던 목소리가 내 귀에 닿을 만큼 커진 걸까. 아니면 꿰뚫렸던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 걸까. 두 손을 들어 올려 목 언저리를 살포시 만져보았다.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진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동이 나를 진정시키는 듯 했다.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천천히 읽으며 어디서 봤는지 생각했다. 내 몸집에 네 배는 되어 보이는 큰 침대. 고급 시트에 부드러운 이불과 베개, 그리고 황금세공이 들어간 짙은 와인색 가구들. 아, 여기는...

 

 똑똑.

 

 "사세니아 아가씨. 줄리입니다."

 

 줄리라는 이름 역시 익숙한 이름이었다. 줄리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한 시녀였다. 내가 황궁에 입궁하는 것을 보며 아주 좋아해 주었던 마음씨 고운 상냥한 나의 시녀.

 

 "어머, 벌써 일어나계시네요?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

 

 내 대답이 없자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 줄리는 땀범벅으로 눈만 뜬채 가만히 있는 나를 보며 악몽이라도 꾼 것이냐며 물어왔다.

 

 "악....몽.."

 

 악몽이라니.. 대체 무엇이? 내가 그에게 목이 관통당해 죽은 것이? 아니면 지금 줄리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래 어쩌면 이건 죽기 전의 주마등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익숙한 방은 내가 아직 ‘발키리’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 열다섯 살까지 지내던 방이었다. 방에는 크고 화려한 가구들과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세공이 아름다운 검들 그리고 예법과 정치 역사들에 관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푸근하고 그리운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아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머리가 뜨겁고 멍하고 이명까지 들리는 듯 했으니까.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려고 애써보았다. 그럼 결국 나는 그 피바다의 세계에서 나온 것인가? 그럼 이곳은 아직 내가 죽기 전의 세계인가. 나는 왜 어릴 때의 내 방에 있는 거지. 그런 나를 당연하다는 듯이 깨우러 오는 줄리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내 안색이 나빠지자 커튼을 정리하던 줄리는 내게 다가왔다. 줄리는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우리 아가씨,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으신 걸까... 열이라도 있으세요?"

 

 아까부터 느낀 위화감 중에 하나를 찾아낸 듯했다. 줄리가 나를 부르는 호칭. 줄리는 내가 황궁에 입궁하기 며칠 전부터 나를 전하라고 불렀는데 이제 와서 아가씨라니..?

 

 "줄리, 왜..."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어 줄리에게 왜 나를 아가씨라도 부르냐고 물으려 했는데 말을 흐리게 되어버렸다. 내겐 말을 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흐음.. 이마가 조금 뜨겁네요, 어제 별을 너무 늦게까지 관찰하신 것 아닌가요? 어젯밤은 조금 쌀쌀하였으니까 감기에 걸리신 것 같네요.."

 

 줄리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나의 얼굴을 보드랍게 만져주더니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별 관찰이라니, 몇 년 만에 듣는 단어인지.

 

 "줄리... 나 물.."

 

 "네에, 후후 다 큰 어른인 것처럼 구시더니, 아직은 좀 더 열다섯의 어린 숙녀로 계셔도 좋아요."

 

 쿠당탕!!

 

 "아가씨!"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열다섯의 어린 숙녀라니? 별 관찰... 그래, 분명 열다섯 살 때쯤 빠진 취미이긴 했다. 그런데 열다섯.. 내가 열다섯이라고? 나는 스무 살에 소드 마스터로 인정받아 가주가 되었고 가주가 되어 5년 동안 황궁에서 그와 함께 일을 하다 스물다섯에 황후로 추대되었는데. 내가 열다섯이라고?

 

 줄리의 말에 놀라 추하게 넘어진 나를 다급히 안아 올리는 줄리. 나를 덮고 있던 무거운 이불이 걷혀지자 나의 체형이 나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뽀얀 피부와 아직 어린 숙녀의 티가 나는 가느다란 팔과 다리 그리고 봉긋한 가슴. 발육이 조금 느린 아직 어린 소녀의 모습.

 

 줄리의 품을 빠져나와 문 쪽의 커다란 전신거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움켜쥐는 듯 했다. 작게 신음 소리를 내며 거울 속의 나와 마주했다. 거울 속의 나는 아직 앳된 얼굴에 가슴팍을 겨우 오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줄리, 오늘이 몇 년도 몇 월 며칠이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해. 나는 황궁에서의 밤이 낯설어 뒤늦게 고집을 부려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고 줄리와 함께 반주를 즐기다 잠이 들어 바엘이 나를 죽이는 악몽을 꾼 거야. 나는 술에 약하니까. 줄리는 황궁에서의 첫날밤에 무심하게 집에 와버린 나를 놀려주려고 저런 말을 하는 것 일거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네?"

 

 놀란 목소리의 줄리.

 

 "오늘 날짜를 물었어. 몇 년도 몇 월 며칠?"

 

 제발 아니길 바라며 줄리에게 다시 물었다. 억지이고 고집인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애써 거울속의 내가 그거 숙취로 보이는 환각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었다.

 

 "카스릴로력 816년 10월 5일입니다, 아가씨."

 

 쿠웅-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나의 이성이 무너지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고 있었다. 열이 훅 올라오는 듯한 감각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바엘의 청혼을 받아 식을 올린 그날. 제국의 황후가 된 날. 바엘이 나를 배신한 그날. 그날은 카스릴로력 826년 10월 5일이었다.

 

jkj**** 17-07-23 22:03
 
재밌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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